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이야기] 키파와 찌찟
말씀 새기고, 겸손 다짐하는 기도 복장
- 문설주에 달린 ‘메주자’.
헝가리 유다인 박물관(Hungarian Jewish museum)에 있는 ‘이마에 성구갑을 맨 남자 조각상’.유다인은 아침 기도를 드릴 때, 머리부터 어깨까지 ‘탈릿’이라는 가운으로 덮는 풍습이 있다. 탈릿은 모나 면으로 만든 기도복인데, 성인식·결혼식 선물로 자주 주고받는다. 큰 탈릿은 기도할 때 걸치지만, 작은 탈릿은 평상시에도 입는다. 탈릿 끝자락에는 ‘찌찟’이라는 옷자락 술이 길고 촘촘하게 달려 있다. 이스라엘에서 찌찟을 늘어뜨린 유다인을 만나면, 하혈병을 오래 앓았다는 여인을 떠올리곤 했다. 군중 속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고 병이 나았다는 그 여인이다(루카 8,44). 그이가 만진 옷술이 바로 찌찟이었으니, 예수님도 당시에 찌찟이 달린 옷을 입고 다니셨다는 뜻이다. 이런 독특한 복장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옷술은 민수기 15장 38절을 따른 것이다. “대대로 옷자락에 술을 만들고 그 옷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여라.” 의복 끝에 달린 술을 볼 때마다 이집트 탈출의 기적을 되새기고 율법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민수 15,39-41). 옷술은 본디 자주색이어야 하지만, 당시 자주색은 바다 뿔고둥에서만 추출할 수 있는 귀한 염료라 구하기 어려웠다. 임금·귀족만 자주색 의복을 입을 수 있었다(에스 8,15 ; 1마카 10,20 등 참조). 지금은 흰 옷술을 대신 달고 다닌다. 그러므로 하혈병 앓던 여인이 만진 옷술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인데다, 예수님 의복의 가장 끄트머리였던 셈이다. 끄트머리라도 만지면 병이 나으리라 생각했으니, 그 믿음이 얼마나 크고 절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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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드나들때 마다 율법을 되새기려 노력하기 위한 것이다.
유다인은 탈릿 외에 성구갑이라는 것도 착용하고, 왼팔에는 검은 가죽 띠를 두른다. 성구갑은 이마에 묶는 상자인데, 긴 끈으로 고정한다. 성구갑과 가죽 띠를 묶는 관습은 신명기 6장 8절에서 유래한다.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이스라엘 백성은 집에서나 길에서나 자녀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했으며(신명 6,7), 손·이마에는 주님 말씀을 표징처럼 새겨 붙여야 했다. 유다교는 특히 성구갑을 거룩하게 보아, 하느님도 매신다고 믿었다(탈무드 브라콧 6a). 사해 사본이 발견된 쿰란 유적지에도 성구갑 잔재가 출토되었고 마태오 복음 23장 5절에도 언급된 바 있으니, 예수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랜 전통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구갑을 넓게 붙이고 과시하기 좋아한 바리사이를 이렇게 비판하신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실제로도 옛 랍비들은 타인에게 보여주는 목적으로 성구갑을 매야 한다고 가르쳤으니 무척 흥미롭다. ‘이스라엘이 주님 이름으로 불리는 걸 세상 만민이 보고 두려워하게 되리라’는 신명기 28장 10절을 성구갑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곧, 주님의 이름을 이마에 새긴 듯 성구갑을 맨 이스라엘을 보고, 세상 민족이 두려워하게 되리라는 의미로 풀이한 셈이다. 사실 예수님이 꼬집으신 위선도 성구갑 자체가 아니라, 그걸로 자기를 거룩한 사람처럼 포장하려는 허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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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기도 복장을 하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남자 유다인들. 어깨에 두른 탈릿 끝자락에 찌찟이라는 옷술이 달려있다.
성구갑은 주님 말씀을 이마에 붙이는 것이므로, 상자 안에는 신명기 6,4-9; 11,13-21를 기록한 양피지를 넣는다. 팔에 묶는 가죽 띠에도 같은 말씀을 기록한다. 전통 유다인들은 매일 아침 성구갑과 가죽 띠를 묶고 기도하지만, 안식일·축제일은 예외다. 왜냐하면, 성구갑은 율법의 표징인데 안식일은 그 자체로 시나이 산 계약의 표징이기 때문이다.(탈출 31,16-17: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대로 안식일을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 이 안식일을 지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다.”) 바꿔 말하면, 안식일은 성구갑으로 표시하지 않아도 이미 율법의 표징인 것이다. 축제일도 동일하게 해석해, 성구갑을 매지 않는다.
성구갑을 사용하는 나이는 성인식을 거친 만 13세부터이며, 이런 기도 복장은 남자에게만 해당된다. 잠 잘 때를 제외하고 머리에는 ‘키파’라는 모자도 써서, 하느님 아래 겸손해야 함을 다짐한다. 문설주에는 ‘메주자’라는 상자를 달아, 집을 드나들 때마다 율법을 되새기려고 노력한다.(신명 6,9: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 물론 복장을 갖추어 기도하고 문설주마다 말씀을 새겨 놓는다 해서, 유다인이 전부 독실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듯, 유다 사회에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일상에 적용해 지켜온 꾸준함은 가히 높이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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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17일, 김명숙(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