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백제 대왕 견훤 이야기
아들아, 상상 속의 동물..아니 영물이라 해야 하나. 용은 곧 제왕을 상징한다.
뱀, 구렁이, 잉어 같은 것들이 물 속에서 1천년을 수행하며 기다리면..여의주를 얻어
용이 되어 승천한다고 하지. 그 용이 되기 전단계의 영물이 이무기라고 해.
아빠는 앞서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런 이무기 같은 미완의 영웅, 실패한 영웅으로
후고구려를 건국했던 궁예를 이야기 했었다.
이번에는 그 두번째 이야기로 후백제의 대왕 견훤 이야기를 해볼까해.
후백제 견훤왕릉에서(충남 논산시 연무읍)
몇 해전에 아빠, 엄마와 세밑, 새해여행을 떠나서 충청도 논산 연무 땅의 야산 위에
외로이 있던 큰 무덤을 봤었지.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느냐.
그때 날씨도 흐려서 우중충하고, 싸락눈까지 내리는 것이 마음도 춥게 만들었는데..
그 날씨가 아마 그 무덤의 주인공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큰 무덤이 바로 견훤왕릉, 그 무덤에 누워 멀리 전주 방향 모악산을 바라보는 이가
견훤대왕이었다.
아들아, 삼국사기 권 제50, 열전 제10은 궁예와 견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삼국사기 열전의 견훤(甄萱, 867~936)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아.
삼국사기 열전 견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출신이다. 현재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 일대를 말한다.
본래 이(李)씨였다가 후에 견(甄)씨로 바꾸었다고 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 어머니는 상원부인이고..아버지 아자개가 원래 농민으로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고..그렇게 견훤의 출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견훤산성(경북 상주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농민출신이라 했는데..
일개 농민이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그것도 아자개가 신라의 관직을 받았다는 뜻도 아니고, 그렇다면 아자개가 상주에서
세력을 키워 장군이 되었다 함은..
그가 그 지역의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들어 견훤의 출생지를 상주가 아니라 전라도의 광주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선 상주출신이라는 것이 정설이고..통설이다.
견훤의 성장과정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가 있는데..
견훤의 부모가 농사를 지으며, 한편에 포대기에 싸인 어린 견훤을 놓아 두었더니..
호랑이가 내려와 견훤에게 젖을 먹였고, 이를 마을 사람들이 듣고 범상치 않게
생각했다고 삼국사기에서 전하고 있지.
역시 큰 인물 답게 성장과정의 이야기도 남다르지 않느냐.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견훤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광주 북촌의 한 부호에게 어여쁜 딸이 있었는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에 찾아와 자고 가고 했는데 그 남자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고..
딸이 아버지에게 털어 놓으니, 아버지는 딸에게 일러 그 남자의 옷깃에 긴 실을 단 바늘을
꽂아 놓으라 했지.
후에 남자가 다녀간 후 실을 따라 가보니 큰 지렁이가 있었다고 해.
그 딸이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았고..이 아이가 바로 견훤이었다고 하는구나.
견훤의 아버지라는 지렁이가 입었다는 자주빛 옷은 고귀한 신분을 상징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이라면 역시 광주의 호족 출신이라는 것인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가 일반적이진 않았다는 말이겠지.
후에 견훤의 지렁이 관련한 이야기는 후일 안동지역에서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과
벌인 고창전투에서도 등장한단다.
견훤이 출신과 성장부터 남다르고 비범했지.
견훤은 성장해서 서라벌로 가서 입대했고, 서남해로 가게 되었으며..
용기있고 용맹하여 주목을 받아 비장(裨將)이 되어 출세했다고 하는구나.
아들아, 여기서 서남해를 주목해야 한다.
서남해는 지금의 전남 해안지역..특히 나주를 포함해, 목포, 무안지역을 말하고
이 지역에는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라는 군대가 있었어.
신라 9주에 각 하나씩 설치된 지방군 조직으로 10정이 있는데..
무주(武州, 현재의 광주)지역을 관할하는 군대가 바로 미다부리정이었단다.
그러니까 견훤이 처음 세력을 일으켜, 빠른 시일 내에 옛 백제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세운 기반이 된 것이 바로 바다로 통하는 넓고 풍요로운 서남해라는
지역적 기반과 미다부리정이라는 군사력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견훤이 서남해로 온 시기는 신라 말 진성여왕 때였지.
계속되는 기근으로 농민들은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고, 역병이 돌아 또 죽어나갔어.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왕실부터 귀족들까지 사치스런 연회로 날을 지새고, 백성들을
돌아보기는 커녕 쥐어 짜기에 바빴고.
백성들은 분노해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민란을 일으키고, 초적이 되고..
유민이 되어 떠돌았단다.
끝내는 나라의 힘이 약해져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므로, 자연히 지방의 실력자들은 힘을 키워
스스로 장군을 칭하며 독자적인 길을 갔고..이들은 세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해.
한마디로 말해서 난세(亂世)였지.
아들아 난세는 다른 의미에서는 영웅이 일어나 뜻을 펼 기회이기도 하단다.
견훤은..야심있고 능력 출중한 사람이었어.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이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해의 주현을 치니
가는 곳마다 그에게 호응하여 달포 동안 규합한 무리가 5천을 넘었고,
무진주(武珍州,현재의 광주)를 쳐서 함락하고..왕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내부로는 왕을 칭하면서 외부에 공식적으로는 왕을 표방하진 않았지.
견훤이 반심을 품었다. 누구에게? 신라였겠지?
김부식은 견훤이 신라의 신하인 자가 야심을 품고 반역했다 그말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런데...견훤이 물론 그를 따르는 군대의 힘도 있었겠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큰 저항없이
넓은 땅을 점령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고 모여들었다면..
그건 신라가 백성들의 믿음을 잃고,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역심을 품은 견훤을 질타하기에 앞서 신라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고, 그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은 현실부터 직시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좋았을거라고 아빠는 생각해.
견훤은 서남해를 순행하며 완산주(完山州, 현재의 전주)에 이르니 백성이 맞아들이고
드디어 견훤이 백제의 부활을 선언하며 신라에 대한 복수를 공언하고..
공식적으로 후백제의 건국을 알리며, 왕을 칭하였으니 이때가 서기 900년의 일이었다.
견훤이 내세운 새로운 백제, 백제의 부활이라는 명분은 그가 자리잡은 서남해와
무진주, 그리고 완산주 일대..옛 백제땅의 백제유민 출신인 백성들에게 잘 먹혀들었고
또 새로운 나라를 빠르게 안정시키면서, 바다 건너 중국 양자강 지역의 오월국과
교류하며 외교적 수완을 보인 것을 보면..
견훤은 용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식견도 상당한 인물임을 알 수 있지.
견훤은 후백제의 대왕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확실히 장악하고..
신라를 계속 압박하였고,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과
본격적인 후삼국 통일전쟁을 벌였지.
주요 전장은 대야성(현재의 합천)을 포함해 주로 경북의 중부와 북부지역이었어.
고려와의 통일전쟁은 치열하게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되었어.
영토는 고려가 더 넓을지 몰라도,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하며 많은 백성을 가진..
후백제의 힘이 더 강했지.
견훤은 927년 10월 신라의 왕도 기습침공과 뒤이은 공산전투에서의 대승으로
경북의 중북부 일대를 석권하며 연달아 전투에서 승리하며..고려 태조 왕건을
압도했지.
그런데..이때가 견훤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고, 곧 내리막길을 걷게 돼.
930년 지금의 안동 와룡면 일대에서 벌어진 고창(古昌)전투에서 견훤이
안동지역 호족들과 태조 왕건 연합군에게 대패한 것이 견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신호탄이 되었지.
또 결정적으로 견훤이 친정 하였음에도 934년 1월 운주(運州,현재의 충남 홍성)에서
참패하여 후백제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지.
견훤과 신검(드라마 태조 왕건中)
견훤에게는 10여명의 자식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넷째인 금강을 특히 사랑하여..
70을 바라보는 늙은 자신은 물러나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했는데,
이를 눈치챈 첫째 아들 신검과 양검, 용검형제 그리고 이들을 부추긴 이찬 능환의
역모로 금강은 죽음을 당하고 견훤은 폐위된 후..김제 금산사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어.
아끼던 아들을 잃고 아들들과 신하에게 배신당해 나라와 왕위까지 잃은 말년의 견훤은
이보다 더 불행할 수 없었을거야.
아들아, 그런데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견훤의 이 급격한 몰락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요인은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역시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견훤 그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 같아.
김제 모악산 금산사
견훤은 아마도 스스로 능력도 출중해,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후백제란 나라를 일구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둣 하니 후삼국 통일이 가까이 있는 듯 느꼈겠지.
이렇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보면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종종 오만과 독선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견훤이 그랬던 것 같아.
초심을 잃고 사람이 변했지. 오만함과 독선이 화근이었어.
강력한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면..당장은 고개를 숙여도, 진심으로 복종하진 않아.
전국의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그들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때에
견훤은 융통성없이 호족들을 힘으로 억누르기만 했으니..
그 호족들의 행보는 어떻게 갈까.
결국 그들은 견훤이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에게로 가게 되지.
오죽했으면 아버지인 아자개를 포용하지 못했고, 아들들에게 버림받고..
또 오래도록 그를 섬겨온 매곡성주 공직이 그에게서 돌아섰을까.
견훤은 지나치게 강하고, 융통성없이 누르기만 하며 포용하지 않았지.
견훤의 서라벌 습격에서 보듯이..
세상에 그의 잔혹함만 부각되어 민심만 잃고..또 정치적인 명분도 잃었으니,
결국은 그의 친구를 잃고 사방에 적만 만든 꼴이라 견훤의 실패와 몰락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아빠는 생각해.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보다 더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견훤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몰락의 길로 갔다고 보고 있는 것이지.
그럼..아들아, 견훤의 다음 이야기를 해볼까.
김제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3개월 후..극적으로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하였지.
고려 태조 왕건은 평생동안 맞서 싸운 적수였던 견훤을 맞아 상부(尙父)라
칭하며 예로서 대우했다.
양주를 식읍으로 삼게 하고, 저택과 전답, 노비 등을 내려 불편없도록 살폈고,
지위는 백관의 위에 두었지.
평생의 적수도 이렇게 포용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태조 왕건이란 사람의
그릇의 크기가 이정도였단다. 이 두사람의 그릇 크기가 승패를 가른 셈이지.
그러는 사이..935년 신라의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나라를 들어 바쳤고,
936년 견훤은 태조 왕건에게 가서 군사를 내어 난신적자와 그를 내친 아들,
신검을 칠 것을 요청하였어.
태조 왕건은 태자 무(王武, 후일의 혜종)와 대광 박술희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천안부로 먼저 나아가게 하고, 대군을 친히 이끌고 10만의 병력으로 출전하여
고려와 후백제는 선산 일리천(구미 선산읍 낙동강 지류)에서 대치하게 되었어.
고려와 맞선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도 고려군과 비교해 규모로는 전혀 뒤지지
않았지만..문제는 군사의 사기였지.
게다가 신검이 후백제의 왕이었지만 그의 집권도 명분이 없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태상왕 견훤이 직접 응징하려 나섰고, 그것을 본 군사들..당연히 흔들렸지.
그렇게 시작된 일리천 전투를 일방적인 고려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그것으로 후백제는 나라의 문을 닫게 되었지.
견훤 스스로 후백제를 세우고 또 스스로 그 문을 닫게 했으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이야기도 또 없을거야.
후백제를 멸하고 관련자들의 죄를 논하며 이찬 능환 등은 반역의 죄를 물어
참하고, 양검과 용검 형제는 유배를 보냈다가 곧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관등을 내렸다고 했지만..이것이 역사 속 마지막 모습이라,
아마도 신검도 곧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스스로 세운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린 견훤은 마음 속
울화가 치밀어 등창이 터져 황산의 절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지.
견훤이 죽음에 임하여 후백제가 그립다고..완산을 보게 묻어 달라했다고 해.
아마 그래서 아들아, 우리가 같이 갔던 논산 연무의 언덕에 그의 무덤이 있나봐.
그곳에 서면 옛 완산주 모악산이 보인다고 하니까.
삼국사기 권50, 열전 제10은..궁예와 견훤의 이야기를 싣고 있지.
김부식은 이들을 역신으로서 사론에서 역신, 어질지 못하고,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자로서..태조 왕건에 비할 바 안되는 인물로 평하고 있다.
역사 속 패자라고 해서..이토록 매도되어야만 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아빠가 충분히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을 영웅이라 한 것은..
이들이 난세에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그 나름 열정을 가지고 뜨겁게 살았던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지.
그 초심을 끝까지 지켜가지 못했기에 그들은 미완의 영웅으로 그친 것임을
그게 이들을 실패로 이끌었음은 아빠가 여러번 말한바 있다,
아들아, 너는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보며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궁예, 태조 왕건, 견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기는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 얼마나 스스로를 절제하고, 또 배우며 성장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가능한 사람을 일러...유가에서는 군자(君子)라 한다.
군자가 되고서야..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가 되는 것이다.
----- 장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