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기도성월을 마무리 하는 마지막 날, 휴가 나온 수녀님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기로 하고 의정부교구 관할 남종삼 성인과 황사영 순교자의 묘가 있는 성지를 가기로 했다.
길음동 성당 울대리 묘지 정문에서 표지석을 따라 언덕길을 10분쯤 걸어 올라가니 성인과
함께 그의 부친과 장자인 아들의 묘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성인은 장성한 후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 이후에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철종 임금때 승지를 지내며 왕가의 자손을 가르치는 청백리로 겸손과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질시와 시기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문제로 신앙과 관직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는데 그는 관리직을 내놓으며 신앙을 지켰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며 좌승지로 발탁되었고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정국이 어지러울 때 성인은 대원군에게‘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을 건의했다.
그것은 프랑스 주교님들을 통해 한불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물리치자는 것으로 처음에는 대원군도 이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베르뇌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중이어서 약속시간에 찾아내지 못하자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두 주교님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일이 그르친 것을 안 성인은 신앙에 전념키 위해 묘재로 내려간 아버지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병인박해와 더불어 대원군의 아버지 묘가 파헤쳐지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발생하고, 남종삼 성인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다블뤼 주교님과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당하였다.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병인박해 때 부친 남상교는 붙잡혀 공주로, 장자 남규희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소사와 차남 명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한 셈이다.
성인의 묘가 있는 아래쪽에도 세례명이 있는 남씨 성을 가진 묘가 몇 구 더 있었는데 관리인에게 물으니 모두 친척 분들이라고 말해준다.
신앙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이야기를 수녀님과 나누며 내려와서 가져간 간식을 의자에 앉아 먹으려는데 고양이가 자꾸 우리 곁을 맴돈다. 할 수 없이 차 안에 들어와 요기를 한 후 황사영 순교자가 묻힌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15분쯤을 달려가니 네비게이션 아가씨가 목적지라고 알리는데 아뿔싸 무슨 모텔이 있는 곳에서 멈춘다. 아니 우리가 모텔을 들어갈 일도 없는데라고 농담은 하였지만 순간 당황하였다.
황사영묘 30M→ 라고 씌여진 팻말이 있긴 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어 음식점 앞에 차를 세우고 그 곳에 있던 사람에게 장소를 물으니 건물 옆쪽으로 가면 된다고 한다. 길 아닌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순교자의 묘 앞에 어느 자매 둘이 자리를 펴고 앉아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다.
아, 순교자께서는 외롭지 않으시구나! 후손들이 이렇게 당신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황사영 순교자는 정조 임금 때 16세의 어린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임금이 친히 그의 손을 어루만져 격려하여, 당시 풍속에 따라 왕이 만진 손을 명주(토시)로 감아 죽을 때까지 감고 다녔다고 한다.
제주도 순례길을 걸을 때 우리들의 건강을 책임(?)졌던 삼삼이 원장님이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마리아 성지에 갔을 때 그 이야기를 아주 열심히 설명해 주던 모습이 생각났다.
황사영의 백서는 천주교신자라면 한번쯤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교회사에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지만 이것으로 인해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은 온전할 리가 없었다.
또 가까운 집안사람들도 모두 유배를 당한 터라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는데 다행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한 이들 덕택에 순교자의 유해가 전해질 수 있었지만 그의 집안에서조차 잊혀져 왔었다.
1980년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고, 이를 발굴하여보니 그 안에서 석제 십자가와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찾게 되었다.
시신을 옮긴 후손들이 토시를 합 속에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180여 년간 땅 속에 묻혀있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되었으나 까맣게 응고된 형태로 남아 원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9세기 초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버 성인의 묘를 페라요 수도자가 별들의 인도로 찾았듯이, 임금이 어루만진 손에 감고 다녔던 토시가 훗날 황사영 순교자의 묘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은 어쩌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돌보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순교자가 묻혀 있는 곳은 의정부교구에서 관리하고는 있으나 건물에 가려 찾기도 어려운 곳에 안내문조차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쓴 ‘백서’는 1894년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어 뮈텔주교에게 보내졌고, 주교님은 이것을 1925년 한국순교자 79위 시복식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하여 현재는 바티칸 박물관내 선교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다.
또한 교회 내에서 황사영의 세례명이 알렉산델로 알려져 왔으나 1990년대 말 여러 사료들을 연구한 결과 ‘알렉시오’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황사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사학징의(邪學懲義)”는 그의 세례명을 ‘알렉시오(亞肋叔)’로 표기하고 있고, 김대건 신부님이 1845년 작성한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에도 ‘Alexis’ 또는 ‘Alexius’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황사영의 세례명이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 ‘알렉산델’로 잘못 적힌 것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대로 표기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한다.
남종삼 성인과 가족의 봉분에 나 있는 풀을 뽑으며 성인의 신앙을 닮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똑같은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하루빨리 순교자의 묘가 묻힌 곳이 제대로된 길과 주변이 정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좁은 밭길을 걸어 나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날씨는 참 청명하고 좋다.
(참고 :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첫댓글 옛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혼자만이 아니고 가족과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는줄 알고도 신앙을 지키셨슴을 볼때 그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매님 성지 순례를 하시고 이렇게 성지소개를 상세하게 올려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신앙의 순교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거나 그 장소를 가면 마음이 경건해지며 그분들의 신앙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를 바치지만 순간순간 잊고 살때가 너무 많은것 같아요. 아는 것보다는 실천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몇일동안 연수를 다녀와서 그리웠던 이곳을 방문하고 보니 함께 성지를 다녀온듯 느껴집니다. 숙연해지는 마음. 선조들의 신앙앞에 새삼 부끄러움을 느껴보며 다시 작은 결심 하나 품어보는 아음다운 밤입니다. 꼼꼼하고 생생하게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성심의 사랑안에서 행복하세요. ^^*
연수... 저도 직장생활을 오래했는데 연수를 가면 참 좋은데 마지막에 꼭 시험을 치니 언제나 느긋한 마음이 아닌채로 연수를 마무리 지었던것 같아요. 테스트만 하지 않으면 여유있게 쉴(?)수도 있었을텐테요. 다 지나간 추억이네요.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그런데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황사영 순교자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 현재 2차 시복추진 133위에 포함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어쩌나요... 학교다닐때 심리학시간에 들었던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려하고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는 '확증편향'이 꼭 저에게서도 볼수 있네요. 저는 황사영순교자가 성인이라고 늘 생각을 하고 있었던것 같아요. 이 글을 쓰면서 현재추진중인 시복시성명단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찾지를 못했고. 가톨릭사이트에 있는 성지를 찾아 읽었는데도 그냥 지나쳤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성인은 순교자로 모두 바꾸어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
죄송하다니요..저는 제가 오히려 주제 넘은 참견을 한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답니다..그런데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아, 그러셨군요. 사실은 저도 처음엔 깜짝놀라고 가슴이 쿵했어요. 그리고 감사했어요.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것을 알게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이야기 안해주셨으면 이 글을 읽는 다른분들도 잘못알게 되는거잖아요. 혹시 다음에 또 이런일이 있으면 안되지만 ㅠㅠ 그때도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