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8. 호탄의 玉과 불교
‘80화엄’ 전파한 호탄불교…흔적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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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과거 불법이 흥성했던 호탄국의 도성, 맬리카왓유적지. 지금은 아무런 불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서역남로 중심부에 위치한 호탄국은 실크로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지닌 곳으로 주목받았다. 물론 지금의 호탄과 과거의 호탄 지역은 다르다. 고대 호탄국 영역에는소륵·낙포·흑옥·피산(구마) 등 7개 현(縣)이 포함됐다면, 백옥강(위룽카스강)과 흑옥강(카라카스강) 사이에 위치한 현대의 호탄은 동서 35km·남북 20km 규모. 과거보다 영역이 축소됐다.
바로 이 호탄에 대해, 이탈리아 베니스 태생의 세계적 여행가 마르코 폴로(1254~1324. 1260~1295년 동방여행)는 그의 저서〈동방견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탄 주민들은 모두 마호메트를 신봉한다. 많은 도시와 마을이 있으며, 그 중 가장 훌륭한 도시이자 그 나라의 수도를 호탄이라 부르는데, 그것이 그 지방의 이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풍부하고 면화가 많이 자란다. 포도밭과 울타리와 정원이 많고, 주민들은 교역과 수공업으로 생활하지만 전사들은 아니다.”
13세기 호탄을 지나갔던 마르코 폴로의 기록처럼 호탄은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것이 풍부한 도시다. 그렇지만 “백옥과 흑옥이 많이 난다”는 〈대당서역기〉 기록대로 호탄을 대표하는 산물은 옥(玉)이다. 중국 고대문헌에 의하면 옥은 “달빛이 정화해 만든 결정체”다. 그래서 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간주됐고, 금보다 값이 비싸다. 중국 황제의 옥새도 금이 아닌 옥으로 만들었다. 옥은 또한 정직·예의·충직·신뢰의 대명사로 간주됐다.
때문에 고래로 중국인들은 옥을 특히 귀하게 여겼다. 옥과 관련된 문자가 500여종에 이른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순수한 마음에 대한 비유로 ‘옥심’(玉心),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묘사하는 ‘옥용’(玉容), 황제의 말을 지칭하는 ‘옥음’(玉音) 같은 합성어들도 수없이 많다. 중국 황제가 전쟁을 외교로 풀려고 할 때면 ‘칼과 창 대신 옥과 비단’이라는 수단을 동원했다. 이처럼 중국 문화권에서는 옥을 중시했다.
기원전 76년경 호탄에 불교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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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쿤륜산맥의 빙하가 녹아 흐르는 백옥강. 아직도 강가에서 옥을 줍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
그런데 중국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세상의 중심이자, 전설적인 황제가 거주한다고 여겼던 쿤륜(崑崙)산맥에서 옥이 전래됐다고 믿었다. 17세기까지 사람들은 오로지 호탄에서 생산되는 옥밖에 몰랐다. 중국에서 그냥 옥이라고 하면 엄밀하게 말해 ‘호탄의 연옥(軟玉)’이었다. 미얀마에서 경옥(硬玉)이 수입된 이후에야 다른 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연옥은 경옥보다 부드러워 가공하기 훨씬 좋았다.
옥이 쿤륜산맥에서 나오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쿤륜산맥의 빙하가 녹아 흐른 물로 백옥강이 범람하는 것도 9월이면 잦아드는데, 호탄 사람들은 이때쯤 되면 옥 조각을 줍기 위해 강으로 올라간다. 대개 예닐곱 명이 한 조가 돼 일렬로 죽 늘어선 채, 손을 잡고 천천히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올라가며 맨발로 강바닥을 더듬어 옥 자갈을 찾는다. 옥 자갈은 일반 돌 보다 표면이 훨씬 매끄럽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물론 진짜 큰 조각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도 지난해 9월16일 백옥강에 가 보았다. 강바닥이 드러난 백옥강 여기저기서 옥을 줍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주은 옥을 팔기 위해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려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도 옥 못지않게 호탄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티베트 불전(佛典)과 〈대당서역기〉 등에 따르면 호탄국은 기원전 3세기경 건국됐다. 건립된 호탄국은 전한 무제(기원전 142·기원전 87) 당시 서역남로의 오아시스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기원후 3세기경 호탄은 세력을 더욱 확장, 융노국·우미국·거륵국·피산국(구마) 등을 예속시키고, 선선(누란국)·소륵(카슈가르)·쿠차·언기와 더불어 타림분지의 5대국에 포함될 정도였다. 세력이 가장 성했던 북위시대 호탄의 영역은 동쪽의 니야에서 서쪽의 야르칸드에 이르기까지 사방 4,000리에 달했다. 13세기말 무슬림의 침입으로 파괴되기 전까지 호탄은 가장 중요한 서역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러면 이곳에 언제쯤 불교가 전래됐을까. 티베트본 〈우전국사〉(호탄의 고대 이름이 우전)엔 “우전왕 구살단나가 19세 때 건국하였고, 그 때는 불멸 후 234년이 지난 때였다. 건국 후 165년에 국왕 위지승이 즉위했고, 치세 5년에 부처님 가르침이 흥성했다”고 적혀있다. 따라서 기원전 76년경 호탄에 이미 불교가 전래됐음을 알 수 있다. 기원후 3세기경 호탄불교는 성(盛)의 극(極)을 구가하고 있었다. 위(魏) 감로 5년(260) 호탄에 간 주사행(朱士行)스님에 의해 “소승 중심의 호탄불교가 점차 대승불교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출삼장기집〉에 전한다.
이후 호탄지역은 중국에 대승경전들을 전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5세기 초 법정(法淨)스님과 지법령(支法領)스님 등이 호탄에서 범본(梵本) 〈화엄경〉을 구해 중국으로 갖고 갔다. 이것을 토대로 동진의 불타발타라스님(북인도 출신. 359~429)이 역경(418~420), 34품 60권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60권본 〈화엄경〉. 60권본 〈화엄경〉은 흔히 진본(晋本)·구역(舊譯)·60화엄 등으로 불린다. 호탄의 실차난다스님이 698년 보리류지·의정스님과 함께 범본 〈화엄경〉을 39품 80권으로 역경·편집한 것이 80권본 〈화엄경〉이다. 당본(唐本)·신역(新譯)·80화엄 등으로 불려지는 80권본 〈화엄경〉은 역출(譯出)된지 2년 뒤인 700년경 곧바로 우리나라에 수용됐다. 때문에 〈화엄경〉(강원의 대교과정에 배움)을 중시하는 한국불교는 호탄불교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발전을 구가하던 ‘호탄불교의 성세’(盛勢)는 401년경 이곳을 방문한 법현스님의 〈불국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우전국은 토지가 기름져 사람들 생활이 윤택하고, 모두 불법을 받들고 불교가 생활화돼 있다. 스님은 수만이나 되며, 대부분 대승(大乘)을 배우고 있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문 앞에 작은 탑을 세워놓았는데, 제일 작은 것의 높이는 약 2장 가량 된다. 승방(僧房)을 지어놓고 스님들에게 제공하며, 이외 필요한 물자들도 마련해 준다.”
맬리카왓 불교유적지 진흙더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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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과거 라왁사원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벽화흔적 |
519년경 호탄에 당도한 송운(중국 북위시대 관리)과 혜생스님 역시 〈송운행기〉에 호탄 불교의 전래과정을 담아놓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본래 우전왕은 불법(佛法)을 믿지 않았다. 어떤 오랑캐 상인이 비로전이란 스님을 성 남쪽 살구나무 아래 데려다 놓고 왕에게 죄를 아뢰며 말했다. ‘지금 다른 나라의 스님을 성 남쪽 살구나무 아래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화를 내며 즉시 가서 비로전을 보았다.
비로전스님이 왕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나를 보낸 까닭은 왕에게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탑 하나를 만들게 해 왕업을 영원하게 하시려 한 것입니다.’ ‘나를 부처와 만나게 해주면 당장 명령대로 하겠다.’ 비로전이 종을 울려 부처님께 고하자마자 라후라(부처님 아들)를 보내 형체를 바꾸어 부처님으로 변신했다. 왕이 오체를 땅에 던져 절하고는 즉시 살구나무 아래 사찰을 짓고, 라후라 상을 모셨다.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탑 그림자가 항상 건물 밖으로 나와 그것을 보는 자들은 회향(回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안에는 벽지불의 신발이 있는데 당시까지도 썩지 않았다. 가죽도 아니고, 비단도 아닌데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네가(송운) 살펴보니 우전국의 경계는 동서로 3,000여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 호탄 어디에도 살아있는 불교는 없다. 라왁사원지(1901년 오렐 스타인이 조사)와 단단윌릭유적지(1896년 스벤 헤딘 발굴. 1900~1901 오렐 스타인 발굴) 등 유적은 많아도, 생생한 불교는 찾아볼 수 없다. 이슬람의 동점(東漸)이후 불교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호탄 불교의 영광을 찾기 위해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지난해 9월16일 라왁사원지와 호탄박물관을 둘러본 뒤, 맬리카왓(Malikawat) 유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유적으로 보이는 진흙 퇴적층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위구르인 안내인 알리(Ally)씨가 “이곳이 과거 호탄국의 도성이고 사찰들도 많았다”고 설명했지만, 어디에서도 사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생긴 먼지들이 시야만 가득 메울 뿐이었다. 먼지를 마시며 알리씨에게 “당신은 불교를 믿느냐”고 물었다. “천년 전 우리 선조들은 불교를 믿었지만 지금 호탄에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믿기는 고사하고, 사람들은 불교 자체를 잘 모른다”고 덧붙였다. 숨 막히게 했던 맬리카왓 유적지의 먼지처럼, 그의 대답은 지금도 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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