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10.29 이태원 참사 가족, 송진영 가족협의회 대표 직무대행
2022년 10월 29일. 그날로부터 250여 일이 지났다.
159명 젊은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진 뒤, 남은 이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자식, 형제자매의 마지막 순간을 알기 위해서 거리로 나서야 한 날들이었다.
어렵게 유족들이 모였고, 전국을 걸어 돌아다니고, 단식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특별수사본부는 74일간의 수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용산구청장, 용산경찰서장 등 주요 피의자 11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최종 책임이 있는 경찰청장, 행정안전부 장관은 여전히 치외법권 대상이며,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업무에 복귀했다.
참사 희생자 가족들은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하 이태원 특별법)을 요구했다. 그리고 참사 뒤 200일이 넘은 지난 6월 30일 국민의힘 의원이 전원 불참한 상태에서 야당 주도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됐다.
7월 9일, 서울시청 앞 희생자 분향소 인근에서 만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송진영 대표 직무대행(송채림 씨 아버지)은 특별법 제정은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가장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됐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며, 기다려서 이뤄질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기본적으로는 기간 문제다. 국회법상 신속처리안건 법안은 “상임위 180일(이내), 법사위 90일(이내), 본회의 60일(이내) 상정” 과정이 필요하다. 각 단계 최장 기간을 거칠 경우 330일 걸린다.
두 번째는 국민의힘이 특별법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현실적 제정 가능성이다.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뒤,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원장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의 심의와 검토를 거쳐야 한다. 논의를 하지 않으면 90일 이후 본회의에 자동 회부되지만, 본회의 의결까지 시간도 상황도 쉽지 않다.
송진영 씨는 “대부분 시민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이 됐으니 당연히 절차에 따라 진행,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330일이면 11개월이고 내년으로 넘어가게 된다. 내년은 총선이고, 총선 시기에는 사실상 국회가 개점 폐업 상황이기 때문에 법을 논의하고 통과시키는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250여 일이나 지난 시점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법안 검토 시작점을 마련하고, 그마저 앞으로 11개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서 그는 사참위 특별법(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나 생명안전기본법이 제대로 제정됐다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가족들에게 이태원 특별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일상 중 하나는 또 다른 안타까운 죽음의 곁에 서는 일이다. 건설 노동자 양회동 씨의 추모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송진영 직무대행. (사진 제공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가족들이 특별법에 담기를 원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성’이다.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을 두 축으로 하는 특별법에서 가족들은 “독립적인 특별조사위원회 설치”를 가장 먼저 요구했다. 참사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대통령실 이전에 따른 대통령 경호”이기 때문에 이를 조사하기 위해서도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
특별조사위원회는 국회와 유가족이 뽑은 추천위원회에서 구성하는데, 특조위의 역할은 참사의 ‘구조적’ 원인 조사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태원 참사의 원인과 책임 소재 규명, 참사 전후 정부 등의 정책결정과 행정 조치의 적정성 조사, 재난 및 안전 관리 관련 법령, 제도, 정책, 관행 등에 대한 개선과 대책 수립, 이태원 참사 이후 희생자와 피해자 실태 및 구제 방안에 대한 조사, 피해자 지원 대책의 점검 및 개선안” 등이다.
이태원참사 특별법이 좋은 선례, 모범이 되도록 만들 것
특별법의 혜택 대상은 우리 아이들과 가족들이 아니다
송진영 씨는 세월호 특별법과 비교할 때, 이태원 특별법이 다른 것이 세 가지 정도라고 설명했다. 하나는 피해자 범주다. 여당의 주장처럼 “피해자의 사돈, 팔촌까지 넣을 것이냐”가 아니다. 단지 유가족으로만 한정돼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맞지만, 가족 외에 이 참사를 직접 겪고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물적, 신체적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 모두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서울 도심 한복판, 십만 명이 한 공간에 있었고, 생존했더라도 함께 참사를 겪은 이들이 있다. 또 피해자들을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죽음을 겪은 평범한 시민, 경제 피해를 겪은 이태원 상인 등 그 피해는 희생자와 직계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또 “강제 조사권”과 특검이다. 이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가족들은 ‘감사원법’을 차용했다. 감사원에 직접 고발하도록 하고, 공직자의 경우 1년 이상의 중징계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특조위 조사가 끝나면 3개월 안에 무조건 특검을 진행하도록 한다.
송진영 씨는 너무 가혹하고 엄격하다는 지적들이 있지만 “그 정도 처벌은 되어야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인식하고 두려움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사회가 바뀌려면, 이전 틀을 벗어난 제반 조건을 만들어야 하고, 처벌 중심이 아니라 안전한 사회를 위한 경각심, 시스템, 제도가 마련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픈 선례이지만 세월호 특별법으로 제대로 진상규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특별법을 따를 수 없다”면서, “이태원 특별법이 더 나아간 내용으로 만들어지면, 또 어떤 참사가 만약에라도 일어나더라도 이 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되도록 하고 싶다. 좋은 전례가 되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이 신속처리안건이 됐지만, 이마저도 21대 국회에서 제정이 가능할까 싶다는 그는, “11일부터 가족들은 전국 순회 등 이 법의 제정을 위한 행동에 다시 나서기로 했다. 기한을 최소한 한두 달이라도 당겨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6월 8일부터 7월 1일까지 진행한 이태원 특별법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통과를 촉구하는 유가족들의 159킬로미터 행진. 마치는 전날인 6월 30일 이태원 특별법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됐다. (사진 제공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놀러 가서 죽은 사람들....”이라는 낙인에 다시 무너지다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어렵게 모인 이태원 참사 가족들은 현재 110 가족이다. 159 가족이어야 하지만, 일부 외국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끝내 함께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놀러 가서 죽었다”는 잔혹한 시선과 낙인이다.
“그나마 지금의 가족들이 모인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송진영 씨는 “놀러 가서 죽었느냐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왜 이 정부는 이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느냐라고 묻는 것이 맞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한 희생자 어머니가 했던 말, “우리 아이들이 나라를 구하다가 죽은 애국자, 열사는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분들은 우리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그분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민을 이 정부는 버렸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송진영 씨는 “놀러 갔든, 일을 하러 갔든, 진짜 나라를 위해서 파병됐다가 죽었든 이 나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들이 죽지 않도록 지켜 줘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그 의무를 다하지 않고, 놀러 가서 죽었다고 하는 이 정부의 태도,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게 하고, 바꾸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특별법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정부, 공권력을 믿지 않는 것은 사고 소식을 딸 채림 씨의 친구들에게서 들은 때부터다. 참사 직후 10월 30일 새벽 1시, 친구들에게서 전화를 받았을 때 대전에 있던 그가 가장 처음 한 말은 “경찰에게 묻고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큰 사고가 난 현장이라면 분명히 경찰이 대처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딸을 찾은 오후 1시까지 12시간 동안 그의 믿음은 처참히 깨졌다.
송진영 씨의 딸 채림 씨는 의상디자인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면서 곧 자기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만들 것이란 꿈을 꿨다. 인문계고를 다니면서 자신의 꿈을 위해 패션 스쿨 위탁교육 제도를 알아보고, 교장 선생님에게 자신의 꿈을 편지로 써서 반대를 이겨낸 당찬 딸이었다.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 미술 공부, 도예 공부까지 병행하면서 쇼핑몰을 준비하던, 친구들의 고민을 도맡아 들어주던 채림 씨는 이태원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주검으로 돌아왔다.
송진영 씨는 가족들과 만나면서 희생자들 중에 유독 디자인 관련 공부와 일을 했던 이들이 많았다면서, “이태원이라는 곳의 특성상 뭔가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싶어서 갔던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아이들에 대해 ‘마약’이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심지어 분향소 앞에서조차, “마약을 먹고 죽었다”는 말을 들어야 할 때, 그는 달려들어 싸우고도 싶었지만, “유가족다움”이 그를 가로막았다.
“159명이 희생당했다는 것은 159개 가정이 깨졌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잃어버린 가족의 빈자리가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 전과 비슷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세월호 가족, 일본 아카시 참사 가족들을 만나면서, 다시는 그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차피 그렇다면, 남은 일생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생기지 않게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우리 가족들이 가장 힘든 때는 바로 지금이고, 시간이 갈수록 처음보다 힘들다”며, “분노와 제정신 아닌 상태가 걷히면서 빈자리가 자꾸 느껴진다. 이 고통은 말로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족들이 거리로 나서고, 단식을 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거리에서 싸우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하지 말라고 말은 하지만, 그걸 말릴 수가 없다.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정부와 정치인, 언론의 기만과 모욕이 있다. 단 한 번도 가족들을 만나지 않으면서 언론 플레이만 하는 정치인들, 그러면서도 거짓을 유포하는 이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 유가족은 물론, 억울한 죽음조차 존중하고 위로하지 못하는 사회. 그 일들은 모두 가족들에게 극심한 2차 가해이자 또 다른 폭력이 됐다.
송진영 씨는 특히 언론 보도 행태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태원참사 같은 사건에도 가십거리가 없으면 기사화되지 않는 현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현실에서 유가족과 정부를 동급으로 보면서 이른바 ‘객관적 보도’를 한다는 이들, 논쟁은 드러내지만, 그 이면의 사실은 가려버리는 기사들.
그는 “누구든 잘못이 있다면 지적해야 하는 건 맞지만, 현재 상황에서 공평은 공평이 아니”라면서, “특히 특별법 패스트트랙 통과 같은 기사를 보면, 이미 다 끝났다, 해결됐다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실 유가족들은 아무 힘이 없다는 송진영 씨는 기득권, 정부, 공권력, 언론과 싸우면서 절망감이 없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은 시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족들을 모이게 해 준 시민사회 활동가들, 비가 고인 천막이 무너지지 않도록 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물받이를 설치해 준 이름 모를 시민, 행진할 때 필요할 것이라며 양말을 잔뜩 사 온 일본 교포 등 많은 이를 떠올리며, 절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건, 우리 아이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호 가족들도 9년째 싸우는 것 아닌가”라며, “내가 여기서 멈춘다는 건, 내 아이를 버리는 일이다. 8개월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10월 29일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