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학자들이 ‘문헌 등을 통해 분석한 상나라 사회체제’를 논함을 정리해 보자.
상나라의 신분체제는, 갑골문에 나타나는 ‘전甸)’, ‘백伯’, ‘후侯’, ‘자子’, ‘남男’ 등의 명칭으로 보아, 이들에게 조근朝勤과 공납貢納의 의무가 있었던, 초기 봉건제 신분사회임으로 파악되며, 대체로 지배층, 평민, 노예로 구성되었다. 지배층은 정치적 지배자이자 종교적 수장인 왕을 중심으로 한, 왕실귀족이나 지방의 씨족장들이며, 왕이나 왕비의 선출도 불규칙할지라도 지배층에서 교대로 선출되었으며, 이들은 성姓을 가질 수 있으므로 지배층을 총칭하여 백성百姓이라 불렀으며, 갑골에 관직명이 다수 발견됨을 보아 초기 관료체제와 출정出征과 제사 참여를 갑골을 통해 유추할 수 있으며, 최고신인 상제上帝를 숭배하고, 많은 자연신과의 교류라는 복골점을 공유하는 신정적인 읍제국가에 기반한 봉건제 사회였음을,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순장자를 추정함에 알 수 있으며, 지배층은 막강한 지배력과 부副를 보유하고 있었다. 평민은 국가에 대한 공물과 요역의 의무가 있는, 대개 농민으로서 왕의 소유인 토지(王土思想)를 씨족공동체에 의한 집단 경작방식으로 수수, 고량, 기장, 피, 맥, 조, 벼 등을 경작했으며,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자안패子安貝나 주석 등이 화폐기능을 함에 따라 대내외적인 상업이 발달하였고, 오늘날 상인商人의 유래를 상나라가 망한 후에 상나라 사람들이 중원을 떠돌며 장사를 함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노예는 전쟁이나 약탈을 통해 충당되었으며, 주로 순장이나 제사의 희생물로 사용되었다.
국가조직은, 신석기시대의 취락에서 발달한 것으로 보이는, 혈족집단을 핵으로 하는 거주지, 경작지나 산림지역을 포함한 지역적인 영역을 의미하는, 주민과 주민의 생활기반인 토지 전체를 일컫는 용어인 ‘족읍族邑’을 기반으로 한, 족族 사이의 연합, 협력 관계가 형성되어, 족읍의 연합에 의해 국가가 형성되면, 지배씨족의 거주지인 ‘대읍大邑’이 생성되고, ‘속읍(소읍)’이 누층적으로 맺어진 지배 예비세력인 ‘족읍族邑’이 잔존하고, 그 외에, ‘별읍別邑’과 ‘원야原野(또는 야野)’가 있는데, 이를 두고 ~‘이만융적夷蠻戎狄’에 속하는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생각되며, 읍인과 야인의 차이는 씨족제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배씨족과 관계를 맺고는 있으나, 이념을 달리하거나, 편입하기에 곤란한 문제가 있는 족속의 마을’로 봄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처럼, ‘대읍-족읍-속읍’의 지배세력권과 ‘별읍-야’의 잔존세력이 누층적으로 맺어진, 신정국가적인 성격의 ‘읍제’국가라 파악하며, 갑골문에, ‘대읍상大邑商’, ‘천읍상天邑商’으로 ‘읍邑’이 나타나는데, 상의 수도를 지칭 한다고 파악한다.
각 읍은, 지역적 특성에 따라 도로, 하천, 구릉 등에 의지하여, 족읍族邑의 토지경계임을 알리는 표식으로, 요소마다 흙을 쌓았는데, 읍의 바깥을 표시하는 흙 쌓기를 ‘봉封’이라 하는데, 봉封으로 각 읍의 경계를 세우는 작업에서 파생된 단어가 ‘봉건封建’으로, 중세의 봉건제도의 속뜻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지배씨족인 상나라 왕조에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나 독립적인 자치로 상왕조의 통치권 밖에 있는 단일, 규합 씨족세력이나 부족을, 갑골문에는 ‘방方’이라 하는데, 상을 멸망시킨 주나라의 주족周族을 주방周方으로 표기했듯, 강방姜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등으로 씨족이나 부족의 명칭(성姓,이름)은 토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강방姜方은 상商나라 서쪽의 양을 치던 강대한 족속인데, 토템인 양의 뿔을 머리에 쓰고 다녔듯이, 토템의 모습을 가면으로 썼던 종족들도 많았다 하듯이, 토템신앙은 상나라 당시의 고대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갑골문에 말을 토템으로 하는 마방馬方,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호방虎方, 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녹방鹿方, 양을 토템으로 하는 양羊方, 숲을 토템으로 하는 임방林方 등, 동식물을 토템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은 상 왕조와 관련된 부족들일 것으로 파악한다. 갑골에는 기夔, 계契, 계季, 호조정虎祖丁, 호갑虎甲, 강갑姜甲 등의 왕명王名도 보인다.
이처럼, 상나라는 ‘대읍-족읍-속읍’의 지배세력권과 ‘별읍-야’의 잔존세력과 ‘방’으로 구별되는 외부세력이라는 사회구조에서, 전쟁을 통한 정벌과 복속의 순환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마지막 31대 주왕紂王이, 달기라는 무희에게 빠져, 잔혹한 폭정을 하다, 당시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은 왕조의 제후국諸侯國인 ‘서주西周’의 무왕武王에 의해 기원전 1046년 멸망한 것으로 ‘하상주단대공정’은 파악한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의, 무왕에서 서주의 마지막 왕인 유왕까지 257년이라는 기록을 참조하면, 유왕의 죽음은 기원전 771년이니, 상나라의 멸망은 기원전 1027년으로 보기도하고, ‘한서漢書’에는 주周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기원전 1123년이라고도 하며, 기원전 1127년, 기원전 1018년 등으로 보기도 한다.
민간신앙은, 하夏나라에서 비롯되었든지, 부사년(1896~1950)의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중원으로 내려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다시 동북으로 갔다~는 주장처럼, 요하에서 비롯된 신앙관이 중원으로 내려와 퍼졌던 간에, 하夏, 상商, 주周시대의 민간신앙은, ~은(상)나라 사람들은, 산천풍우山川風雨의 모든 자연물에 귀신이 있다고 믿었고, 자연의 신비한 모든 현상을 주재하는 상제上帝가 계셔, 우주를 주재하고 화복을 내려 주시며, 인간의 운명마저도 절대적으로 지배하시니, 제사를 올려 제반사를 해결해 주시길 기도하고, 마음의 위안을 삼으며, 점복을 통해 신의神意를 알아내어, 제반사를 결정했다~는, 만물숭배의 다신多神신앙과 귀신이 있다고 믿어, 죽은 조상들은, 비록 죽었다고 하더라도 혼백은 산 사람의 주위에 맴돌고 있으며, 죽었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감정과 의지가 있다 믿었고, 죽은 조상들인 귀신의 능력은 상제上帝에게 산 인간들의 생사 길흉화복을 내려 줄 수 있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융숭한 제사를 통해 당면한 문제 해결을 기원하고, 위안을 삼고, 만사萬事를 점을 쳐서 결정함이 당시의 신앙으로, 귀신과 사람사이를 소통하는 무축巫祝이 생성되니, 무축巫祝에 대한 외경심이 대단하였고, 지식인으로서 지도자로서의 위치가 확고했던 시대이다.
이를 두고 공자는 ‘예기禮記’에 ~은나라 사람은 신을 높이고, 백성을 거느려 신을 섬기며, 귀신을 먼저 하고 예를 나중에 하며, 벌을 먼저하고 상을 뒤로하며, 높이며 친하지 않으니 그 백성의 폐가 깊다. 안정하여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이기려 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어찌 인간의 제반사를 실체도 없는 귀신의 판단에 따를 수 있는지 답답하기 그지없는 시대’였다는, 공자식의 상나라 신앙을 비판함인데, 이어서 말하길, ~주나라 사람은 예를 높이고 은혜를 베품을 숭상하며, 귀신을 섬기며 신을 공경하여 멀리한다.~하여, 이어진 주나라의 신앙관을 두고는, ‘귀신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노력 즉 덕德의 실천에 의한 천명이 중요하다’는 관념으로 긍정적인 입장을 피력함을 볼 수 있듯이, 하夏, 상商, 주周의 시대적 발전에 따른 신앙관의 변천을 짐작케 한다.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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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주산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날벼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