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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 성지 - 도시 속 외롭게 지킨 200년 신앙의 자취 |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 그 마을 빌딩 숲속에 외로운 섬처럼 남은 구산성지의 주소는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10(미사강변북로 99). 88올림픽 이후 많이 들어본 미사리 조정경기장 부근에 있다.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생가 마을
구산 마을은 일찍이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모방 신부가 설립한 구산 공소를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어 왔으며 특히 박해시대에는 순교자 성 김성우 안토니오를 비롯해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순교자의 후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대대로 살아오며 순교자 가족들의 묘소를 유지 관리하고 보존하여 옴으로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성지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특히 구산 성당은 1836년 공소로 시작해 본당으로 승격한 성당으로 1956년 순교 성인 김성우 생가 터에 마을 40여 가구 주민이 한강변에서 돌을 날라 지은 성당이다. 그러나 개발 시대의 국가발전의 전략은 이러한 전통 성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2009년 시작된 ‘미사 보금자리’ 재개발 사업에 구산 성지가 들어간 것이다. 이에 지역 교우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구산 성당의 역사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지의 존치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 결과 구산 성지는 존치하되 성당은 원형을 유지하여 약 220m 지점으로 옮기기로 했다. 사용된 공법은 성당 건축물 바닥(약 120㎡)을 기초부터 일정 높이로 들어 올린 뒤 진동 완충 장치가 있는 장비로 끌어다 옮기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 콘크리트 건축물을 하루에 10m 정도씩 끌어다 옮기는 이전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성당의 원형을 유지하게 되어 180년 성당의 전통을 지키게 되었다. 성지 관리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하지만 존치된 구산 성지는 주변의 도시화로 인해 사방이 고층 아파트로 포위된 형국이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 - “죽어도 천주교인, 살아도 천주교인이오”
성 김성우 안토니오(金星禹, 1795-1841)의 본 이름은 우집(禹集)이고, 자는 치윤(治允)이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첫째 아우 만집(萬集)와 둘째 아우인 문집(文集)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 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833년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1월경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生死間 天主敎人)”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국 그는 이듬해 4월 29일 47세의 나이로 포도청에서 순교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도심 속의 외로운 섬
구산 성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4시 반이 다 되었다. 성지는 3면이 얇은 기기왓장을 짜맞춘 듯한 옹벽이 감옥처럼 둘러싸였는데 오직 정면에만 육중한 아치형 문이 떡 버티고 서서 들어오려면 들어오라고 한다.
문을 들어가니 가운데는 잔디 광장이 펼쳐지고 왼쪽에는 성모상과 관리실 건물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순교자들을 소개한 9개 배너들이 줄이어 있는 길이인데 이는 성지 성당과 순교자 묘로 가는 길이다.
이로 볼 때 구산 상지는 3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모 동산 부근, 둘째 잔디광장 부근, 셋째 순교자 묘역과 성지 성당 부근이다.
성모 동산 부근
먼저 예수님을 안은 성모자상이 나타난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성모상은 성모님께 특별한 신심을 가졌던 구산성지 초대 주임 고 길홍균 이냐시오 신부(재임기간 1979-1984)가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길 신부는 당시 서울대 미술대학장인 고 김세중 프란치스코에게 작품을 의뢰하였고 김 화백은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이 성모상을 제작하였다. 왕관을 쓰고 오른손에 지휘봉(왕홀)을 들고 계시는 이 성모상은 가정과 인류평화를 전구하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로서 구산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성모상이다.
성모상 옆에는 투명한 유리로 된 8각형 기도하는 방이 있다. 방안은 색색이 아름다운 촛불을 밝히고 있고 한 유리면에는 “성모님 저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저의 마음을 이 초에 담아 바칩니다. 저와 저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씌어있다. 그리고 옆면에는 장미 꽃다발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성모자상 옆에는 십자가가 새겨진 연자맷돌이 있고 그 앞에 12개의 돌기둥이 연자맷돌을 향해 서 있다. 그리고 각각의 돌기둥 머리에는 아름다운 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치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고 있는 형상이다.
이들 촛불 유리방과 돌기둥 앞에 묵주기도의 길이라고 새겨진 나무기둥이 길게 서 있다. 여기 성모상에서 묵주기도의 길이 사작된다는 뜻이다. 토기 항아리 끝에 푸른색 묵주알 열 개마다 한 개의 흰색 묵주알이 얹혀 길마다 즐비하게 서 있다.
성모동산 더 왼쪽 끝에는 관리사 건물과 수원교회사 연구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거기 가는 길 한 쪽에는 요셉상이 서 있는데 목수로서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한 손에는 곱자(曲尺)를 들고 있다. 반대편 길가에는 성물방이 있다. 성물방 건물은 수많은 묵주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에 들어가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인판매로 운영한다는 안내문이 벽에 붙어 있다.
수원교회사 연구소가 어디서 들어본 듯하여 생각해보니 ‘마산교구 순교자의 딸 유섬이묘’에 갔을 때 선대 문집에서 순교자 유항검의 딸 유섬이의 존재를 밝힌 하성래 박사가 수원 교회사 연구소의 고문이었다고 읽은 기억이 난다.
중앙 잔디 광장 주변
도심 속에 멋진 소나무로 둘러싸인 가운데 야외 미사드릴 수 있는 널찍한 잔디 광장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입구에는 아치 덩굴 문이 있고 좌우에 배너가 있는데 왼쪽에는 김성우 성인의 사진과 그 아래 “生死間 天主敎人”(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겠소)라는 성인의 말씀이 있고 오른쪽은 은총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잔디 광장 뒤편으로는 옛날 마을을 지키는 솟대처럼 긴 장대 기둥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데 장대 끝에는 모두 십자가가 있다. 마치 오밸리스크를 연상하게 한다.
잔디 광장 주변에는 두 개의 돌담 집이 있고 뒤편에는 만남의 집이 있다. 돌담집이라기 보다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기도처라 할까? 첫째는 성모님을 모시는 곳이고 라는 하나는 김성우 성인을 모시는 곳이다. 묵주의 길도 여기에서 끝이 난다.
잔디 광장 뒤편에는 조립식 건물 만남의 집이 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양을 안은 예수님 상이 있음에도 쇠락된 모습으로 있어 보기가 좋지 않다. 그러나 그 앞으로 원두막 같은 시설은 많이 사용되는 것 같아 성모상 대하기도 좋다.
부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특별희년(2015.12.8.-2016.11.20.)을 선포하실 때에 구산 성지가 전대사 성지로 지정 되었음울 기념하는 자비의 문이 아직 서 있다.
부근에는 옛날의 옹기가마가 재현되었는데 이곳이 옛날 옹기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면 성지에서 사용하는 조각품를 생산하기 위한 시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옹기가마 옆에는 신앙선조 영성마을 비석이 있다. 앞으로 이 성지를 영성마을로 가꾸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 같다.
묘역으로 가기 전 마지막은 십자가의 길이다. 청동으로 제작한 것 같이 무게 있는 모습이다.
성지 성당 및 순교자 묘역
성지 입구에서 성지 성당과 순교자 묘역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넓다. 길을 따라 김성우 성인을 비롯한 이 묘역에 잠든 9분의 생애와 순교사적을 소개한 9개의 배너가 각기 다른 독특한 십자가를 넣어 한자가 아닌 영문표기와 함께 게시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안당문(安堂門(안당은 안토니오)이라는 문이 있고 커다란 돌 위에 예수성심상이 환영하고 계신다. 문을 들어서면 먼저 구산 출신 순교자 묘역이 나타난다. 묘역 가운데에 커다란 김성우 순교현양비가 자리하고 그 뒤로 9위의 진묘 또는 의묘가 모셔져 있다.
여기에 모셔진 순교자는 다음과 같다.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 전교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841년 옥중에서 순교. 1984년 성인위에 오름
▲김만집(金萬集, 덕심) 아우구스티노(1798-1841) - 김성우의 첫째 동생. 1841년 감 옥에서 고문 받아 순교. 하느님의 종.
▲김문집(金文集, 윤심) 베드로 - 김성우의 둘째 동생, 1868년 아들과 함께 순교
▲김성희(金聖凞) 암브로시오 - 김성우의 외아들 1868년 3월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
▲김차희(金次凞) - 김만집의 둘째 아들. 김성희와 동시 순교
▲김경희(金敬凞) - 김문집의 아들. 김성희와 동시 순교
▲김윤희(金允凞) - 김성우의 사촌 김주희의 아들 김성희와 동시 순교
▲최지현 휘두 - 이웃 주민 1867년 포도청에서 순교
▲심칠여(沈七汝) 아우수스티노 - 김성우 집안의 머습
그리고 순교자 묘역의 대나무 자리(竹席) 무늬의 담장 둘레에는 구산 성지만의 독특한 십자가의 길 15처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구산 성지 신부가 예수님의 생애를 닮으려 순교자의 삶을 묵상하고 구상한 것을 수원교구 심순화(카타리나) 작가에게 의뢰하여 그린 성화를 돌에 새긴 것으로 성지를 순례하는 모든 분들이 순교자들처럼 주님께로만 향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성지 성당
구 구산 성당은 여기서 옮겨가고 성지에는 새로 지은 성당이 있다. 나지막한 건물인데 중앙 아치문에는 모방 신부의 부조가 있고 벽면에 다양한 창살이 나 있다. 건물이나 구조물이 모두 기왓장을 기본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이나, 곳곳에 안토니오 대신 안당(安堂)이라는 명호를 쓰여 있는 걸만 봐도 전통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다. 한편 그러면서도 안내문이나 사람 이름에 영문표기를 섞어 쓰는 등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 또한 없지 않았다. 성전 내부는 천장이나 바닥이 대부분 목조로 이루어져 있다.
밖에 나오니 특이한 종각을 볼 수 있다.
벌써 오후 5시. 쫓기듯이 마재 성가정 성지로 향했다. 한강을 건너 약 20분을 달려 마재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