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 장거리 항해의 목적
또 다른 지인이신 김기자님께서 15일쯤 스리랑카 Galle에 오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 편에 C80, 엔진벨트, 유수분리기 필터, 정로환, 라미실 원스(약국), C타입 고속 충전 usb 케이블 3. 나사 고정용 록타이트, 괜찮은 쌍안경, 캔 김치. 들을 부탁드려본다. 임대균 선장이 주문한 요트 부품을 이분께 전달하면 된다.
어제 존 왓슨 선장 팀(크루 3명)과 저녁을 먹었다. 하루 종일 엔진 수리를 도와 준 게 너무 감사해서 저녁을 사려고 했는데, 여긴 무조건 더치페이란다. 호오. 그런데 그중 필리핀 엔지니어 로베르토가 완전 기분파다. 맥주도 무지하게 마신다. 화장실 가는 것처럼 하더니 저녁식사를 쏴버렸다. 나는 너무 감사하면서도 또 염려다. 엔진 수리 신세도 지고 또 남의 회식자리에 이렇게 끼어도 되나?
또 스코틀랜드 문화인지. 안주 없이 맥주만 들이킨다. 각자 5캔씩은 마시는 것 같다. 술고래 들이다. 한 캔에 800루피다(3,325원) 이렇게 저녁 내내 술만 마시나? 은근히 배도 고파오고 어쩌나? 하는데 술 마시기가 어느 정도 끝나니 저녁 식사를 주문한다. 나는 매운 크랩과 감자튀김을 시켰는데, 크랩이 엄청나게 단단하다. 이빨로는 불가능. 집게로도 깨기 힘든데, 로베르토가 한입에 박살을 낸다. 다들 놀란다. 로베르토 별명이 ‘조스’가 되는 순간이다. 다들 위험하니 피하자고 농담을 한다. 한국인, 스코틀랜드인, 필리핀인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이다.
1차가 끝나니 2차로 바닷가 클럽으로 놀러가잔다. 클럽이름은 카타마란. 도착하니 현지 루피가 모자란 모양이다. 1,000 루피(4,156원)를 툭툭 요금으로 낸다. 몬순시즌으로 해수욕장 시즌 오프라 우리가 들어가니 그제서야 조명을 켠다. 멋진 해변이다. 강원도 양양과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클럽이 도열해 있는데 손님은 몇 없다.
역시 회사는 회사다. 술기운을 빙자해, 로베르토가 식사 후 휴식과 몇 가지, 불만을 이야기 한다. 존은 굉장히 인간적인 사람 같은데, 업무상 캡틴으로 돌변한다. 너는 우리 중 가장 편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한 급여를 받는다. 회사엔 룰이 있다. 이 룰은 절대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불평 그만해! 단호하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해변을 산책한다. 그들의 회식에 내가 낀 것이고, 지금은 그들만의 시간이다. 나는 저런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후 11시 쯤 다들 너무 취했다. 나는 콜라를 마셨으니 말짱하다. 존이 계산을 하려할 때, 내가 나선다. 6,650루피(27,637원) 이다. 오늘 총 7,650루피 썼다. 엔진고치고 밥 얻어먹은 것 치고는, 너무 소박한 씀씀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5월 10일 오전 7시 20분 존이 조깅하며 제네시스 앞을 지난다. 역시 선장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자기 배에 구경하란다. 오케이 오전 9시에 취사용 가스통와 세탁물을 맡기고 내가 그리로 가겠다고 했다.
오전 8시 식사를 마치고 누군가 소리를 쳐 나가보니, 뒷 계류줄이 끊어졌다. 제네시스가 무겁긴 무겁다. 1개이던 계류라인을 3개로 보강한다.
오전 9시 마리나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조셉 패거리들을 마리나 입구에서 만났다. 세탁물과 취사용 가스통 2개를 맡긴다. 그리고 디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디젤 1리터당 1.288달러로 합의 한다. 내일 모레 쯤 제리캔에 기름을 다 담아야겠다. 500 리터면 852,843원이다. 다른데 비하면 저렴하지만, 조셉 패거리들은 아마 횡재 수준일거다.
오전 9시 30분. 존의 배로 갔다. 어제의 용사(?) 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터그보트는 처음 타본다. 생각보다 에어컨 빵빵하고 기본 시설들이 잘 되어 있다. 다들 열심히 설명해 준다. 그리고 해치 보수용 실리콘도 두 개 얻어 온다. 염치없다. 세탁기가 빵빵하다. 세탁물 가지고 오란다. 어휴 지나치게 막 퍼주는 존이다. 오늘 저녁 존의 에이전트가 초대하는 파티에도 참석하란다. 또 염치없지만 그래 볼까나? 오후 5~6시 사이 연락 한다니 기다리자.
제네시스로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장거리 항해는 이런 멋진 친구들을 사귀는 목적도 있다. 나는 이번 항해에서 벌써 수십 명의 외국선장들과 인연을 만들고 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항해를 진행 중이다. 또 나 역시 그들에게 내가 얻은 정보를 준다. 이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항해의 주목적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이다.
오전 10시 20분. 얻어 온 실리콘으로 해치 보강 작업 중인데, GAC 사무실 엔지니어가 왔다. 엔진 벨트를 다시 확실하게 재러 온 거다. 말한 지 3일 만에야 왔다. 일단 스페어로 하나 가지고 있자. 임대균 선장이 정품으로 또 하나 사오니 2~3년은 문제없다.
어제 수리한 연료 펌프에 관해 생각을 정리한다. 이렇게 수리하면 된 건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 뒷머리를 잡는다.
일단, 이배가 바다에 들어 온 뒤로 한 번도 연료 펌프를 수리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10년 이상 사용했으니 조그만 연료 펌프 구멍에 타르가 끼었고, 모래 조각 같은 알갱이들도 있었다.
연료펌프 연료 공급 구멍은 아주 작으니 저런 이물질에 막힐 수 있다.
존이 입에 물고 바람을 불어도 안 통했는데, 청소하니 바람이 잘 나온다,
수동 펌프가 한 번 누르면 올라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펌핑이 확실하다 연료가 잘 빨려온다는 반증.
이렇게 깨끗하게 청소했으니 또 10년은 그대로 사용가능하다. (물론 이상하면 다시 청소해야지)
출항 전에 미리 엔진오일, 엔진 오일 필터, 유수분리기 필터를 갈고, 1~2시간 엔진을 켜고 상태를 확인하고 출항하자.
이렇게 정리를 하니 마음이 좀 놓인다. 엔진 트러블이 있었으니, 정신적 트라우마도 있는 모양이다.
오후 3시 15분. 오늘은 하루 종일 비다. 몬순 시즌이 바로 장마철인가 보다. 해 있을 때 해치에 실리콘 작업을 하고나서 꼼짝도 안하고 있다. 괜히 돌아다니면 돈쓰고 더위와 매연, 먼지에 고생이다. 그러나 우울하다. 비 오는 스리랑카 Galle 마리나. 우중충한 선실에 선풍기하나. 인도양에서 여기 올 때는 천국이나 오는 것처럼 기쁘더니, 한국까지 갈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리나가 점점 더 장난꾸러기가 되어간다. 페이스톡 화면에서 신나게 뛰노는 어린 딸을 보니 반갑고 기쁘고 슬프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무슨 의미의 눈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기 천사 같은 내 딸. 아빠가 멀리 있어 미안해.
옆에 오스트레일리아(호주)서 온 배가 하나 왔다. 제대로 세계일주 항해용 배다. 곧 이집트로 간다고 하니, 내가 알려줄 일이 많다.
오후 5시, 옆 배에 오일석션 펌프가 있단다. 정말 다행이다. 내일 오전에 오일 교환 해야겠다. 김형호 기자님이 15일 Galle 도착하신다니, C80과 부품도 받을 수 있다. 모두 잘 해결되고 있다. 주변의 도움이 너무 감사하다.
엊그제 산 선풍기가 고장이다. 도대체 골 때린다. 모터가 고장 나는 경우가 다 있나? 내일 바꿔야겠다. 산지 이틀만에 모터 고장이라니 믿어지지 않는 불량품이다.
오후 6시. 존 왓슨 크루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간다. 바나나 비치라는 곳이다. 서핑 하는 서양인들이 많다. 다들 비키니를 입고 서핑을 한다. 양양은 전부 서프 수트를 입고 서핑 하는데, 생경하다. 1차로 맥주 한잔씩 하는데, 폭우가 쏟아진다. 5월부터 9월까지가 몬순 시즌이란다. 이번 벵골만 항해 때는 비가 많이 오겠다.
오후 8시 2차로 식사를 한다. 5명이 요리 하나씩 주문하고 맥주를 제법 마셨는데, 한국 돈 8만원이다. 한국에서야 큰돈 아니지만, 여기서는 1달 월급에 가까운 거금이다. 대한민국 같이 좋은 나라의 국민이라는 게 정말 다행이다.
존이 내일 또 저녁식사 같이 하잔다. 이러다 나도 존의 배 크루가 되어 몰디브까지 함께 가겠네. 그러나 좋은 벗이 생겨 단독항해의 외로움이 사라지고 있다. 나중에 스코트랜드 꼭 오란다. 에딘버러에 진짜 위스키를 맛보게 해준다고 한다. 존을 만나 금주가 깨지겠네. 그러나 나는 금주를 계속할거다. 에딘버러에서는 맛만 봐야지 맛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