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서초구 방배동의 유래
- 왕위를 포기한 양녕 대군의 우애 -
양녕讓寧대군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의 맏아들로 이름 은 '제'요, 자는 '후백厚伯'이다. 그는 1404년(태종 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실덕이 많다 하여 148년(태종 18) 폐위 됨으로써 셋째 왕자인 충녕忠寧대군(세종)에게 왕세자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 후 양녕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주유천하로 풍류를 즐기면서도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녕은 조선 초의 격변기 속에서 스스로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자신보다 월등한 충녕에게 자리를 양보 하기 위해 스스로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다.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살아있는 폐 세자는 위험인물로 배척이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세종은 형을 믿었고 양녕도 오해받을 짓을 하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도성 내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한강 남쪽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동생인 상감이 국태민안 하게 나라를 잘 다스려 주기를 빌면서 등을 돌려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方背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 번은 양녕대군이 한바탕 사냥을 끝내고는 둘째인 효령孝寧 대군이 불도를 닦고 있는 회암사檜巖寺에 들러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던 중 양녕 대군이
"불도는 닦아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효령이
"성불成佛하려고 하지요."
답하자
"그것 참 잘되었다. 이 몸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니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겠느냐?"
하면서 거리낌 없이 인생을 살았다.
양녕의 지혜와 양보심이 아니었더라면 세종 같은 성군이 없었을 것이며, 형제간의 우애와 금도襟度가 없었다면 따뜻한 일화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방배동은 우면산과 등지고 있는 동리라 하여 방배方背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마을의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등 배) 모서리(方모 방)란 뜻으로 방배로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방배동은 조선 시대에는 과천현 상북면 방배리였으나조선총독부령 제111호(1914, 3. 1)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방배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방배동이되었다. 그 후 여러 복잡한 연혁의 경로를 거친 후 1988년 1월 1일을 기하여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되어 현재는 서초구 방배동에 이른다.
방배동의 옛 자연 마을은 승방뜰, 도구머리(도구두都口頭), 윗성뒤, 아랫성뒤, 이복골(이복촌二福村), 오목골, 천촌, 사북촌, 새말, 새텃말 등이 있었다.
승방이 있는 넓은 벌, 승방뜰
승방뜰(승방평僧房坪)은 현 지하철 사당역 남쪽, 관악산 기슭 돌산 뒤에 관음사觀音寺라는 절이 있어 승방이 있는 넓은 벌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승방뜰의 위치는 사당 전철역 주위를 다 포함하는데 아마도 현 방배동 관할 구역 내에 이보다 큰 마을은 없었던 듯하다. 80여 호 이상이 거주하던 근방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었다 한다. 현재는 사당역에서 경수국도를 경계로 하여 동은 서초구 방배동이며 서는 관악구 관할로 갈려 있으나 조선 시대에는 과천 상북면 사당리에 속했다. 하지만 당시 자연 마을이었던 승방뜰과 사당이(사댕01)는 총신대 전철역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길가의 88번 종점으로 이어지는 북쪽 산기슭을 따라 자리 잡은 마을을 가리킨다. 현재는 일부가 우성아파트 등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들어 서 있다.
따라서 사당리는 총신대학교 건너편 동래 정씨 사당祠堂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마을의 위치도 총신 대역에서 총신대학교까지 이어진 길 북쪽에 죽 자리 잡은 마을이었다. 현재 우리가 지칭하는 지하철 사당역 부근은 사당리가 아니라 승방평이었다. 현재는 사당동을 한자로 사당동舍堂洞이라 한다.
도구머리
도구머리는 현 관악경찰서 부근의 마을로『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도구두道口頭로 표기되어 남태령을 넘어 승방평을 지나 서울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구머리고개
서초구 방배동의 옛 자연부락인 도구머리로 건너가는 고개를 도구머리고개라 하였다. 도구머리는 도구두(都口頭)라 하기도 하였는데, 옛날 남태령으로부터 한양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입구에 있던 마을이름이었다.
-서울시-
옛날 남태령(南泰嶺)을 넘어서 도성(都城)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입구(入口)에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도구두(都口頭)"라고 하였으며, 인근에 "도구머리고개", "빈도구머리터"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방배(方背)라는 말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洞里)라는 설과,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설이 있어서 도구머리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현재 이 일대에는 이수초등학교와 《방배2동주민센터》가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 도구머리길 입구에는 새우촌 근린공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서초구-
마뉘꿀고개
서초구 서초동 서초경찰서에서 강남성모병원으로 넘어가는 반포로 상의 고개를 마뉘꿀고개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이 고개가 서초동의 옛 자연부락인 마뉘꿀을 지나기 때문이었다. 한자로는 매곡동(梅谷洞)이라 썼다. 이 마을 산이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져서 마치 매화꽃 같다고 해서 그렇게 쓰여왔다. 마뉘꿀은 오늘날 반포2동 5203번지 조달청이 자리한 일대였다. 이 마을은반포동 일대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마을로서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들이 많으며, 15대를 살아온 주민도 있다. 1970년대 초 개발되기 전에는 한강물이 불어나면 조달청 자리에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고개를 지나는 반포로 좌우에는 대검찰청을 비롯하여 대법원·서울고등검찰청·서울지방검찰청·서울가정법원·서울형사·민사지방법원·서울고등법원 등이 들어서서 법조거리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 학술원·예술원·국립중앙도서관·조달청·강남성모병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고개밑 지하철2호선 서초역이 위치한 반포로(서초동 175번지)에는 서울시 지정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향나무가 서 있다. 서울시내에서는 더물게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이 향나무는 높이 15m, 흉고둘레 350㎝, 수령이 1,000년에 이른다. 서울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향나무로서 그 모양새가 매우 아름답다.
-서울시-
서초동의 서초역과 반포동 조달청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마뉘꿀 고개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달청 부근에 옛날 마뉘골이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뉘꿀이라는 말은 고갯마루를 의미하는 속칭으로 일제시대에는 매곡동 (梅谷洞)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옛날 이 고개 주변에는 숲이 우거지고 골이 깊어 호랑이가 출몰한 적도 있으며, 산적(山賊)들의 소굴이 되어 함부로 넘나들지 못했다고 한다.하지만 지금은 반포로가 관통하며 좌우로 서초경찰서와 검찰청이 위치하고 있다.
-서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