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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의 깊이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인류세 시대의 해체적 시학 읽기
- 박철영 평론집 『해체와 순응의 시학』중심
이정훈 (문학평론가)
1.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과학자들이 지질학적 시간으로 인류세Anthropocene라고 구별 지어 말하듯이 사회·경제적으로 급격한 변혁을 겪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와 환경·빈부격차 문제에서 전 세계적으로 만연하고 있는 감염병 확산문제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당면한 여러 난제들이 변혁의 과정에서 파생된 부산물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부담을 안겨다 주고 있다. 우리 문학계도 이러한 시대 변화에 대해서 발 빠르게 대처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과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서로 소통하고 삶의 관계를 모색하며 시대를 관류하고 있다.특히 4차 산업 혁명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대변동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이러한 문제는 정보 격차로 계층과 민족들 간의 상대적 갈등과 고립을 유발시키고 있다.
과거 전후 상황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J.P.Sartre가 말했듯이 작가란 시대적 변혁과 현실에 마땅히 참여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작가란 모름지기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글쓰기를 통해서 현실문제에 참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르트르는 시와 산문을 구별하여 “기호의 왕국은 산문이며, 시는 회화, 조각, 음악과 같은 편이기 때문”에 참여형태의 문학 장르로서 산문을 더 선호하였다. 사르트르의 경우 시는 산문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시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시는 말을 섬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언어의 비도구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참여문학은 언어를 도구로서 인식할 때야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시인은 단번에 도구로서의 언어와 인연을 끊은 사람이다. 시인은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본다는 시적태도를 단호하게 선택한 사람이다.”그럼 우리는 시인들 중에 참여시인이나 저항시인도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다. 물론 시와 산문의 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들의 지나친 구분은 당시 민중주의populism경향의 시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논쟁은 논의의 결말이 난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낡은 제도와 사고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이를 재구성하여 사회 변혁을 이룩해 나가는 데 기여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작가라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문제에 대해서 모르쇠로 외면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이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참여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그래서 작가는 지난 시대의 문학을 뒤돌아보며 작금의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또 작가와 소통하는 독자 사이에서 일하는 평론가들은 시대의 변화상을 나름대로 통찰하며,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문명의 대전환시대에 우리가 나가야할 길에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지 모른다.
2. 변증적 시학의 전개
이번에 박철영이 상재한 평론서 『해체와 순응의 시학』(인간과문학사 2020)은 우리에게 그동안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가는 데 있어서 문학인들의 문학적 도정道程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시에 대한 “해체와 순응은 기존의 모든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형태를 구조 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을 통해 시대와 사회 현실에 맞게변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박철영)라고 말했듯이 스마트 혁명이라고 불리는 4차 산업시대에 문학도 모든 것을 해체하고 그 토대 위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쓰기보다는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과거의 전통과 과거의 유산은 오늘날 새롭게 재해석하여 미래 사회의 도래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문학적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필자 역시 생각한다. 이번에 발간된 박철영의 평론집을 중심으로 저자가 말한 우리 당대의 많은 작가들에 대해 쓴 시평들을 대상으로 해체와 순응의 시각에서 공정하게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될 것이다.
박철영의 평론서를 일별하자면 크게 시인들의 성향이나 시가 갖는 위의威儀를 통해 구분하고 있다. 첫째 남도南道라는 지역정서를 기반으로 한 시인들에 시적 경향을 살펴보고 있으며 그들이 갖는 의식의 범주와 정체성까지 고려하고 있다. 또한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들을 살펴보고 있다. 국가권력에 의해서 자행된 인권 침탈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문학적 인식을 통해 작가들이 어떻게 정치·사회적 의식 변화를 추구해 왔는지 그 참여정신이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내용이 그 본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문학의 본질이자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서정적 시편들을 다루고 있다. 현대인들의 배금주의적 삶의 태도에서 인간적 삶의 본질을 되찾고자 노력한다. 일찍이 마이크 데이비드가 말했듯이 인류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의 재평가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는 양극화와 부의 편중, 삶에 대한 다원주의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의 모순을 노정하고 있다.따라서 문학 역시 이런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현대인들의 의식에 미친 영향과 사회적 환경 변화에서 그동안 시인들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박철영은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 작품 속에 함유된 인간에 대한 정신적 의미를 살펴보고 시인들의 기호나 그 취향에 맞추지 않고 작가 나름대로 작품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 글을 재단하고 있다. 시에 대한 그의 비평은 꼼꼼한 시 읽기와 엄정한 척도를 적용하여 그동안 여러 시인들이 이룩한 성과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이번 평론집에서 박철영이 논의하고 있는 여러 방향의 시평들이 박철영의 평론의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는 데 난삽한 느낌을 주지만, 저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많은 시인들의 개별 작품에 거론된 시평들이 다양한 부류의 시 해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작가가 주력하고자 하는 평론의 큰 줄기를 그리는 데 역부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남도의 시인들을 비롯해서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그동안 저자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라 볼 수 있는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엄청난 분량의 시평들을 써 왔다는 점은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이번 평론집을 통해서 박철영 평론가가 이룩한 성과와 그 의의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1부에 실린 ‘기표와 기의의 경계 지점’이라는 주제로 평한 남도 시인들의 시평을 살펴보면, 우선 평자가 작품을 성실히 읽고 시인의 작품 세계와 현실 인식에 천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철영은 고재종의 「백련사 동백숲길에서」를 살펴보며 사물의 미약한 진동마저도 인간의 삶으로 승화시켜 교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내 딛는 발자국마디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중략-/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無明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 번쯤 걸어보긴 걸어볼 참인가.” 이 시를 분석하며 박철영은 자연과 사람 간의 소통은 고요한 응시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의 사는 모습이 낭만으로 치부되지 않고 오히려 매번 시에서 사실적인 삶으로 가감 없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저자 자신이 평론가이자 시인으로서 시인과 교감하며 시인의 작품에 나타난 그 세계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혜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는 고재종의 시가 이웃들의 삶을 냉철하게 주시하되 엄격하게 시로써 발화한다,라고 말한다. 가령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 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 // 오늘도 강변에 고추 명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낱 같은 흰 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앞 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라는 대목에서 현대산업시대에 들어와 소외되고 몰락한 농촌을 배경으로 쓴 전원시의 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도시화의 블랙홀에 점점 몰입되는 작금의 현실을 거슬러 농촌공동체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하는 것만은 아니다. 박철영은 그런 시적 발화를 낳게 한 공간적 배경으로 시인의 고향에 주목하고 있다. 전남 담양은 조선조 선비들의 정자 문화의 발원지이자 호남 유교 사상의 본거지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비록 주류 정치권에서 밀려났지만 이 곳 선비들은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선비로서 자존심과 절개를 학문의 숭상을 통해 펼쳐 보였다. 그래서 고재종의 시도 남다르게 읽혀질 수 있으며, 그의 시적발화도 당대 풍토와 인심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박철영은 이를 가리켜 시적화자의 “온정이 농경의 오랜 정서에서 자연에 순응하듯 형상화 된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창호지에 어리는/ 달빛에 몸 뒤척이다가/ 못내 설레는 가슴 마루 끝에 나가서/ 활짝 열린 사립을 넘어보다가// 사무치는 그리움/ 더욱 못 이겨/ 환한 마당 질러 동구에 나섰다가/ 동구 옆 새하얀 메밀밭가를/ 옷고름에 눈물 적시며 온통 서성이다가// 이윽고는 타는 가슴 불나서 불나서/ 머언 신작로까지 나갔다가/ 막차도 끊긴 신작로를/ 열 발 높은 수숫대로 종내 목 늘이다가// 끝내는 오열 솟구쳐/ 길섶 찌르래기 울음으로 스러지는 마음/ 차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그만 푸른 눈빛으로 우러르는 거기/ 부처님 같은 어머님의 만월.”(「추석」 전문)에서 상상 속 고향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과거 속에서 실재한 현실이었다,라고 말한다. 추억 속의 고향에 대한 공간인식은 오늘날 도시적 삶을 사는 현대인의 공간과 서로 어긋난 사뭇 낯선 공간이다.
이어서 정윤천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이라는 작품을 평가한 「기표와 기의의 확장 지점」이라는 시평을 검토해 보자.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 사용된 말들이 문자화 되고 그 과정에서 분화되어 사물화된 것이 시이다. 따라서 역사적 흐름과 변화를 시를 통해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현실과 시의 불화를 경험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언어는 기표와 기호로 구성되어 있다. 박철영은 일상 언어 속에서 “지속되어 온 확장된 의미작용이 기호라고 보았을 때 인간과의 관계론적 사유에서 유발되는 서정성은 어떠한 시적 태도보다 견고한 위치에 서 있게 된다”라고 말한다. 또한 정윤천의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일반적 서사성을 응축한 시어와 공간으로 문학성을 드러낸다고 말하며, 그의 시 구조는 형식보다는 사유에 기대고 있어 은근한 심리묘사와 장치들 역시 시인의 장점이라고 평가한다. 현실이라는 토대 우에 과거까지 호명하고 있는 초년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망초밭이 따라왔다 부추밭이 더 열심히 따라왔다 만물상회 차부 앞의 한 봉지를 갔었다 심부름을 밀가루 봉지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찾아 나서야 할 국수틀을 돌리던 하염없는 일과 상여 꽃을 접어 파는 무섭고도 아름다운 일을 치르던 친구네 사이에 끼어 있는 먼지 푸석한 점집의 문턱 한 줌이 담겨 있었다 무섭고도 아름답기로는 점집 안도 환했던 것 같았다 궁금한 데가 많았던 하얀 분(紛) 같은 하루는 어디에서 날아왔을까 밀가루 봉지를 싸맨 신문지에 와 걸렸던 갈래 어디로 바람아 너도 차부 앞의 큰길에서 돌아오던 그때 군데군데에서 더듬거렸던 것 같았다.”(「초년」 전문) 잊어진 풍경이 고스란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돌려진다면 욕망이 배제된 과거는 상처가 되지 않는다. 잘 인하되지 않는 추억 속에서 시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 속 사진첩을 들추어내었다,라고 평한다. 과도한 욕망으로 급격한 변화의 체제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추억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초년」은 망초밭, 부추밭, 상엿집, 점집이라는 소재를 통해 잊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시어들이 현재성 내에서 하얀 눈처럼 흩날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김지란의 시집 『가막만 여자』를 평한 「파문波紋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바다의 삶」을 살펴보자. 이 글에서 박철영은 “시인이 바라본 시간 속 사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대상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시적 근원으로 구체화한 성장기 ‘바다’ 이미지는 사실성을 담보한다. 예를 들어 “선원 월급 주는 날/ 지폐를 헤아려 가다/ 생선 비늘이 말라붙은 만 원짜리 한 장/ 돈을 세는 내 손가락을 붙잡고 만다// 돈에다 빨간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멸치 두 상자’/ 긴박한 생이 화석처럼 멈춰 있다”(「품삯」 부분)라는 시에서 화자는 생선 비늘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지폐 한 장을 발견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의 상징인 화폐에서 과거의 소중한 시간을 불러내는 순간이다. 배금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배태된 지폐는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하지만 시적화자는 여기서 화폐의 교환가치보다 화폐를 거쳐 간 사람들의 땀에 전 체취를 맡고 있다. 이는 웅숭깊은 시적 대상인 동시에 교감으로 문장 내에 작용한다. 또한 시인의 가슴속에 아득히 꿈처럼 떠 있는 ‘섬’처럼 시인에겐 끈질긴 생명력 같은 가족이 있다. “다 하지 못한 숙제가 모래성처럼 쌓일 때마다 가슴속에 앉혔던 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만조滿潮에 잠기곤 했다 물속에서, 영원에 영원을 더해서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갔다”(「섬」 부분)에서 박철영이 지적한대로 이 섬은 실재하는 섬일 수도 있지만 맥락상 아버지와 어머니로 변주될 수 있다.
박철영의 평론집은 현학적인 시적 담론이나 유명세를 타는 중견 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평가하기 보다는 역사의 무대에서 소외되고 핍박받았던 시인에서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기개를 굽히지 않고 자신만의 문학적 세계를 천착하고자 했던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활약상을 남도의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 보이며 그 작품들을 애정 어린 시선과 냉정한 잣대로 평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3. 시인의 존재와 역사인식
또한 박철영 평론가는 제2부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주목하고서 이를 문학적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시대의 아픔과 유족의 슬픔, 그리고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염원한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5·18에 대한 문학적 인식을 통해 우리시대의 정치·사회적 의식 변화에 미친 영향까지 살펴보고자 했다. 여기에는 이승철 시를 분석한 「시대 인식과 시적 행동들」과 조성국·조진태의 시를 평가한 「시대의 양심과 자유 의지」 , 나종영 등의 시를 검토한 「80년 광주 5월, 문학적 범주와 위의」 그리고 김준태의 시를 톺아본 「흙에서 찾으려는 시대적 사유 의지」 등이 포함된다.
먼저 이승철 시를 분석한 글을 살펴보면 “말 못하는 벙어리 산천에 태어나/ 끝끝내 나는 피 토하며 한반도 산야에/ 이름 없이 쓰러질망정 술 백 잔의/ 고행으로 꽉 찬 허구한 날들/ 끈적끈적한 어두운 밤하늘 내 손으로/ 기어이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면/ 이 젊은 목숨 어디서나 피투성이 가슴팍 일 거외다./ 술 백 잔의 가을 문턱에는/ 젊은 고행 젊은 넋들 두 그림자 있어/ 들판도 동구 밖도 잠 못 이루고/ 밤새도록, 밤새도록 뜬눈입니다.”(「자화상」『오월』 부분)에서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발생한 상처가 국가라는 폭력으로 자행된 것이었다면 개인이 감당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과거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마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어서 개인이 결국 감당해야할 몫이 되었다,라고 박철영은 말한다. 나아가 시인을 술과 고독 속에 더욱 혹독한 자괴감 속으로 몰아넣었다,라고 해석한다. 문학의 근원인 ‘광주’와 아직도 결별하지 못한 채 밤새워 쓴 자화상만 통어의 중심처럼 구조화되지 못한 채 텍스트로 남았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 「5월」을 보면 "그날 스러져 영산강이 된 꽃 넋들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천지를 꽉 채우고/ 살아, 욕된 눈빛만 남은 자들이 모여/ 팔뚝 없는 주먹으로 저 먼 길을 가리킬 때/ 누가 지금 오뉴월 보리밭에서 흔들리는가,/ 어서 오라, 그대 5월의 젊은 벗들아/ 우리가 무릎 꿇고 맞이해야 할/ 오월 생목숨의 날이 바로 오늘이구나.”라는 대목이 있는데, 박철영은 이 시를 분석하며 시에 내재화된 슬픔 같은 근원이 어디서 왔는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묵은 유물로 덮어버리는 시도 앞에 “그날 스러져 영산강이 된 꽃 넋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강한 의지를 놓지 않는다. 끊임없이 아픈 기억으로 연상되는 80년 광주 5월을 지켜낸 생목숨들의 절망이 반복되더라도 “그대 5월의 젊은 벗들아”를 호명하며 역사의 그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는 간곡해진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후에 출간된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도서출판 b 2016)를 살펴보면 “시인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거기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아 삶의 의지를 재확인한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지만 결국엔 “그대가 끝내 피워내지 못한 꽃들/ 그것이 그대를 더욱 위대하게 하리라./ 뉘라서 그 오묘함을 알 수 있겠느냐./ 그것이 뼛골 시린 그리움이 아니라면/ 부르고 또 불러 끝내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 우리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과 나는 오늘도 거기 서 있어야 하리.”(「마량리 동백나무숲에서」)라고 결론내리면서, 우리의 삶에 “피워내지 못한 꽃들”이 있음을 자각하는 일 자체가 치열하고 거룩한 “사랑”임을 깨닫는다.”다시 말해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개인의 아픔과 고뇌로 내재화 된 광주 5월이 시인의 삶에 있어 어떻게 다시 삶의 의지를 재확인시켜 주는지 그 궤적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박철영이 말한 한 시인의 작품에 대한 진정한 해체와 순응의 시학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한편 제3부에 실린 시평 중 「전복한 사유로 욕망된 시선들」이란 글에서 마경덕의 「물의 잎」을 부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도 중간 부분이 생략되어 일반 독자들이 감상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먼저 시 전문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캄캄한 물의 위장/ 찰나에 수면이 닫히고/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한 호수//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물의 잎」 전문 (『사물의 입』)
평론가 고봉준이 시집 해설에서 “시인은 말하는 존재 이전에 듣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듣는 존재로서 간주함으로써 사물에게 ‘말하는 입’을 주는 존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사물의 그 미약한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존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섬세한 청각의 소유자. ‘사물’에 대한 마경덕의 시는 이러한 시인의 존재론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듯이 마경덕의 「물의 잎」은 ‘물’이라는 이미지에서 ‘입’이라는 동물의 이미지 환원함으로써 사물이라는 존재의 시적 재현으로 삶을 성찰하는 시이다.
박철영은 이 시에 대해 “사물의 이미지를 꿰뚫어 찾아낸 내면의 사유는 전복적 관점에서 이뤄진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전복적 관점이야말로 시에 대한 기존 관념의 틀을 부수는 ‘해체적’ 의미의 시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시가 전통적 서정에서 벗어난 듯 한 느낌을 주지만 오히려 서정의 범주 안에 있다,라고 평한다. “소소한 사물도 시적 세계에서는 발설 이전 변증을 거쳐 강력한 시 의미로 환기되고 있어 그 실감의 느낌은 크다”라고 논하고 있는데, 필자는 사물에 대한 변증보다는 그 이미지를 꿰뚫어보는 시인의 혜안이나 직관에 더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물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섬세하고도 천부적인 소질이 더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사르트르가 얘기했듯이 “시인은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본다는 시적태도”를 새삼 인식하게 해준다.
이와 달리 「현대인에게 유용한 가치들」이라는 문태준 시평에서 박철영은 현시대 환경변화에 대한 문학적 성찰로서 시의 위상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그는 「어떤 모사」를 분석하며 “인간의 이기심보다 자연법칙에 충실한 본래 그대로의 대상을 바라”보며 “인간이 덧칠한 이기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보다 타자를 의식하는 행위야말로 냉소적인 사회에서 현대인이 살아가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한다.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보았다// 간소한 선線// 유리컵에/ 조르르/ 물 따르는 소리// 일상적인 조용한/ 숨소리와/석양빛// 가늘어져 살짝 뾰족한/ 그 끝/ 그 입가// 그만해도 좋을/ 옛 생각들// 단조롭게 세운 미래의 계획/ 저염식 식단// 이 모든 것을/ 모사할 수 있다면// 붓을 집어/ 빛이 그린 그대로/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 따라 그려보았다” 「어떤 모사」 전문(『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또한 평자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통해 “현대사회의 냉소적인 환경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타자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적 세계관”을 발견한다. 또한 「가을비 낙숫물」에서 ‘비움의 시 미학’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시세계가 서려 있다.
4. 해체된 시의 현실 인식
마지막 제4부에서 신용목의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를 평한 「변용變容과 관용寬容 사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평자는 젊은 시의 시를 개괄하며 그 성향을 “어둠에서 막 빠져나온 듯 또 다른 시의 유형으로 낯”섦을 얘기한다. 산수유꽃을 분석하며 “꽃 피기 전 긴장이 도사린 산수유꽃 몽우리의 아픔을 감지해낸 것도 시인만의 선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한다. 아버지의 일상을 시적화자의 관찰자 시선으로 묘사한 「낫자루를 들고 저무는 하늘」을 살펴보면 “저 산 산새나 내려앉을 골에 들어 아버지 낫을 놀리시네 달램도 없이 저무는 해 툭툭 나무들 꺾여지는 상처마다 어둠이 신음처럼 피어나는 것을/ 나는 넓적바위 위에 앉아 바라보네 나무 속의 어둠과 나무 밖의 어둠 나른한 경계에 서는 검은 낫의 비림 갈라지는 바람의 능선에서 어미 없는 나방이 고치에서 풀려날 때 얼굴 없는 기다림아 나는 흔들리는 개망초 시름을 거두러 잃어버린 길로 내보낸 마음 무릎을 모으면 산그늘이 걸어와 볼을 비비고 가슴을 쓸어 저 먼저 엎드린 마을로 뚜벅뚜벅/ 한 짐 굽어진 산길 어둠을 받쳐 내려오신 아버지 다시 구들을 지고 앓는 밤 나무들 돌아가듯 연기는 자꾸만 산으로 구부러지고”(「낫자루를 들고 저무는 하늘」 전문) 라는 시를 인용하였는데, 책에는 마지막 행이 빠진 채 부분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행을 근거로 “시인에게 사물로 다가온 서경을 통한 서정으로의 변용은 극히 상투적일 수 있지만, 안과 밖이라는 대립 항이 아닌 순정한 마음으로의 회귀여서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분석은 탁월하지만, 독자들의 가독성을 위해 인용시 전문을 인용할지 부분적으로 선택할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평자가 신용목 시인의 작품을 택한 것도 지난 오래된 시간에 대한 반추를 통해 기존의 시 경향을 해체하여 재구조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 유형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오현정의 시집 『라데츠키의 팔짱을 끼고』를 평한 「해체된 시의 경계와 현실인식」을 살펴본다. 「화성에 가기 전에」라는 시를 분석하며 평자는 “시인은 ‘와디럼’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서서히 적응해 간다. ‘세 시간’을 견뎌야 하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방법과 그런 환경에서 ‘버섯바위’가 적응에 성공하는 생존 방법까지 알아간다.”고 말한다. 와디럼(Wadi Rum)은 럼주처럼 붉은 모래사막 내 협곡, 한 때 물이 흐르던 자리를 말한다. 지상의 자연환경이 흡사 화성을 닮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버섯바위’는 사막의 모래바람에 의해 바위의 아랫부분이 마식된 암석지형을 일컫는다. 흡사 버섯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모양은 상부가 아주 크고 하부가 아주 가늘어 여차하면 떨어질 듯이 보인다. 따라서 “숯불로 달궈놓은 사막의 구덩이에 세 시간을 견디면/ 곧 떨어질 것 같은 버섯바위도 제집을 짓는다”라는 구절은 한 낮의 태양빛이 조금 비껴나면 버섯바위의 그림자가 제집을 짓듯이 모래사막 위에 드리워진다는 의미이다. 또 박철영이 이 시에서 “탐험으로 이곳저곳을 찾아다닌 하루가 바위산에 그어진 ‘와디’라는 흔적으로 남았다”라고 해설한 부분은 시적화자가 말한 “화성으로 가기 위해 와디 하나 긋는다”라는 구절에서 차용한 것 같은데, 사실 이는 재고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바위산은 고생대 암석으로 이뤄진 퇴적암과 이후 형성된 화산암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평자가 말했던 부분은 바위산에 그어진 ‘와디’라기 보다는 퇴적암 층리에 해당된다. 아니면 그 부분을 <‘모래사막’에 그어진 ‘와디’라는 흔적으로 남았다>라고 표현해야 옳을 듯싶다.
이 「화성에 가기 전에」라는 시에서 평자는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가 현실보다 먼 피안까지 보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주적 사고의 이동은 지구라는 태고의 시간을 거슬러 가야만 가능하다고 평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멸까지 예감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이자 피안의 세계를 설정해 보인다. 문학적 자장을 넓히려는 과정에 나타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기존의 시 쓰기 유형을 초월하려는 노력으로 보고서 그 변신이야말로 ‘해체된 시의 경계이자 현실인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문학비평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의 의미를 도출하며 개별 작품이 갖는 다른 작품 간의 관계망을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일이다. 따라서 비평가는 개인의 안목으로 대상 작품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단계를 넘어서 전체의 시선으로 개별 작품의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우리는 『해체와 순응의 시학』을 통해 시가 사회변혁에 대처하는 새로운 경향에 대해 파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만족스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비평의 소중한 역할에 대해 새삼 깨달게 되었으며, 비평에 대한 저자의 성실하고 부지런한 소임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작품을 통해 그 의미망을 포착해내려는 엄정한 비평적 잣대와 객관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평론집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몇 가지 보완하자면 첫째, 개별 시인의 작품 변화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한 작품보다는 여러 작품을 대상으로 한 시계열적 분석이 요구된다. 특히 ‘해체와 순응의 시학’이라는 제목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점이 절실히 요구된다. 둘째, 해당 시인의 시를 인용할 때 전체를 인용할 것인지 아니면 부분 인용할 것인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용시를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인용할 때 작품 전체의 흐름을 잘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고재종의 「흑명」이란 시는 2004년 『쪽빛 문자』에 상재된 시인데, 2012년 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에 재 수록된 시이다.
보길도 예송리 해안의 몽돌들은요
무엇이 그리 반짝일 게 많아서
별빛 푸른 알알에 씻고 씻는가 했더니
소금기, 소금기, 소금기의
파도에 휩쓸리면 까맣게 반짝이면서
차르륵 차르륵 울어서 흑명,
흑명석이라고 불린다네요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뿐이라던
뮈세여, 알프레드 뒤 뮈세여
- 흑명黑鳴 전문
이 시는 완도군 정도리 구계등에 있는 갯돌이 파도에 굴려져 침식되는 과정을 화자의 시 창작과정과 연관시켜 형상화 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화자가 왜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1801~1857)의 말을 왜 인용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뮈세라는 시인의 전체적 삶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뮈세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로서 낭만주의 시대에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이다. 조르즈 상드G. Sand와 정열적인 연애로 행복한 희열과 상심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문란한 생활로 시적 고갈을 가져오기도 한 인물이다.그런데 박철영은 이 시의 마지막 절만 부분 인용하여 뮈세의 모습이 “시인(고재종)의 모습일지 모른다”라고 하였다. “상처는 오랠수록 잘 낫지 않는다. 그런 상처와 고독으로 절명한 알프레드 뮈세보다 시인에게는 앞으로도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고 평한 것은 너무 느슨한 해석이 아닌가 싶다.
또한 시의 행갈이가 다소 모호한 인용시(신용목, 「낫자루를 들고 저무는 하늘」) 도 있는데, 이는 철저한 서지書誌적 확인 작업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이 박철영이 얻은 평론적 성취를 상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학작품을 부지런히 읽고, 바쁜 일상에서도 비평의 펜을 놓지 않는 그의 성실함이야말로 우리 비평계의 큰 미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다음 평론집을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정훈 문학평론가, 2018년 계간 『문예연구』신인문학상(평론 부문)으로 등단. 최근 평론으로 「고결한 풍류사상의 발현과 선비정신: 송동균론」, 「땅위에 돋을새김한 농군의 서사」 등이 있음. 한국작가회의 회원. que-sais-je@hanmail.net
첫댓글 이정훈 평론가가 보내준 장문의 평론을 읽으면서
우선 그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또한 글을 쓰게 된 동기와 진정성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는 생각이어서
이정훈 평론가가 바라본 객관적인 관점도 관심있게 보았다.
그리고 내가 쓴 『해체와 순응의 시학』 530p에 달한 방대한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준 마음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