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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3:1-18) “소승적 무소유, 대승적 무소유, 번제적 참소유”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의 번제 함께 합니다.
이사야 23장을 봅니다. 우리는 두 군데를 읽겠습니다. 1-5절과 15-18절을 읽겠습니다.
1.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3.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4.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15.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소승적 무소유, 대승적 무소유와 번제적 참소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정확하게 76년으로 기억합니다만, 70년대 이후에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가장 생명력이 강한 화두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소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뜨신 법정 스님께서 던져주신 말씀으로 단순히 말씀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홀로 사시면서 무소유의 삶을 실질적으로 실천을 하셨습니다.
많은 불자들이 그분이 돌아가신 일을 아쉬워하며 지금도 그 분의 책들이 여전히 서점에서 steady seller인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렇게 고귀한 가르침과 삶의 모습에 대해서조차도 불교내부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또 간과할 수 없습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그 무소유가 '소승적 무소유'라는 겁니다. 그러면 대승적 무소유의 관점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한계가 있는 무소유냐는 것이에요.
이 대승적 차원에서의 무소유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시는 무소유는 물질적 무소유라는 것이에요. 물질을 갖지 않는 무소유가 바로 소승적 무소유라는 것이죠. 대승적 무소유는 마음의 무소유를 말한다는 겁니다.
마음의 무소유가 뭐예요? 예를 들어 내가 돈을 소유하지 않았다. 또 소유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은 돈을 소유하고 싶다는 것의 대극점에 서 있는 것으로서 언제든지 돈을 갖고 싶은 마음으로 뒤집혀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험한 무소유, 아슬아슬한 무소유가 소승적 무소유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마음의 무소유, 대승적 무소유는 돈이 있건 없건 마음이 돈을 소유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언어로 표현하자면 마음이 돈 맛을 보지 않는 겁니다. 법정 스님은 돈 맛을 아는 자가 돈을 버리는 것의 무소유로 바로 소승적 무소유이고, 대승적 무소유는 돈이 실제로 없으나 마음으로는 돈을 원하고 있으면 돈은 실제로 소유되고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차원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적 삶의 문제가 집에 남아 있으면서 성불하기를 원하는 또 그래야만 하는 재가자들에게 실천이 가능한 것이냐 라는 의문을 준다는 겁니다.
대승 불교 차원에서는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중생들과 함께 뒹굴면서 바로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내 육신 하나 책임지면 되는 그러한 홀로 사는 모습을 누가 도대체 따라갈 수 있겠으며, 그것이 과연 또 불교가 말하는 진정한 무소유적 삶이겠느냐? 이런 시각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해서 비판적인 내용으로 도전을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적으로 볼 때 무소유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선 대승 불교적 무소유는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있어도 마음이 그것을 탐하고 집착하고 있으면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고 해방이 있겠습니까?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를 말씀하신 것도 자유와 행복을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집착에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소유에 자꾸 매이다 보니 무소유를 이야기하신 것인데,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물건과 물질이 없는 데도 마음은 그것에 집착 할 수 있으니까 대승 불교가 말하는 논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대승 불교가 말하는 무소유에 대한 내용의 문제는 인간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요. 한 번 물어봅니다. 어느 인간이 마음으로 온전히 물질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대승 불교의 도사님들 중에서 그런 분이 계실까요? 원효 대사님? 그분이 과연 이 세상의 물질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향해 갈 수는 있지만 저는 인간이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인간이 그럴 수 없어요. 차라리 법정 스님은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신 것이지요. 한 번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몸부림을 쳐 보는 겁니다.
이 세상의 물질로부터 이 세상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로 부터 오감관을 통하여 수용되는 이 세상의 대상들로부터 한 번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최선을 다해서 표현을 해보신 것이고, 재가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거나 말거나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최선을 해 본겁니다. 더 솔직하고 더 정직하게 당신의 생각을 실천해 보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두로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두로가 어떤 나라이었는가 하면 지중해 해안에서 40km 떨어져있는 시돈과 함께 해상무역으로 근동에서 부를 거머쥔 나라입니다. 페니키아 안에 네 도시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도시가 두로입니다. 어느 정도로 두로의 무역업이 성행했는가 하면 두로가 망하게 될 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 중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5절에 “애굽이 두로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고통을 느끼게 되리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니 애굽같이 큰 나라가 두로는 조그마한 도시인데, 이 도시가 망했다고 해서 큰 고통을 느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3절에 “시홀의 곡식들”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시홀의 곡식들을 가져다가 무역업을 했어요. 시홀이 나일강입니다. 그 큰 애굽이라는 나라가 조그만 두로라고 하는 도시의 무역에 애굽의 경제가 의존해 있었다는 거예요. 두로가 망하면 애굽 경제에 큰 타격이 임합니다. 그런 정도로 두로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업을 성하게 했어요. 이 무역업이 말이 좋아 무역업이지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돈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 두로와 시돈이 돈을 추구하는 강한 성향이 이스라엘 선택받은 백성들에게까지도 오지 않습니까? 그게 누구예요? 이세벨. 시돈 왕의 딸이잖아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이세벨 때문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만연했어요. 바알과 아세라가 어떤 신입니까? 물질적인 풍요의 신입니다. 이렇게 전염이 된 겁니다.
그래서 두로를 멸망시키는데 오늘 예언의 틀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다가 70년 뒤에 바벨론이 망할 때쯤 돼서 다시 일어나는데 똑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음녀의 음란한 짓”이라고 생각을 하신다는 거예요.
무역을 하되 돈을 벌기위해 무역을 하는 이 행위를 음란한 짓, 창녀가 몸을 팔아서 돈을 긁어모으는 짓으로 성경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 번역 성경에 17절을 이렇게 번역했거든요.
“다시 해상무역을 하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두로는 다시 제 몸을 팔아서 땅 위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의 돈을 끌어들일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역업을 하는데 왜 그게 영적으로 보면 몸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과 같으냐? 여러분! 가치(value) 있잖아요. 이 세상의 가치에 눈을 뜬 다는 것이, 마음이 맛을 느끼는 겁니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의 value인데 그 돈을 추구하는 것은 돈 맛을 느끼는 거예요.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에 맛을 느끼는 것이 몸을 파는 것입니다. 맛에 눈 뜨는 것을.
자녀를 키우는데 자녀를 키우는 것에서 마음에 행복을 느낍니다. 맛을 느끼는 것이거든요. 이게 바로 음녀의 몸 파는 행위와 같은 겁니다. 이 세상 무엇에든지 맛에 눈 뜨는 것이 바로 몸을 파는 겁니다. 몸을 팔던 창녀 짓을 했기 때문에 70년 동안의 고통이 주어졌는데 다시금 회복시켜 주셨을 때 또다시 그리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만큼 나라를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자기들이 목숨처럼 귀하게 여겼던 생업의 터전을 다 잃어버리고 70년이나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회복되었으면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니라는 겁니다. 이 소유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승적 불교가 말하는 무소유 마음의 무소유는 이론은 맞아요.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소유가 없어도 마음은 물질을 향하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무소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법정 스님이 기르던 동양난이 마음을 빼앗아 간다고 해서 그 동양 난을 누구에게 줘버림으로 해방을 얻었는데 이건 소승불교지요. 맞아요. 그러나 대승불교가 그렇게 물질적으로 완전한 자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또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15절에 “기생의 노래같이 되리라”라고 나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같은 노래가 있었던 것처럼. 15-16절에 보면 “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같이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같이 될 것이라 잊어버린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라고 나옵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길거리에서 나팔을 불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주목을 받아서 뭇 남성들에게 몸을 파는 기생처럼 돈을 벌기 위하여 무역업을 행했던 두로가 다시 음녀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밌어요. 남 왕국 유다의 주변의 열국에 대한 예언이 바벨론으로 시작해서 두로로 끝납니다. 바벨론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성전을 멸절시킨 나라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세요. 바벨론으로부터 포로 귀환이 이루어질 때,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와서 처음에 한 일이 성전을 재건한 것입니다. 성전이 망하면서 선민이 망했고 성전을 지으면서 선민이 다시금 터전을 잡기 시작합니다. 집을 짓고 나라를 재건하는 게 아니라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면 성전을 멸절한 바벨론, 그 바벨론에 의해서 두로가 망하는데 두로는 어떤 나라입니까? 돈을 숭앙하던 나라입니다. 맘몬의 나라예요. 국가적 정치력 외교력 이런 것 다 두로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돈을 추구하던 나라였습니다. 군사력이 강하다? 이런 것 관계없어요. 문화가 발전했다? 이런 것 의미가 없습니다. 돈을 추구하던 나라예요. 뭘 말합니까? 성전이 없어지면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일은 맘몬 숭배 밖에는 없는 거예요. 이 맘몬 숭배가 가나안 땅에 있는 선민에게 들어오면서 바알 숭배로 바뀌어버립니다. 잘 살아 보겠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70년대 했던 새마을운동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라고 할 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화두로 던져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소승적 무소유든 대승적 무소유든 이 세상의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러면 왜 자유로워야 하냐? 그건 여러 가지 이론이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겁니다. 월드컵이 끝났습니다마는, 축구 선수에게 제일 필요한 마음가짐은 이겨야 하겠다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는 깜짝 놀랐어요. 스페인하고 독일하고 축구를 했는데 1:0으로 독일이 졌습니다. 독일이 어떤 나라입니까? 아르헨티나를 4:0으로 이긴 나라예요. 아르헨티나하고 스페인하고 붙어도 스페인이 이길까 말까해요. 그런데 아십니까? 스페인하고 게임하는 동안에 유효슈팅이 2개 밖에 안 나왔다는 거예요. 스페인이 10개 넘게 슈팅을 하는 동안에. 왜 그랬을까요? 저는 마음이 묶여버렸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독일이 우승할 거라고 점을 친 거예요. 누가 봐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꽁꽁 묶여버립니다. 독일 선수들에게 제일 필요한 마음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승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야 했었어요. 골프 선수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골프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골프 선수가 골프 선수답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나온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길이 뭡니까?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사업가가, 사업가가 되려면 사업할 때 다가오는 그 많은 위기들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꼭 사업을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의 매임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판단이 정확하게 됩니다. 이게 이상한 역설입니다.
성전이 없어지면 모든 인간이 다 이 세상에 집착하게 되어 버립니다. 세상맛에 눈을 떠 버리게 된다는 거예요. 음녀의 짓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번제가 뭐하는 거예요? 바로 이 세상에 대해서 죽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느냐? 그것으로 끝난 상태에서 다시 성전을 떠나지 않습니까? 도로 찹니다. 어떻게 합니까? 번제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 맛을 느끼는 내 마음이 죽게 되고 하나님으로 채워집니다.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 전까지는 자유로울 수 없어요. 육체적으로 배가 고프다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음식물이 뱃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해결이 되지 않아요. 아무리 내가 배고픔이 無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이고, 속이 빈 것은 빈 것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무엇인가로 채워지기 전까지는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렇잖아요? 음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길은 음식으로 배 부르는 거예요. 음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뱃속에 있는 음식까지 다 토해 내면서 무소유를 주장한다고 뱃속이 편안해지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갈증이 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무리 가져봐야 마음을 채울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무소유를 주장할게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으로 채워야 마음이 완전히 만족 할 수 있는 가를 찾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마음 비어있는 뱃속을 비어있는 채로 둔다고 행복해지겠냐는 것인데 고통만 가해지죠.
그러니까 이런 책도 있어요. “무소유로는 행복해 질 수 없다.”라는 책도 있더라고요. 바른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도 마음이 바른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으려면, 이 세상 것으로는 채워서는 안 되잖아요. 이 세상 것으로 채웠다가는 또 그걸 먹고 또 그걸 먹고 바닷물 마시듯이 계속해서 해도 끝이 안나요.
아들이 하버드 대학 들어갔어도 그 행복이 얼마 안가요. 길어야 3개월 지나가면 또 마찬가지고 또 다시 뭔가가 채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끊임없이 매여 살아야 돼요. 두로가 70년의 고통을 받고서도 돌아왔을 때 다시 돈을 먹기 위해서 음녀의 짓을 합니다.
번제가 뭡니까? 세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기는 욕망, 이 욕망은 참 무한한 리필이에요. 세상 물질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세상에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매이는 것은 참으로 무한한 리필이라는 거예요. 무한히 매이고 무한한 욕구가 다시 재생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는다는 얘기를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이지요. 날마다 죽고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는 한 자유가 없어요. 하나님으로 채우고 있는 동안만 자유가 있는 겁니다. 참 소유가 있어야 돼요. 다시 말씀드려요. 마음은 위(胃) 같아요. 위에게 무소유를 강요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음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기간은 우리가 배부른 기간 동안만 자유로워요.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걸 가져다주어도 별로 생각이 없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마음의 배가 불러야 해요. 마음의 배가 부르려면 마음에서 세상 것으로 먹고 싶어 하는 음란한 생각, 돈으로 먹고 싶어 하고, 자식으로 배 부르려 하고, 남편으로 배 부르려 하고, 아내로 배 부르려 하고, 사업 잘해서 배 부르려 하고, 인기로 배 부르려 하는 이 마음이 죽어야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딴 데 뺏기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겠습니까? 들어오실 수가 없지요. 그래서 번제만이 참 소유를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바벨론이 그걸 뭉개버렸어요. 그러니까 남는 것은 바알숭배밖에 없지요. 교회가 번제의 의미를 십자가에서 찾아서 상번제를 드리지 못하지 않습니까? 매번 집회 때마다 상번제의 의미가 살아나지 않으면 반드시 돌아갈 곳은 바알숭배로 돌아가고, 두로에서 번성했던 우상숭배 맘몬숭배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교회가 별거입니까? 선민 아니에요? 남 왕국 유다가 선민이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선민입니다. 그들이 바알 숭배에 앞장섰어요. 남 왕국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두로가 심판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번제를 잃어버려요. 그리고 교회가 다른 방식으로 무소유를 이야기합니다.
‘돈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지 말라.’
그 얘기 백날 해보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돈에 대해서 욕심을 갖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뱃속을 채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지요.
'아, 십자가 다 알고 있는데'라고 하는데 다 알고 있는 걸 왜 일 년 내내 365일 상번제를 드렸고, 다 알고 있는데 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번제로 태워 죽여야 될 우리의 세상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무한 리필 됩니다. 연료의 무한 리필 끊임없이 태워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번제죠. 상번제, 오늘의 번제. (Daily Burnt Offering.) 날마다 번제를 드리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는 모두가 다 맘몬숭배로 돌아가게 돼 있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요. 그렇게 무역업을 해서 돈을 추구하고 돈을 벌었지만, 결국은 그 성전 지을 때보면 두로와 시돈에서 물자가 충당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돈은 여호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것이라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러분! 돈에 대해서 이 세상 그 무엇에 대해서 맛을 느끼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 자식이 대학만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맛. 돈을 100억 정도 벌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맛. 기가 막힌 거죠. 이걸 탐닉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이 맛에 대해서 죽으세요. 세상 가치에 대해서 죽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소유하세요. 하나님으로 채우세요.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모든 종교와 사상과 철학의 한계가 바로 여기 있는 거예요. 다 자유를 원해요.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워야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죽을 때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간다고 하잖아요. 이 세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죽어야 끝이 나기 때문에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상과 종교와 철학과 모든 고귀한 인격이 추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예요.
말씀드렸듯이 사업장에서 사장님에게 첫 번째 요구되는 마음이 사업장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고, 축구 선수에게는 축구장으로부터 자유고, 골프 선수에게는 골프장으로부터의 자유고, 엄마한테는 자식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자식을 객관적으로 올바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주어지지 않아요. 자식으로부터 배 부르려고 하는데 자식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월드컵에서 우승해서 기뻐하려고 하는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까? 월드컵에서 졌어도 이만큼도 흠집이 안 날 만큼 충분히 자유로울 때 축구도 잘 되는 거예요. 그 자유가 번제를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죽음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을 소유하게 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소승적 무소유는 그 몸부림이 가상하고 귀하지만 안타까운 것이고, 대승적 무소유는 인간에 대한 너무 긍정적인 평가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안 돼요. 인간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 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예요. 그러므로 번제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고 날마다 죽는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번제로 인한 참 소유가 여러분의 경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70년의 고통을 겪고도 또 다시 돈이 지상 목적이 되었던 두로처럼 성전의 번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십자가를 통한 번제의 의미가 나의 사건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맘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어서 내가 대하는 이 세상에 모든 대상과 장소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하나님을 소유하여 기쁘게 하시며 오직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의 삶을 만들어 가시고 이끌어 가시는 복된 가나안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우리의 마음은 성전!
하나님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오늘도 이 싸움을 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을 누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