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정치는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예술)이다.
--새로운 정치를 위한 인문적 기초를 위하여
오동 잎 한 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가을이 옴을 느낄 수 있고, 제비 한 마리가 처마에 찾아드는 걸보고도 봄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 사회나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도 그 조짐이 있는가?
있다고 본다.
최고 지도자나 통치 집단의 도덕성이나 능력, 철학인가?
꽤 중요한 요소이지만, 핵심은 아니라고 본다. 바꾸면 된다.
핵심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꿈과 욕망이다.
특히 청년들이 어떤 꿈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회나 나라의 미래가 보인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불리웠던 유행가에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라는 노래가 있었다.
‘갑순이도 금순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등이 그 가사다.
이 ‘바람’은 무엇인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욕망이다.
이들이 가발공장의 여공(女工)이 되어 수출 입국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
서독에 광부로 간호부로 가게 했다.
열사(熱沙)의 땅 중동(中東)에 가게 했다.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베트남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절대빈곤을 벗어 났다.
내가 청년시절에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넥타이부대가 나오면서 길고 긴 군사독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 청년들은 어떤 꿈에 마음이 설레이는가?
이것이 나라의 미래다.
그런 면에서 어둡다.
물신이 지배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차가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 청년들의 꿈이라면 희망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태로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언뜻 언뜻 그런 희망이 보인다.
세월호 참극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거룩한 마음의 물결은 성격이 다른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온 세상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었다.
원체 강고한 낡은 진영과 그 진영을 있게 하는 낡은 ‘관념’과 ‘정서’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언뜻 하늘이 보였다.
이 하늘을 어떻게 넓혀 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하늘을 본 사람들이 그 심층의 욕망이나 꿈을 바꿀 수 있을까?
빈자(貧者)도 부자(富者)도, 좌(左)도 우(右)도, 경상도(慶尙道)도 전라도(全羅道)도, 노동자도 자본가도 1인당 GDP 3만$을 바라보는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외치는 이 비정상적 상태를 벗어나 나라를 바꾸려는 꿈과 욕망이 어떻게 하면 이 강산에 차고 넘칠까?
청년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과 새로운 욕망을 갖도록 환경과 조건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정치(政治)다.
꿈과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것이 인문운동(人文運動)이다.
이 둘이 서로 침투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 일에 집중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아마도 향후 1년 반과 그 후 4-5년이 분수령이 될 것이다.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1. 새로운 정치
①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정치가 권력 쟁취와 그 유지를 위한 장(場)으로부터 조화와 타협의 기술 더 나아가 국가 권력의 힘을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기술(예술)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도 2500여년 전의 현자는 정치의 본질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논어 안연 편 22장을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께 인(仁)에 대해 묻는다. 그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성현의 공통된 말씀이고, 세계 인류가 궁극적으로 진화해야 할 목표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知人)으로 이어가고, 바른 정치에 의해 실현된다는 취지로 대답한다.
즉 ‘정치란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技術)’ 인 것이다.
<번지가 인(仁)을 묻자, 공자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말 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곧은 사람을 천거하여 굽은 사람 위에 두면, 굽은 사람을 곧게 할 수 있다”
번지가 물러나와 자하에게 물었다. “아까 내가 선생님을 만나 지(知)에 대해 묻자 ‘곧은 사람을 천거하여 굽은 사람 위에 두면 굽은 사람을 곧게 할 수 있다’ 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이오?”
자하 말하기를, “원대한 말씀이요. 순(舜)이 천하를 다스릴 때, 여러 사람 중에서 고요(皐陶)를 등용하자 불인(不仁)한 자들이 멀어졌고, 탕(湯)이 천하를 다스림에도 여러 사람 중에서 이윤(伊尹)을 등용하자 불인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소.”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曰 鄕也 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 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비교적 긴 문장을 소개한 것은 근대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알려진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689년, 영국 의회가 권리 장전을 통해 확립한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정치원리가 공자 당시에 이미 논어의 곳곳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H.G. 크릴이 쓴 ‘孔子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보면, 서구 민주주의에 끼친 공자의 영향을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② 나는 요즘 공자의 제자들인 논어 편찬자들이 인(仁)은 애인(愛人)이고, 애인(愛人)은 지인(知人)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의 정치로 해석하지 않았나 생각이 될 때가 있다.
공자는 요즘으로 말하면 다원주의적 정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묻기를,"선생께서는 왜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공자 말하기를, "서경에 '효도하라, 오직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 있게 하라. 그러면 네가 하는 일에 늘 정치가 있느니라.'고 일렀거늘, 바로 그것이 정치를 하는 것인데 일부러 정치를 한다고 나설 이유가 무엇이오?"
或 謂孔子曰, 子奚不爲政 子曰 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넓게 보면 모든 인간의 사회적 행위가 정치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정치를 묻자, “군군신신(君君臣臣)부부자자(父父子子)”라고 답한다.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것이 바로 정치의 최고 목적인 것이다!
이 때 ‘사랑’은 무엇인가?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데서 출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부모에게 자식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고 물으면, 아마 많은 부모들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나 생각을 자식에게 투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정치 행위는 가정에서 국가의 통치행위에 이르기까지 이치는 같다고 생각한다.
이해관계의 조정도 바로 상대를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갈등 증폭’의 길이냐 ‘상호 조화’의 길이냐가 결정될 것이다.
결국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인문적 토대 없이는 새로운 정치란 수사(修辭)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2500년 전 현자의 이상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어야 진실하다.
이제는 성군(聖君)이 아니라, 성숙한 시민의식이 선거를 ‘정상적인 정치 변혁의 강력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2. 정명(正名)
① 공자의 정치에 대한 유명한 언급이 있다.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정명(正名)을 말할 때 ‘군군신신(君君臣臣)부부자자(父父子子)’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각자 또는 각 집단이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요즘의 부패하고 혼란스러운 정치 현실을 보면 이 말이 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명’이 기본적인 수준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정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저 과거의 낡은 이데올로기나 정서, 현실적인 이해관계 등에 의해 이합집산할 뿐이다.
나는 요즘 여소야대와 다당제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단순한 지역할거를 넘어 보수와 진보의 정명이 이루어지는 정계대개편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정치의 선진화는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② 나는 이와 함께 ‘정명’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을수록 또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이 서로 모순되어 보일수록 먼저 ‘종합철학’을 바로 세워야 한다.
과거의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고정되고 편향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 되게 보이는 요소들이 이제 상호보완하고 인간 진화를 위한 길에서 함께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관점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종합철학이 아닐까. 민주화와 물질적 생산력의 향상 등은 과거에 비해 이러한 종합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어 왔다. 다만 사람들의 의식이 이에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자본계와 노동계 등의 고정관념들이 새로운 정치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역사발전 단계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는 과도기라 하겠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극심한 혼돈으로 느껴지겠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정신이 출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③ 다음은 이른바 중국 공산당과 홍군(紅軍)의 ‘대장정’에 대한 우리 백과사정에 나온 설명의 요약이다.
<<국공합작 결렬 후 공산당이 난징 정부와 대립되는 또 다른 정부를 수립하자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홍군은 국민당이 다섯 차례나 홍군을 공격하자 홍군은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했고, 국민당군의 포위와 추격을 뚫고 기나긴 대장정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11개의 성을 지나 54개 도시를 점령하고, 18개의 산맥을 넘는 368일간의 긴 행군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대장정을 통해 홍군은 항일 투쟁과 공산 혁명의 중심 부대가 되었다.>>
하루에 한 번씩 전투를 하고, 평균 37킬로미터를 걸어 368일간 총 1만 2천 킬로미터를 걸었다. 만년설이 뒤덮인 다섯 개의 산을 포함해 18개의 산맥을 넘었고, 24개의 강과 여섯 군데의 소수 민족 지구를 통과했다. 그리하여 대장정에서 살아남은 홍군은 전체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 3만 명이 전부였다.
마오쩌둥은 대장정을 "장정은 진실한 선언서이며, 선전대이고, 파종기였다."라고 평가했다.
이 시기 마오쩌뚱(毛澤東)은 당과 군의 간부들에게 철학을 공부할 것을 제의하였고, 많은 간부들이 ‘이 엄혹한 시기에 철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반대했을 때, 마오(毛)는 ‘이런 시기야말로 철학을 공부할 때’라며 그의 제안을 관철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에게는 이 말이 논어의 윗 구절과 겹쳐서 들려온다.
나에게는 마오(毛)의 ‘철학’과 공자의 ‘정명(正名)’이 서로 겹쳐서 다가온다.
마오는 한 때 격렬하게 공자에 반대했고 소위 문화대혁명 시기는 그 극에 달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자의 정명(正名)을 ‘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해석하여 봉건군주제와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보수반동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시대정신을 올바로 실현하는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마오(毛)나 공자를 찬양하기 위함도 아니며, 지금의 중국을 지지하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다만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에 그 일을 풀어가는 보편적 원리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④ 나는 우리나라가 처한 국내외적, 지정학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신중간층’의 대장정을 머리에 떠올린다.
이 시대의 뚜렷한 철학과 홍익인간이라는 위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대장정’이다.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를 망라하고,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며(물론 선의의 경쟁은 있겠지만) 나라의 위기를 돌파해 가는 그런 주체를 보고 싶은 것이다.
왜 ‘신중간층’인가?
‘부富’와 ‘교양敎養’을 함께 갖춘 사람들을 나는 ‘신중간층’이라고 부른다. 지난 반세기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탄생한 미래를 향한 ‘주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장정은 목숨을 건 고난의 행군이 아니다.
‘물신의 지배와 각자도생의 차가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나누고 양보하며 협동하는 즐거운 ‘인문혁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3. 개혁의 중심 허리--왜 ‘신중간층(新中間層)’인가?
<어떤 사람이 자산(子産)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 말하기를, “자애로운 사람이다.”
자서(子西)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그저 그런 사람이다.”
관중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이다. 백씨의 병읍 300호를 빼앗았으되,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며 살다 죽었지만 결코 관중을 원망하지 않았다.”
或 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沒齒 無怨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양극화 해소가 아닐까 싶다. 근래 복지문제가 정치적 화두가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진보 진영의 이른바 ‘보편적 복지론’은 보수 진영이 우려하는 ‘재정의 위기’에 대한 대책이 함께할 때 비로소 현실성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 복지의 확대는 재정의 확대를 의미하고, 재정의 확대는 세수 확대를 말하는데, 이때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생산 주체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결국 가진 사람들의 실질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진보진영의 일각에서 잘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사회민주주의제도도 이런 중간층 이상의 의식이 얼마나 진화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공자가 말한 ‘관중의 인(仁)’을 생각해 보자. 자신에게 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게는 불리하지만, 전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떻게 하면 원망 없이 개혁안을 수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때 개혁 주체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큰 저항과 거부감 없이 기득권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한 개혁 주체를 어떻게 하면 형성해 낼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 진보와 인간 진화의 가장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을 하자면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불만을 줄이고 소기의 목적대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우선 개혁 주체가 공평무사하고 개혁을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따르게 된다. 과거에는 정권 차원에서 힘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버려야 할 구시대의 폐습이 되었다. 이제 개혁의 성패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얼마나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체의 권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싫든 좋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원활하게 개혁을 수행해 갈 수 있다.
내가 ‘합작과 연정’ 그리고 좌도우기(左道右器)를 말하는 것도 그런 개혁의 권위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 시대의 개혁의 성패는 중간층의 지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것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양’을 갖춘 신중간층의 지지가 절대 조건이다.
다음 4-5의 글은 일간지에 최근 기고한 칼럼들이다.
4. 합작과 연정의 시대정신
20대 국회가 시작되었다. 국민의 집단지성은 예상과 달리 여소야대와 다당제를 선택하였다.
그렇게 되자 ‘협치’와 ‘연정’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인문운동가의 입장에서 ‘합작과 연정’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해오고 있다.
내가 ‘협치’와 같은 요즘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오래된 말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합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 역사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는 그야말로 세계적 '요충'이다. 정치ᆞ경제ᆞ 문화적 고기압이 발생하면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향하여 그 선량하고 우수한 인자를 마음껏 신장시킬 수 있는 엄청난 보배지만, 만성적 저기압의 상태에선 수난의 원인으로 된다.
요즘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내외적 상황은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사회나 갈등과 모순은 존재하고 따라서 편가름이 있는 것은 당연하나, 그것을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고기압 발생의 핵심 조건이다.
국권을 상실하는 과정도 그랬지만, 삼일운동 이후의 독립운동과 해방 공간에서 '합작운동'이 실패하여, 급기야는 분단과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은 절대빈곤과 독재에서 벗어나 신생독립한 나라들 가운데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일들을 해냈다.
지금의 위기는 업그레이드의 위기이다. 한국의 국가적 과제는 '선진국 진입'이고, 그 주된 내용은 '인간화'다.
진보 세력이 정체 답보하고, 기득권 세력의 자기정화 능력이나 개혁의지 ᆞ양보의 정신을 기대할 수 없으며, 극심한 양극화가 세습 등에 의해 신계급사회로 고착되면, '혁명' 밖에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빼앗고 뒤집는 혁명'으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라 '연착륙'하는 길 이외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 관문이 '사회적대타협'인데,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적 과정이 '합작과 연정'이다.
이 연정은 정치공학적 합작이나 지역연합의 수준으로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할 수 없다.
미봉책이 아닌 진정한 개혁을 위하여, 좌ᆞ우 또는 보수ᆞ진보가 그 정체성을 뚜렷이 하고, 나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같은 방향에 서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치열하게 논의하고 때로는 투쟁하며, 평면으로 해결하기 힘든 상황을 입체로 뛰어 오르는 과정이 진실한 합작과 연정이다.
입체로 뛰어오르기 위해서는 인문적 토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의 위대한 정신이 현대에 살려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상상력을 해방하여야 한다.
거대 기업을 설득할 수 있는 보수, 기득권을 가진 노조를 설득할 수 있는 진보당이 바로 서는 것이 진정한 연정의 기초다.
여기에 인류의 위기에 대처하는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정당이 제 3의 영역으로 삼자 정립(鼎立)하여 연정을 이루는 것이 국가적 과제와 인류적 과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고기압을 이 땅에 실현하는 길이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의 중심교역국가'가 될 것이다.
합작과 연정은 대한민국 안에서의 일이다. 상당한 기간 '한 민족 두 국가'가 현실적이며, 각각의 국가적 과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
북한은 시대착오적인 왕정에서 벗어나는 민주화가 핵심 과제다.
이른바 북한의 급변사태는 외부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날 수는 있다. 우리의 과제는 새로운 북한 정부와 인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민주화된 북한과 합작과 연정에 마침내 성공한다면 위대한 통일국가가 탄생할 것이다.
합작과 연정은 중앙정치에만 절실한 것이 아니다.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 '협동운동‘ '마을운동’ ‘시민운동’ 등의 모든 기층 운동에 그 사용하는 용어만 다를 뿐 본질적 내용은 오히려 더 절실하다.
예컨대 지역 자치의 실력이 그 운동의 대의를 뒷받침할 때 비로소 ‘분권’의 이상이 현실성을 얻게 되고, 자치의 실력은 진정한 시민주체를 형성하는 것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저항을 넘어, 책임‧ 관용‧ 공공성‧ 세계시민의식을 갖추는 것이다.
이번 총선 민심이 중앙정치와 기층운동의 획기적 출발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5. 인문적 바탕 없는 합작은 사상누각(沙上樓閣)
요즘 연정, 협치, 합작 등의 말들을 자주 접한다.
그 필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 정치 현실의 절박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연정을 제도적으로 가능케 하는 개헌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의원내각제가 된다고 해서 연정이 시대적 과제를 푸는 해법으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실력이 안 되면 오히려 그 단점 즉 정국이 더 불안정해질 수 있다.
나는 인문운동가로서 그 ‘인문적 기초’가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느껴오고 있다. 어떤 면에서 개헌 못지 않게 인문운동은 최전선(最前線)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종교 내지 사상이라면 유학과 불교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기둥이 ‘인문적 토대’를 형성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평소 인문운동의 도구로 가장 많이 인용하는 두 문장을 소개하려 한다.
하나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공자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반대하는 쪽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른바 공자의 후계자들과 권력에 의해 수없이 왜곡 변질되어 왔다.
공자는 단정(斷定)하는 것과 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 사람이다. 단정적 사고야말로 합작을 하는데 가장 결정적 장애로 된다. 이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끼리의 합작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
공자의 말이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無知也.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주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空空,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겠다 叩其兩端而竭焉.” (논어 제9편)
그 출발이 무지(無知)의 자각이다. 지금은 중학생만 되어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통과한 것이라는 것을 과학 시간에 공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화석화된 지식에 불과하다. 자기가 사실을 알고 있고, 자기의 판단이 틀림없다는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단정에 바탕을 두고 대부분이 살고 있다. 특히 자신의 판단이나 가치관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심하다.
무지의 자각을 자기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허물어지거나 공격당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자기의 지식‧경험‧가치관‧신념을 비우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사실 그 자체와는 별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공공(空空)의 의미다. 그러면 추진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능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근본 착각이다. 자신이 무오류라는 생각은 활용이 아니라 지배되는 것이다.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공산당이 ‘무오류’를 주장했을 때, 가장 반과학적으로 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다. 단정하지 않고,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아 나설 수 있을 때, 자신의 소중한 지식과 경험은 물론 상대의 그것도 진정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인문적 바탕이 없이는 합작이든 협치든 명목 뿐인 것으로 전락한다.
두 번째는 불가(佛家)의 말이다. 청원유신 선사의 이야기인데, 우리에게는 성철 스님을 통해 익숙해진 말이다.
“노승이 30년 전,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분절Ⅰ) 나중에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무분절) 지금에 이르러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분절Ⅱ)”
무분절의 깨침 즉,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모든 존재는 이어져 있는 하나’라는 것은 이미 현대 과학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도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것 역시 실생활이나 사회적 실천과 유리된 관념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합작은 무분절을 통과한 분절Ⅱ의 의식이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할 때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산’과 ‘물’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입(代入)해보라! 아마도 우리의 삶이나 사회 운동이 질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사회적 대타협이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고, 차원이 다른 문명이 현실이 될 것이다.
일찍이 ‘홍익인간’이라는 위대한 건국이념을 제시한 이 땅에서 좌도우기(左道右器)의 합작과 새로운 문명이 꽃피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비원(悲願)이 아닌가!
6. 정명(正名)이 담아야할 내용
1) 침범을 막는 제도적 규범적 장치- 민주화← 정치↔ 국가
2) 침범할 필요가 없는 물질적 수준- 산업화← 경제↔ 시장
3) 침범을 부끄러워하는 의식의 진화 - 인간화←인문운동↔시민
국가, 시장, 시민의 세 영역에서 제도, 물질, 의식의 상호침투와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러 곳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상론은 피하겠지만, 나는 이 나라의 목표가 ‘새로운 문명의 중심교역국가’이고, 그것을 달성하는 과정이 ‘인간화’와 ‘선진화’라고 생각한다.
7. 새로운 정당--잘 준비된 것은 반드시 실현된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는 광범하고 절실하다.
권력의 쟁취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를 원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새로운 정당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1)정명(正名)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토대로, 구체적인 정강 정책이 합목적적으로 정합성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당이든 보수당이든 새로운 문명을 추구하는 당이든 우선 자기 당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고, 다른 당과의 합작과 연정을 할 수 있는 개방성을 갖는다.
진정한 이념(理念)을 찾고 실현하는 전통적인 보수와 진보 그리고 새로운 문명을 추구하는 제3의 영역의 정당 간에 경쟁과 협력이 시대의 흐름으로 될 것이다.
흔히 이념(理念)의 시대는 가고, 실용(實用)의 시대가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한다.
현실과 떠나 있는 공리(空理)공론(空論)이나 철지난 완고한 이데올로기에 식상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다가온다.
20세기 후반에 세계적 범위에서 많이 이야기 된 것이 탈이념(脫理念)이었다.
여기서 이념이라는 말은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데올로기 특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고 있고,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합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대부분의 이데올로기들은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완고한 관념들로써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보라고 생각한다.
과연 ‘이념의 시대’는 간 것일까?
물론 이념을 정의(定義)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그 의미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념(理念)을 ‘우주 자연의 리(理)에 부합하는 인간의 관념(觀念)’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런 이념의 시대는 온 적이 없다. 따라서 갔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적 사회적 조건이 발달했음에도 새로운 위기나 문제 앞에 직면하는 현대야말로 진정한 이념(理念)을 찾아 실현해야 하는 시대로 되고 있다고 본다.
이념의 시대는 간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것이다.
2) 새로운 사람- 당원
아마도 논어에 나오는 다음 문장들이 새로운 정당의 당원이 갖추어야할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단정하거나 고정하지 않고 오직 의를 추구한다.”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사람들과 두루 잘 어울리되, 편가르기를 하지 않는다” 群而不黨
“이익을 만나면, 옳음을 생각한다.” 見利思義>
이런 바탕에서 일상의 삶과 사회적 실천에 임한다.
그것이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되는 것이 진성 당원의 특징이다.
3) 당내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
직접민주주의를 대폭 도입한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정당의 여러 층위에서 다수결이 아니라 전원일치로 의사를 결정한다.
이를 위해서는 토론과 회의 문화가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연찬(硏鑽) 방식의 보편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위에 말한 당원 자격이라면 이것이 가능하다.
위에 말한 것들은 대단히 이상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이 점차 가능한 시대로 되고 있다고 본다.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질(質)이 양(量)을 창출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있다고 본다.
잘 준비된 것은 반드시 실현된다!
(5)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길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듯, 인류라고 하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대우주의 무대에서 모든 신(神)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화의 장정(長征)을 연출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고 하는 것은 원시에서 현대의 이르는 모든 문명의 단계들이 부침(浮沈)과 생장소멸을 거듭하면서도 같은 시대 안에 아직도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미래에 획기적 전망을 갖게 하는 반면, 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과 테러에 의한 살륙(殺戮), 폭정, 기아, 억압, 수탈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계속되고 있고,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핵전쟁의 위협과 지구환경의 악화는 인류 존속 자체의 위기로 되고 있는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말세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이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인류가 질적 도약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변혁의 장(場), 거대한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독일 철학자 야스페르스(Karl Jarspers)는 2500여년 전 현자들이 동서양의 여기저기서 나타난 놀라운 시대를 이른바 ‘축(軸)의 시대(Axial age)’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동물계로부터 비약(飛躍)한 ‘인간’, 즉 ‘정신’이 출현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비로소 우주자연의 리(理)에 부합한 인간의 관념 즉 이념(理念)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소수의 선각자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것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인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시대 앞에 서 있다.
이제 보편적 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시기가 인간의 행위능력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선각자의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현실과 만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시대다.
그 선각자의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고, 그의 사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 논어(論語)다.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인(仁)을 중심으로 고금합작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5회에 걸친 연재를 마치려고 한다.
인(仁)은 모든 존재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우주 자연계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생명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다.
공자의 인(仁)은 바로 이 인간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관념의 정상화>와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그 동안 가장 오해된 부분이 바로 이 분야 같다.
규범이나 예의범절 제도 등은 이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의 시대와 사회에서 제시한 규범 예절 윤리 질서 등이 굳어져서 그것이 공자 사상의 핵심처럼 인식된 것이다.
공자 사상의 알맹이를 싸고 있던 외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알맹이로 잘 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공자의 반대자들은 물론이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 없이 왜곡되어 왔고, 특히 권력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심각한 폐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비록 부족하고 나 스스로 공자를 왜곡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무릅쓰고, 현대 인류의 지성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인(仁)은 극기복례(克己復禮)다.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니, 하루 극기복례하면 온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을 이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남에게 연유하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구체적 조목을 청하자 공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안연 말하기를,“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 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공자의 대표적 사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아마 초등학생도 인(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 스스로도 인(仁)을 정의하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 안회와의 문답이 논어 12편에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설명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공자는 ‘극기복례가 곧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많이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극기훈련’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잘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빈곤이나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싫어도 참아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척되다 보니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반비례해서 참아내는 힘이 너무 없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라’는 충고를 많이 하시는데 젊은이들의 참는 힘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 분들의 관념 속에는 ‘참는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고 이겨내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극기’(克己)를 그저 ‘참고 이겨내는 것’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극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극기는 절사(絶四)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의 네 가지 끊음을 통해 극기란 결국 ‘무아집’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참아야만 하는’ 부자유의 세계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례(復禮)도 극기와 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복례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위규범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아도 참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사회규범(禮)에 맞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부자유가 있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것이다.
공자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를 즐긴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딱딱한 규범의 세계가 아니라 ‘아집’을 넘어설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이좋음’인 것이다. 즉, 극기복례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아집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참는 것(忍)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恕)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에 비추어 볼 때 공자의 ‘극기복례’는 현대에 와서 더욱 인간의 목표로 삼을만한 것이다.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라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克己)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復禮). 하루라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이다.
극기(克己) 즉 아집을 넘어서는 인격의 성숙과 복례(復禮) 즉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인 것이다.
인(仁)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爲仁由己)이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을 원하기만 하면 그 인이 이르러 온다(我欲仁 斯仁至矣)’라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이다. 실제로 해보면 바로 증명되는 삶이다.
좌측 깜박이를 넣고 있는 차를 위해 잠시 차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그 근방에 인(仁)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양보하는 따뜻한 말이나 행위 하나가 사회적 공기를 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말도 잘못 읽으면 비례(非禮)에 대해서 오불관하는 식의 소극적 은둔적 사고방식이나 금기(禁忌)나 계율(戒律)로 읽기 쉽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로부터 비례(非禮)를 범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시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금기(禁忌)나 계율(戒律)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공자의 태도를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의 진의(眞意)를 왜곡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우선 ‘예(禮)’는 밖으로 나타난 질서나 규범이지만, 공자에게는 항상 내면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허례(虛禮)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이런 구절은 논어의 도처에서 나온다.
‘하지말라(勿)’라고 말한 것은 그 근기(根機)에 부합하는 수행 방식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네가지를 끊은 무아집의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질서(禮)’에 반(反)하는 것에 끌리는 마음을 차단하는 연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연습은 우리 교육에서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질을 떨어뜨리는’ 너무 많은 환경을 청소년기부터 만나고 있다. 게임 광고를 보면 거의 ‘전쟁놀음’이고, 가장 접하기 쉬운 것이 ‘야동’이며, 피흘리는 격투기가 권투 시합보다 훨씬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고, 미움과 분노와 편가름의 막말들이 횡행하고,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를 어려서부터 만나고 있다. 우선 이런 것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참으로 어려운 테마이긴 하다.
자본주의의 상업성이 인간의 낮은 욕망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은 계속 만연한다.
마치 금연(禁煙) 캠페인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담배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과 흡사하다.
이런 질 낮은 사회에 원인을 돌리고 그것을 개혁하지 않는 한 참된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인간사회의 진보나 진화의 과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일면적인 것이다.
사회를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과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는 노력은 어차피 병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교육의 능동적 역할이다.
아마도 공자는 그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공자 당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나아진 물적 · 제도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진정한 교육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선순환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다.
교육은 먼저 자기로부터 ‘인’을 실현하여 천하의 ‘인’을 실현해가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비해 자신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테마로 되고 있는 지금, 진정으로 세상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현대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기복례는 금기나 계율의 세계가 아니라 자율과 자각의 세계다. 다만 그 것을 위한 수행과정으로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보인다.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비례(非禮)를 안보고 안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마음을 미혹시키지 않는 연습을 하라는 것인데, 결국 욕구의 질을 높이는 것이 그 바탕이 될 것이다. 즉 호학(好學), 호례(好禮)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진정한 생명력의 신장이야말로 인(仁)의 핵심 사상이며, 금기나 계율 같은 규범을 확대하는 사회는 결코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힘든 노동에서 해방될 4차 산업혁명의 사회를 생각할 때, 지금의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면 어떤 세상으로 될 것인가?
공자의 말들이 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2. 서(恕)와 충(忠)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한다.
< 자공이 묻기를, “한 마디의 말로 평생토록 실행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 답하기를,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제 15편 위령공)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시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니라.” (제4편 이인)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평생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을 말을 청한 제자에게 공자는 ‘서(恕)’를 말한다.
용서할 ‘서’라고 읽지만, 보통 말하는 ‘나는 옳고, 상대가 잘못했을 때 하는 용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요즘 말로 하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의 생각에 동의해야하느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것이 아니다. 다름을 다름으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공자처럼 ‘무지(無知)의 자각’을 진리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틀림없다’는 것은 근거 없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군자의 특징인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바탕이 되고, 오늘 날의 말로 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구동존이(求同尊異)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사실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서(恕)’는 머리로는 예전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게 되었지만, 아직은 실제의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공자는 그 근기에 맞게 또 물(勿) 자(字)를 사용한다.
그것이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다. 알기 쉽게 말한 것이다.
내가 제일 원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서(恕)’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곡(正鵠)과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다소 간의 자기중심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만 되어도 훌륭하다.
이 서(恕)와 충(忠)이 짝을 이루어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것이다.
‘충(忠)’에 대해서도 공자는 정의(定義)한 것이 없다.
우연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15세기 독일 철학자의 ‘거룩함’에 대한 정의를 보고, 아마 이것이 충과 통하는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에크하르트는 거룩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 해야할 일의 다음을 하는 것, 둘 째 그 일에 전념하는 것, 셋째 그 일이 기쁠 것”
즉 자발성과 전념과 기쁨이다.
서(恕)가 안 되면 충(忠)이 되기 어렵다.
충(忠)은 자신의 생명력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서(恕)는 다른 사람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것인데, 결국 돌아와 자신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게 된다.
어떤 협동조합 강좌에서 내가 한 이야기다.
<<협동조합이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하더라도 망해버리면 그만이다. 내부적으로는 경쟁과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동기를 발전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본령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시장 안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일반적으로 이윤과 경쟁을 동력으로 하는 다른 사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더 큰 비전을 그리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사실 지금의 높은 생산력과 소비수준의 근저에는 ‘경쟁’이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누군과와는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늘 부족한 재화를 놓고 다투다보니 이 ‘경쟁’이 지배적인 인간 행위의 바탕처럼 되어버렸다. 이제는 재화가 풍부해졌는데도 이 경쟁의식은 변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여 ‘무한경쟁’을 찬미하는 지경에 왔다.
그런데 ‘경쟁’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삶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협동조합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사실 나는 이런 동기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중견기업들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협동하자!’고 해서 경쟁을 넘어서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협동할 수 있는 사람, 즉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되는 것이 먼저 되어야 비로소 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협동이 즐거워야 생산력도 떨어지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恕)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일에 ‘자발적으로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공자는 이것을 충(忠)이라 부르고, 15세기의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라 부르건 이 두 상태가 만나는 것이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부자유한 협동, 즐겁지 않은 협동은 공허한 것이다.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협동이 아니면, 마치 주인 없는 공사처럼 생산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 마음을 연습하고 그것을 진척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생산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노동’이 ‘경쟁에 내몰려 쥐여 짜내지는 노동’보다 즐거운 것은 당연하지만 생산력이 나올 수 있을까?
이것은 지난 한 세기가 실험했지만,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과제다.
아무리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더라도 생산력이 나오지 못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 생산력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최근 경험했거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요즘 여행도 많이 하고, 남자들끼리만 살다 보니 식당을 많이 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처음 가보는 식당이라도 잘될지 어떨지가 대강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어제 설렁탕집에서도 처음 신경 쓰인 것이 젊은 청년의 태도였다. 아들인 것 같은데,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그 일에 붙고 있는가였다. 처음에는 좀 걱정스러웠는데, 나중에 마음이 놓였었다. 받아들이는 것이 '서(恕)'이고, 붙는 것이 '충(忠)'이다.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로 꿰뚫음)하였다는 서와 충이 어려운 관념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그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서'이고, 자기 역할에 즐겁게 전념하는 것이 '충'이다.
음식에 정성이 묻어난다. 밑반찬이 좋다. 맛이 있다. 이런 것들은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 식당은 성공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잘하지 못할 때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기업에서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비난 받거나 왕따당하거나 해고된다.
그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라면, 그 일이 그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그가 힘들어하는데 마음이 간다.
어떻게 하면 그가 적성에 맞고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알맞는 일도 알아보고, 노동조직이나 분업도 바꿔보는 방향으로 마음이 나간다.
이런 마음이 서로 작용하는 곳이라야 자본주의의 결함을 넘어설 수 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는 책임이 약하고 느슨해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이런 마음이 사회적 공기로 작용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올 세상은 힘든 노동은 인공지능에 의한 기계화 자동화로 이루어질 것이다.
분배 문제만 원활하게 이루어지면(나는 개인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고 무소유 사회 시스템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서와 충이 보편적인 덕성으로 될 것이다.
아마도 소규모의 농업이나 수공예가 가장 인기 있는 일자리 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자연과 노동의 교감, 아름다움과 노동의 결합, 놀이와 노동의 일치 등 꿈에 그리던 일들이 이루어질 기술적 수준은 머지않아 가능할 것인데,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意識) 지체(遲滯)라고 생각한다.
인문운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종교의 제자리 찾기’이다.
3.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최고의 인(仁)
< 자공이 여쭈었다. “만일 널리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능히 대중을 고난에서 구제한다 면 어떠합니까? 인자(仁者)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자에 그치랴. 반드시 성인(聖人)이로다. 요순(堯舜)도 오 히려 근심하신 바이니라. 인자란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을 세우며, 자기가 이루고 싶으면 남을 이루어주느니라. 능히 자신을 미루어 남을 헤아릴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인에 이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느니라.” (제6편 옹야)
子貢曰, 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
이 구절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인(仁)의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고 받는(give and take) 방식’을 넘어서서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의해 성립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소유 사회’다.
줄 수 있는 물질과 주고 싶은 마음이 준비되어야 가능한 사회이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넘어서는 사회는 이런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불자(佛者)들에게 매우 익숙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도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적 바탕이며 실천적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과거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지평선 넘어로 약간은 보이는 듯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물질적 준비와 의식의 준비가 된다면, 이런 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첫 걸음으로 될 것이다.
공자의 논어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고금합작의 길을 우리의 건국 이념에서 찾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는 위대한 사상이다.
공자가 최고의 인(仁)으로 말한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베푸는 주체와 구제받는 객체가 있지만, 홍익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홍익인간을 ‘홍익만유’로 생각하면 생태적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낸다.‘인간(人間)’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존재로 보면 된다.
재세이화(在世理化) 또한 ‘우주자연의 리(理)를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뜻으로, 불가(佛家)의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을 뛰어 넘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현대적인 말이다.
민족(民族)의 능력도 뛰어나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평균 IQ가 세계 제1이라는 말도 있다.그런데 왜 이렇게 훌륭한 건국이념과 능력이 빗나가고 있을까?
‘물신에 지배되는 천민(賤民)적이고 이기적인 각자도생’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세계 7번짼가로 SLBM을 가진 가난하고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조. 남북의 현실이다.
이 위대한 정신을 지닌 민족이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그 정도(正道)로, 본류(本流)를 찾아 일변(一變)할 수 있다면, 사상과 문화의 강국으로 되어, 석기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지금 세계의 힘(패권)의 질서를 그 근본에서 바꾸는 진원지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이상에 좌우와 보혁이 동반자가 되는 것은 헛 꿈에 불과한가?
나에게 부여된 기회를 활용하여 이 꿈을 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위대한 집단지성이 깨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빈다.
최근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소개한다.
<<좌도우기(左道右器)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일체의 고정관념을 경계한 석가의 이야기다.
하물며 강을 건너본 경험도 없고, 오래되어 사용 불능한 뗏목을 짊어지고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무엇을 지킬 것이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는 시대가 변하면 내용이 바뀔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나는 진보에 가까운 편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진보의 가장 큰 특징을 ‘단정(斷定)하거나 고정(固定)하지 않고, 이 시대의 의(義)를 탐구하여, 실천하는 태도’라고 보고 있다.
증오‧ 편가름‧ 단정‧ 완고‧ 생활과 유리된 관념적 과격성‧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나타내려는 허위의식 같은 것은 진보와는 인연이 없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와 역사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모순 때문에 갈등(葛藤)과 대립(對立)과 이견(異見)이 없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만한 나라를 만들어 왔다.
이제 나라의 외형적 통계들만 보면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했지만, 내재한 모순들을 풀 힘이 없으면, 다시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 침체, 양극화(이중화), 인구절벽, 청년문제, 극심한 국론분열 등에 더하여 첨단핵무기의 실험장으로 만들고 있는 한민족(韓民族)의 어리석음에 심한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좌도우기(左道右器)’라는 말은 경북대 김 윤상 교수의 ‘특권 없는 세상’이라는 책을 보다가 발견한 말이다.
그는 좌도우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가 분열되어, 예를 들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서로 배척하고 증오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는 현실의 우파는 이상사회를 향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속물이며 부당한 기득권을 누리면서 추호도 양보하지 않는 이기집단입니다. 반면 우파의 입장에서 보는 현실의 좌파는, 물정도 모르면서 설치는 하룻강아지이며 ‘사회정의’라는 이상한 깃발을 들고 떼를 쓰는 집단입니다. 이러다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혐오만 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합리적인 좌파와 양식 있는 우파라면 공통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해왔습니다. 좌도우기, 즉 좌파가 추구하는 가치를 우파의 방법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 책을 보고 처음 느낀 것은 이런 생각들이 왜 한국사회에서는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으로 들릴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낳은 끈질긴 증오와 불신, 그리고 불의한 특권으로 강고해진 기득권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현실 인식 앞에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해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 동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좌파는 '평등'에 방점을 찍고, 우파는 '자유'에 방점을 찍는다.
실제면에서 자유와 평등은 부딪치기 쉽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이 성숙하고 상호간의 신뢰가 이룩되면, 좌파는 불평등의 해결에, 우파는 악평등이 불러오는 부자유의 해소에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
불평등은 '같은 것을 다르게(차별) 대우하는 것'이고, 악평등은 '다른 것(차이)을 같게 하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불평등'과 '악평등'의 양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좌와 우는 서로 격렬하게 대립할 필요가 없게 되고, 오히려 서로가 보완 관계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좌도우기'의 이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총생산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진정한 평등의 이상에 접근하는 것이다.
수구적인 좌파나 진보적인 우파가 실제로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지만, 아직 적당한 말이 없어 좌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역사의 복잡성 때문에 좌도우기를 실현하려면 고도의 지혜가 필요하다.
새로운 흐름이 정치와 경제의 중심무대로 나올 수 있도록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한다.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친일’과 ‘종북’으로 공격하는 이상한 환경에서는, ‘좌도우기’는 한낱 공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나는 진보적 인문운동가로서 북한에 민주적이고 정상적인 정권이 등장하기를 누구보다 원하지만, 그 과정이 민족 전체의 참화로 이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해의 소지가 큼에도 내가 ‘한 민족 두 국가’ ‘합작과 연정’을 일관되게 제안하는 것은 ‘전쟁의 우려’와 ‘좌도우기의 희망’ 때문이다. >>
지금 가장 중요한 대안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가치를 체득(體得)하고,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실무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연대야말로 인류라고 하는 긴 동선의 앞 부분이 될 것이다.
이 앞 부분을 더 해방하라!
이 앞 부분을 더 나아가게 하라!
그리하여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제들을 현대의 빛 속에서 해결하게 하라!
그리하여 동선이 긴 인류공동체 안에서 모든 개체들이 빛나게 자신을 실현하게 하라!
그 동안 긴 글을 읽어주신 시대정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고, 이런 글을 실어준 시대정신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격월간지 ‘시대정신’이 이 나라 더 나아가 지금의 인류가 실현해야할 ‘시대정신’을 발견하고 실현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