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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어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일체고 일체가 하나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9)
이게 이제 법성(法性)을 설명하는 겁니다. 내가 바로 이 일체란 말이지요. 온 우주법계 삼라만상 전체가 바로 나 자신이고, 삼라만상 전체가 바로 나고, 내가 바로 삼라만상 전체다. 내가 바로 우주고, 우주가 바로 나다. 겉에 드러난 이 모양으로써 상으로써는 다 다르지요. 책은 책이고, 마이크는 마이크고, 너는 너고, 나는 난데. 겉에 드러난 상(相)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성(性)으로서 보면 성품으로서 보면 본성으로서 봤을 때는 다 하나라는 것이지요.
하나의 허공, 하나의 허공성, 하나의 바탕, 하나의 불성, 하나의 진리, 그래서 일심이라고도 하고 일불성이라고도 하고 일진법계라고도 하는, 이 하나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사라진다. 이 하나가 바로 전체인 겁니다. 전체가 바로 하나인 것이고. 내가 바로 전체인 것이고 전체가 바로 나인 것이지요. 그러니 내가 전체인데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두려워하려면 나를 괴롭히는 나를 괴롭게 만드는 나를 두렵게 만드는 뭔가가 내밖에 있어야만 가능한 논리이지요. 뭐 귀신이 있어서 나를 괴롭혀야만 내가 두려워하잖아요. 나중에 ‘돈이 없어서 내가 괴롭겠지?’ 아님 ‘내가 지옥 가면 그때 가서 괴롭겠지.’ 이런 게 있어야 두렵잖아요. 그런데 온통 하나밖에 없는데. 지옥 그 자체가 나란 말이지요. 지옥이라는 그 지옥, 천상, 온 우주 전체가 나라면 거기 내가 두려워할 대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뭔가 대상이 있어야만 둘로 쪼개져 있어야만 거기 두려움이 생겨요.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데서는 자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체대비라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중생들은 항상 두려움을 근거로 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왜? 이분법으로 나누니까.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할 수도 있어.’ ‘내가 저 사람보다 뒤쳐질 수도 있어.’ ‘내가 저 사람보다 가난해질 수도 있어.’ ‘내가 지옥에 갈 수도 있어.’
‘내 미래가 두려워질 수도 있어.’ 항상 둘로 나누는 거거든요. 현재와 미래를 둘로 나누고. 둘로 나누는 데는 항상 두려울 수밖에 없어요. 중생들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두려우니까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최대한 더 안정적인 뭔가를 찾는 거지요. 돈, 사랑, 명예, 종교에서 오는 것도 내가 죽음 이후를 두렵게 하지 않기 위해서 종교를 찾고, 그게 둘로 쪼개져야지만 가능한 것들입니다.
둘로 쪼개졌을 때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 속에서 완전한 쉼이 있을 수가 없어요. 완전히 안심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둘 중에서 나아져야 되고, 싸워 이겨야 하고. 그런데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면 부처도 나고, 삼라만상 전체가 바로 나 자신인데, 나라는 하나의 부처인데, 거기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죽더라도 어디로 내가 죽음이라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나고 삶이 난데.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바탕이 난데. 이 허공이 난데. 거기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가야, 뭐가 일어나고 사라지던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바닷가에서 아무리 물결이 쳐도 수천 번 치던 수만 번 치던 하나의 바다는 그냥 언제나 그 자리에 고요히 있는 것이지요. 물결을 따라 갈 필요가 없는 겁니다. 물결로만 본다면 모양만 본다면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싸워 이겨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할 일이 많은데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할 일이 없지요. 무사인 입니다. 할 일 없는 사람, 한도인. 그냥, 그냥 쉬기만 하는 도인입니다. 쉰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다 하면서도 쉬는 겁니다. 마음에서 완전히 쉬는 거지요. 몸은 뭐 수만 번 움직여도 상관없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쉬는 거지요. 왜? ‘아∼ 하나구나.’ 완전히 안심하는 거지요. 나를 공격할 그 누구도 없구나.
나를 지옥에 처박을 그 어떤 것도 없구나. 지옥이라는 그 자체도 나 자신인데. 내 안에서 한 생각 괴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지옥이고,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면 축생이고, 욕심나는 마음이 일어나면 아귀고,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면 아수라 지옥인 것이거든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만들어내는 허망한 망상이었구나. 내밖에 내가 싸워야 될 대상은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분별심 만이 나를 괴롭힐 뿐이지.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삶에서는 오로지 동체 대비심 밖에 없는 것이지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겁낼 필요가 없다. 삶에서 겁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지견이 이렇게 유교적인 것으로 딱 붙어있어서 죽고 나면, 옛날에 전설의 고향을 많이 봐서(웃음) 죽고 나면 삿갓 쓴 새까만 놈이 와서 나를 잡아갈 거 같이 생각을 해요.
불교에서도 보면 저승을 지옥세계를 그려놓은 것을 감로도(甘露圖;지옥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에게 설법을 듣는 불화. 불법을 베풀어 해탈시킨다는 의도에서 감로왕도, 감로탱, 감로탱화라고도 한다.)나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을 막 불로 지지고 칼로 꽂고 뭐 혓바닥을 뽑아가지고 칼로 찢고 뭐 이런 것들을 보니까 ‘야 저렇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속에 막연한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놀라운 장엄한, 장엄함 앞에 우리는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어떤 근원적인 귀의하고 싶은, 귀향하고 싶은, 어떤 근원적인 마음이 있거든요, 누구나. 그런데 그것이 우리는 중생이니까 겉에 드러난 상(相)으로써 고향을 찾잖아요. 내 충청북도 어디 내 고향, 그것이 진짜 고향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 본질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게 상(相)으로 봤을 땐 고향으로 가고 싶다, 이런 거지요 뭐.
그래서 불교에서 법회 시작할 때 처음에 삼귀의, 돌아가서 의지할 곳은 불 법 승 삼보다. 내가 바로 부처고, 내가 바로 법이고, 내가 바로 청렴한 스님이거든요. 내가 본래 나 자신, 나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거지요. 나의 본바탕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물결은 바다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다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귀의이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래서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어 하나가 일체고 일체가 하나다.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무량한 긴 시간이 곧 한 생각이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시간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9)
무량한 긴 시간, 뭐 수천수만 수억 겁을 얘기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시간적 단위를 얘기할 때 어마어마한 겁을 얘기해요. 하늘에 있는 천녀가 뭐 수천 년에 한번 내려와가지고 이 서울시만 한 바윗덩어리를 나풀거리는 옷으로 한번 스윽 스치고 올라갔다가 천년 있다가 또 한 번스치고 올라가는데, 그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일 겁이다.
그보다 더한 표현을 써도 상관없어요. 수많은 세월이 없으니까. 오직 지금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찰나밖에 없기 때문에. 수억 겁이 무량한 긴 세월이고 한 생각입니다.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세월과 다르지 않다. 이거는 우리 경험상으로도 확실하거든요. 생각을 믿지 않는다면 기억을 믿지 않고 그냥 생생한 실존만을 믿는다면 진짜 검증된 것만 믿는다면, 생각 속에 있는 건 잘못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고 기억은 왔다가 가는 거잖아요.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없어지기도 하고 죽고 나면 사라지기도 하잖아요. 이거는 진짜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겁니다. 또 같은 상황을 사람마다 기억하는 게 다 다를 수도 있고. 진짜 생생한 것, 진짜배기. 내가 직접 이렇게 경험하는 것만이 진짜 아닙니까? 지금 경험하는 것만이. 어제 경험했으니까 어제도 진짜잖아요. 어제라고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어제를 경험한 그 순간은 그냥 생생한 현재였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람이 만들어놓은 허망한 착각의 세계, 착각의 어떤 환영의 세계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냥 오늘 지금 이 순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 억겁의 시간을 곧 지금이라고 하고, 지금이 바로 억겁이라고 하고, 지금 이 순간에 깨달은 부처의 나와 아주 어리석은 중생의 내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지요. 너와 내가, 공간적으로는 너와 내가 그리고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이고 시간적으로는 억겁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일 수밖에 없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깨달음이니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9)
처음 발심할 때만 깨달음이 아니라 발심하지 않아도 깨달음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발심을 일으켜서 깨달음을 얻겠노라고 하나의 씨앗의 마음을 내는 것. 깨달음이나 이런 거에 아예 관심도 없다가 ‘아 내가 이렇게 생 노 병 사, 야∼ 이렇게 늙고 병들고 죽고 이러다가 그냥 허망하게 가는 거 아닌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진짜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걸 좀 알고 가야 되지 않겠나?’ 내가 감당하고 있는 이 괴로움. ‘아∼ 지긋지긋하다.’ 몇 년 전에는 뭐 암도 겪어봤고, 뭐 무슨 병도 겪어봤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보기도 하고, 온갖 성취도 해보고, 상처도 입어보고.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고 온갖 삶의 경험들을 해보고 나니, ‘야 세상 뭐 그렇게 목맬 게 없구나.’ ‘이거 아니면 안 된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무너지고.
그래서 절에 오면 이렇게 연세도 좀 지긋하신 분들이 많으신 이유가 생사고락을 경험해본 사람은 저절로 지혜에 관심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내가 그렇게 목매고 살았던 젊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이 다 허망하게 물거품처럼 사라져간다, 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아직 젊은 사람들은 막 성공의 가도를 달려가는 사람들이니까, 균형감각 있게 배우지를 못한 거지요,
아직. 그러니까 아직 불법을 담기에는 좀 어렵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 중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고락을 많이 겪었던지 아니면 시쳇말로 우리가 이 법과 뭔가 인연이 있다고 하듯이. 정말 이 진리의 쪽에 뭔지 모르게 본질적인 것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거, 전자라고 해서 더 훌륭하고 후자라고 해서 더 훌륭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뭐로 가도 깨달음만 가도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삶이라는 것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게 인간계의 목적이고. 그러한 괴로움을 통해서 우리는 괴로움 너머를 괴로움이 없는 삶을 꿈꾸게 되고 발심하게 되고. ‘야, 이렇게 지긋지긋하다.’ 내가 살아있으면서 성취해봐야 언젠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고. 그게 다 불화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돈을 아무리 벌어봐야 뭐 아파트가 대박이 나도 그건 내가 죽고 나면 자식에게 주지요?
그거 가지고 자식들이 싸우느라고 완전 파탄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알 수 없는 거지요. 돈이 많은 게 더 좋은지 없는 게 더 좋은 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병이 나는 게 더 좋은지 병이 안 나고 건강한 게 더 좋은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뭐가 더 좋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는 게 좋을까?’ ‘저렇게 가는 게 좋을까?’ ‘내 남편이 진급을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못해도 어쩔 수 없을까?’ ‘내 자식이 이 대학에 가는 게 좋을까?’ ‘저 대학에 가는 게 좋을까?’ ‘내가 오늘 불교 아카데미를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오늘 한번 제치는 게 좋을까?’ 뭐 이런 온갖 고민들, 고민들 고민들이 있는데 그 고민들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 머리로 아무리 헤아려봐야 뭐 답이 없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답이 하나 있다. 뭐겠습니까? 지금, 지금 이대로가 답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답입니다. 그냥 내가 살아가는 삶이 있을 뿐이고 내가 있을 뿐이에요. 내가 가는 그 길이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길이 진리일까?’ ‘이 길이 진리일까?’ 라고 고민하는 건 분별심이고요. 어떤 고민을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내딛는 그 발걸음이 진리입니다. 단,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남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들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길을 가도 괜찮습니다. 괴로운 길을 가면 그걸 통해 배우고 깨달을 수 있고, 순탄한 길을 가면 그걸 통해 내가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양변 다 나를 돕고 배우고 깨닫게 합니다. 고민이 있을 때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고민이 있으면 턱 내맡겨놓으세요, 마음 안에. 그리고 뭐 결정할 때 되면 알아서 결정하겠지,
하고 그냥 최대한 고민해서 결정을 내놓지 말고 최대한 고민을 내려놓은 다음에 결정해야 될 그 순간에 그냥 턱 한마음 나는 대로 그냥 가면 돼요. 아무 도로나 발길을 내딛으면 됩니다. 그게 내 진리입니다. 그게 이 우주법계의 진리입니다. 내가 걷는 길이 진리입니다. 남들에게 가서 막 질문하고 할 필요가 굳이 없어요. 여기 안에 불 법 승 삼보가 다 있어서, 여기 안에 완전한 법이 있는데. 삶의 나침반이 여기 안에 딱 있는데.
남들은 자기식대로, 의식대로, 생각한 대로의 답만을 주거든요. 생각은 정답이 아닙니다. 생각 너머에 진정한 나의 답이 있는 것이지요. 내 내면 안에 다 구족되어 있다. 원만 구족 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 내는 대로 그냥 살면 됩니다, 고민할 것 없이. 고민을 최소화하면서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a라는 거 b라는 거 선택하려고 할 때, 그냥 강가에 떠가는 나무 막대기가 두 갈래 길이 나올 때 어디로 갈지 저 100미터 앞에서부터 고민을 하나요?
어디로 가야지, 어디로 가야지, 막 애쓰고 이러지 않습니다. 그냥 흐름에 맡기고 그저 흐름에 맡길 뿐이에요. 그래도 어쨌든 ‘이걸 할지?’ ‘저걸 할지?’ ‘그 순간에 결정을 해야 되는데 그때 어떻게 하냐고요?’ 얘처럼 하라고요 막대기처럼. 얘는 고민 안 합니다. 결정도 안 합니다. 그냥 흐를 뿐이지. 그러더라도 두 갈래 길이 나오면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어딘지는 그냥 맡기고 가는 겁니다.
내가 마음을 써도 괜찮은 거지요, 그때. 마음을 써도 됩니다. 내가 딛는 걸음걸음이 그것이 진리다. 내가 바로 부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삶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깨달을 수는 있어도, 실패라는 게 없어요. 삶 자체가 진리인데 어떻게 진리에 실수가 있고 실패가 있겠습니까. 실패라는 생각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실패한 삶은 없습니다. 그 생각이 나를 괴롭게 만들 뿐이지요.
그래서 자유롭게 당당하게 멋있게 걸림 없이 두려움 없이 안심한 채 살아도 좋습니다. 죽은 다음이 두려울 거라는 망상을 버리시고 죽은 다음은 놀라운 장엄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표현을 쓰지요, 임사체험한 사람들도. 죽고 나서 돌아온 사람들이 ‘야∼ 내가 죽음을 체험했을 때 전혀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장엄하고 놀라운 아름다움이라서 다시는 이 세속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오히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그건 스스로의 의지로 그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거에 대한 과보를 받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지만.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뭐 하러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루하루 밥 벌어먹고 사는 게 걱정이다, 라고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지요. 돈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는 내 생각입니다. 돈이 없어도 밥은 먹습니다.
돈이 없어도 진짜로 밥은 먹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돈 없이 미국에 가보니까 돈이 너무 없는데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싫고 돈은 너무 없고 먹을 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먹어지더라고요.(웃음) 뭔 용기가 나서, 그냥 길거리에 있는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국 사람 있으면 일부러 괜히 막 친한척해서 형∼ 하면서 밥 한 끼 사달라고도 막, 저는 그런 용기가 없는 사람인데.
그런 뭐랄까 배짱이 없는 사람인데 돈이 없으니까 그냥 사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먹고. 심지어는 미국에는 신도님처럼 그냥 비빌 곳이 없으니까 한국 사찰에 가가 지고 거기 있는 노 보살님하고 막 친해져가지고 노 보살님이 제가 너무 예쁘다고, 제가 영어 못하는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그 노 보살님은 저를 한국말 너무 잘한다고 예뻐하시고. 우리 손자들은 한국말 못 하고 영어밖에 못하는데 한국말을 이렇게 예쁘게 잘한다고 하면서
막 용돈을 주시고.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더라고요. 돈이 없어도 먹게 되고요.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뭐 설악산에 한여름에 물을 또 안 가지고 올라갔다가 한 10시간 가까이 되는 코스를 혼자 가다가 쓰러졌을 때에도 그것도 저절로 일어나게 되더라고요. 저절로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이것처럼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거기 목매고 사는 거지요.
법계가, 법계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알아서 먹여 살려요. 우주법계가 알아서 먹여 살립니다. 정말로 우주법계가 알아서 먹여 살린다. 그러니 내가 그 고민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있습니다. 생사는 중생의 삶이고요. 열반은 생사를 넘어서는 불생불멸하는 깨달음의 세계인데, 그것이 하나로 같이 있다. 중생이 여기 있으면 그 자리에 부처도 같이 있습니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보배스러운 법의 비가 내려 중생을 돕고 허공을 가득 채우니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은 자기 그릇 따라 이익을 얻는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09)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우보(雨寶), 보배스러운 비가 보배스런 보배비가 언제나 내리고 있습니다. 아주 보배스러운 법의 비가 진리의 비가 언제나 내리고 있다. 비가 안 오는 날도 내리고 있습니다. 법 비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법 비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법이기 때문에. 법의 효과를 증득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법의 비가 언제나 중생을 돕고 진리가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다는 것이지요, 동체대비로서. 허공을 가득 채운다. 이 우주법계 전체를 가득 채운다. 우리가 허공에 깃들어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 모두는 이 법의 비에 어떤 감사함 속에 이 고맙고 감사한 법 비라는 어떤 무한한 자비, 광명 속에 언제나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그 법의 효과, 법의 공덕, 법의 광명을 다 받지를 못하고 자기 스스로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적으로만 열어버리는 것이지요.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은 자기 그릇 따라서만 이익을 얻습니다. 자기 그릇이 요만큼 밖에 안 되면 법의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그걸 받지 못하고 닫아버려요. 그릇에 넘쳐 흘러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릇을 키운다, 라는 거 마음을 열어야 된다는 것, 오픈 마인드를 해야 된다는 것, 진리의 귀를 기울여야 된다는 것은, 내가 그러한 근기가 되면 내가 그러한 그릇을 키우고 마음을 열게 되면 저절로 법의 비를 맞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분별심 때문에 내 생각을 가지고 ‘이건 좋고 이건 나쁜 거야’, 라고 해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적으로 취사간택 하잖아요. 버리고 취하잖아요? 이게 다 부처인 줄 모르고.
괴로운 일이 왔을 때 그 괴로움이 나를 돕기 위한 놀라운 일로서 왔다, 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아 이건 괴로움이니까 버릴 거’, 문을 딱 닫아버립니다, 너는 오지 마라 하고. 그리고 좋은 것만 오면 좋은 것만 싹 받아들이려고 하는 거지요. 공덕천은 받아들이고 흑암녀는 버리려고 하듯이. 그러니까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 안 되는 겁니다.
중생이 모든 부처님의 법 비에도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을 감당하지 못하고 만 허공에 가득 차있는 이 법의 무한한 광대무변한 법의 보배스런 법 비를 맞지 못하고 내가 그것을 자꾸 차단해버리는 것이지요, 분별함으로써 취사 간택함으로써. 그럼 법의 비를 그대로 흡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분별하지 않고 취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열고 닫지 않으면 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어요? 그걸 감당해주는 것이지요.
누가 나를 찾아왔어요? 그럼 그 사람을 만나봐 주는 것이지요. 무엇이든 한 번 두 번 물론 자기의 어떤 뭐 이런저런 생각에 따라서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는 이렇게 거절할 수도 있고 뭐 이럴 수 있겠지만 그 삶이 나에게 왔다, 라는 것은 예를 들어 뭐 병이 왔다, 괴로움이 왔다, 했을 때 그 자체를 한 번 두 번 밀쳐냈는데도 계속 찾아온다.
그럼 내가 감당해야 될 것이구나, 하고 감당해줘야 되는 것이지요. 그걸 감당해주는 것을 통해서 내가 이 법 비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삶을 그대로 허용해줘라. 있는 그대로 허락해줘라, 라고 표현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해서 오늘 의상(義湘) 대사 법성게(法性偈)를 마치고, 다음 시간부터는 육조혜능(六祖慧能)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이제 핵심 부분들을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5분만 쉬었다가 바로 불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박수 (이어서 52분 20초 녹취)
첫댓글 크신공덕 찬탄드립니다 . 나무마하반야뱌라밀()()()
내가 내딛는 그 발걸음이 진리입니다.
단,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남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들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길을 가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