84년은 전두환 정권으로 나름 자유로움과 낭만을 강조하고 중고교에선 83년 이후 교복자율화가 정착된 시기였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학도호국단을 대신해 대학교 총학생회가 부활되기 시작했고(85년 초)여전히 전방입소훈련을 거부하기도 하고 대학가는 시끄러웠다. 그리고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가 등장한다.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는 계속 개최되었으며 여전히 학교의 실력있는 팀들이나 가수들이 무대에 나왔었다.
분명한 건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처럼 밴드들의 본선진출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활동이 적었던 건 아니다.
대신 이들은 가요제를 거치기도 했지만 직접 방송사 오디션을 거쳐 나오기도 했고 방송에 나올수 있는 음악 보다는 다소 쎈 음악을 하며 일부에서는 콘서트라는 말이 생겨 소극장공연이 유행을 한다.
리사이틀이 아닌 라이브콘서트...
콘서트면 콘서트지 라이브는 왜 들어갔는지? 의문이 생기는데 그만큼 실제연주와 노래가 있는 무대가 과거엔 많이 부족했고 있더라도 음향과 관련 시스템의 부조화로 실력을 뽐내기 어려웠다.
아무튼 대학가의 밴드들은 학교에 머물렀고 프로가 된 대학밴드들은 밴드로 활동을 하기도 하고 솔로로 독립한 가수들도 생겨난다.
아니면 역으로 자신의 밴드를 만든 가수들도 있었다.
송골매는 잘 활동을 하다 구창모가 솔로로 나오고 배철수도 따로 음반을 만들며 프로화된 옥슨도 홍서범이 솔로로 나오며 이명훈은 진작 피버스에서 나오고 김수철도 작은거인을 해체한다.
그전에 밴드출신이었던 김형룡도 가수로 나오고 건아들 또한 분리 활동한다.
그러함에도 대학가에서 전통을 자랑하던 밴드들은 계속 입상을 하는데 캠퍼스밴드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던 활주로(Runway)는 금상을 수상한다.
물론 그 이후에도 티삼스라든가 ... 소나기가 있었지만 84년 활주로의 수상은 대단한 업적이었고 이들은 꾸준히 가요제에서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종합대학교에 비해 학생수가 적고 시작 자체가 국립으로 학교 분위기가 사관학교 같은 분위기였으나 이들은 부족한 학교동아리 시설( 당시는 써클이라고 함)을 이용하여 연습을 하여 가요제에 입상하는데 가끔은 구성원 중 (학군단(ROTC)교육: 항공대는 재학생중 학군단 교육생 비중이 높았다.)까지 포기하고 나왔다가 공군장교의 길을 가지못한채 현역병 복무를 한 후 가수가 된 이( 배철수)들도 있었다.
물론 사립이 되면서도 학군단은 계속 유지되는데 다른학교에 비해 비중이 높았다.
아무튼 적은 숫자의 학교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 전국대항의 가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건 놀랄 일이었다.
84년 이유진이 대상을 받던 시기 금상을 수상한 '사랑의 회상'을 들어본다.
활주로는 '이응수'라는 선배가 노래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주고 다른 팀에게도 주는데 민요풍이 아니고 뭔가 감성이 풍부한 곡이라 당시 이색적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