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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다시읽기/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겨레신문 이정우 기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사유가 완숙기에 달했던 1880년대 전반에 씌어진 걸작이다. ‘철학적 오페라’(들뢰즈)로서의 이 책에서 우리는 깊은 병을 ‘실험’함으로써 위대한 건강을 찾아낸 한 천재의 고뇌와 환희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니체의 이 저작은 영원회귀의 긍정과 초인에의 길을 설파한다. 여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저 높은 곳과 저 낮은 곳을 줄기차게 오르내리면서, 뱀, 독수리, 두더지, 독거미, 불개 등 수없이 많은 동물들, 난쟁이, 현자, 교황, “제 발로 거지가 된 자”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여행한다. 여행을 통해 깨달음은 심도를 더해 가고 차라투스트라도 성숙해 간다. 이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느낌으로 읽어야 할 대목들, 지나치게 개인적인 구절들이어서 독해되지 않는 구절들, 불필요해 보이는 언사들을 비롯해 해독해내기 쉽지 않은 대목들이 많다. 니체 자신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이 책을 온전하게 읽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온전하게 읽겠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니체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을 관류하는 근본 주제는 ‘영원회귀’ 사상이다. “사물들은 정의와 징벌이란 것에 따라 도덕적으로 정돈되어 있다. 오, 만물의 유전이라는 징벌과 ‘생존’이라는 징벌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 없을까?” 광기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다. 이것은 징벌로서의 생성과 생존의 이야기이며 영원회귀의 이야기이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생성은 그 자체 부정의한 것이다. 그래서 만물은 징벌을 받아 ‘아페이론’으로 돌아가곤 한다. 여기에는 우주에 투영된 정의/부정의의 감각이 존재한다. 만물 유전은 징벌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야 한다는 것(da-sein)은 징벌이다. 영원회귀는 징벌이다. “생존 또한 영원히 되풀이해서 행위가 되고 죄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존’이라는 징벌에서 영원한 것이다.” 달빛 속에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저 거미, 저기 저 달빛, 영원한 사물들에 대해 속삭이며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나와 너,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했었고 또 어느 날엔가는 다시 존재할 것이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흐른다.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와 결부된다. 아무런 새로울 것도 없는 삶을 끝도 없이 되살아야 한다는 것. 니체는 허무주의와 대결하는 철학자이다.
나와 너, 존재했고 또 존재할 것
허무주의와의 대결은 영원회귀의 긍정을 통해 수행된다. “나는 너희들에게 ‘의지는 일종의 창조하는 자’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너희들로 하여금 이 터무니없는 노래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모든 존재들은 역능을 의지한다.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존재들은 역능의지“이다”. 의지는 창조하는 존재, 차이를 창조해내는 존재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함은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요, 되돌아옴을 긍정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차이의 창조는 열역학 제1법칙(‘에네르기 보존의 법칙’)의 영향 하에서, 즉 동일성으로서의 전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니체에게 영원회귀의 긍정은 되풀이됨에 대한 긍정이다.
“일체의 ‘그랬었지’는 창조하는 의지가 나서서 ‘나는 그러하기를 원했다!’고 말할 때까지는 한낱 흩어져 있는 조각돌이요, 수수께끼이자 끔찍한 우연에 불과하다.”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요, 그것을 의지의 필연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계는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들의 도박대”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대수(大數)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률론은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시킨다. 주사위를 더 많이 던지면 던질수록 확률은 더욱 정확해진다. 그러나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은 던지기라는 행위를, 매번의 수(手)를 그것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던지기의 행위, 매번의 수를 수학적 확률을 공고히 해 주는 ‘경우’들, 함수값들로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이 때 삶이란 고귀한 의미에서의 ‘놀이’로서 다가온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은 연민의 정까지도 없애준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게 생이었던가? 좋다, 다시한번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반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세계의 원인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아니다. 주체는 자신이 영원회귀의 한 원인이 됨으로써 영원회귀의 결과가 된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온다. 그 매듭이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영원회귀와 함께 되돌아오는 것, 자신이 그 원인이자 결과로서 참여하는 것은 영원회귀에 어떤 차이를 도래시키는 것은 아니다. “나 다시 오리라. 이 태양과 이 대지, 이 독수리와 이 뱀과 함께. 그렇다고 내가 새로운 생명이나 좀더 나은 생명, 아니면 비숫한 생명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열역학적 동일성이 얼마나 무겁게 니체를 누르고 있는가가 다시 한번 확인된다.
때문에 니체에게서 영원회귀의 긍정은 단적인 차이에의 긍정이 아니라 세계의 동일성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건들을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또 다시 위대한 대지와 위대한 인간의 정오에 관해 이야기하고, 또 다시 사람들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초인이 “넘어서 가는” 자라면, 그가 넘어서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세계의 어떠함, 어떤 “것”으로서의 세계는 단순히 영원회귀한다. 초인이 넘어서 간다면, 그것은 이 영원회귀하는 세계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이다. 넘어서 감은 공간적 이미지가 아니라 생존 양식에서의 차이의 이미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영원회귀가 좀 더 명확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정식화되려면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에게서 세계의 동일성은 와해된다. 차이는 세계 내에서만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그 자체, ‘전체’에서의 차이가 문제이다. 베르그송은 이런 ‘절대 차이’를 도입한다. 여기에서 ‘창조’라는 말은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세계 내에서의 어떤 창조가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의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의 창조이다. 니체의 발짓을 멈칫거리게 했던 동일성은 와해된다.
초인의 길 함께 갈 순 없는가
영원회귀를 사유한다는 것은 차이와 반복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반복이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의 운동, 차생(차이생성)에서 발생하는 반복, 잠재적 차이가 현실화되는 과정과 떼어서는 존립할 수 없는 반복이다. 여기에서 반복은 허무주의적 색채를 떨어버리고 차이의 힘을 구현하는 결정적 계기로서 다시 자리매김된다.
영원회귀를 긍정하고 초인에의 길로 가는 것은 한 개인의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가능하다. 차이에의 긍정, 차이를 만들어내기.(물론 이 때의 차이는 베르그송의 절대 차이가 아니라, 허무주의 극복에서 나타나는 차이이다) 이 차이는 헤겔적 주인-노예의 변증법이 아니다. 노예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권력에의 의지’가 추구하는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영원회귀의 삶 자체의 긍정을 통해서 획득하는 차이이며 고귀함이다.
그러나 거리의 파토스는 함께-감의 파토스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초인에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것은 니체를 맑스와 함께 사유할 때 부딪치는 문제이며, 맑스와 니체가 사상적으로 현대를 맞이한 이래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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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정우 씨의 글에 대한 약간의 커멘트
고전 다시읽기/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사유가 완숙기에 달했던 1880년대 전반에 씌어진 걸작이다. ‘철학적 오페라’(들뢰즈)로서의 이 책에서 우리는 깊은 병을 ‘실험’함으로써 위대한 건강을 찾아낸 한 천재의 고뇌와 환희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니체의 이 저작은 영원회귀의 긍정과 초인에의 길을 설파한다. 여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저 높은 곳과 저 낮을 곳을 줄기차게 오르내리면서, 뱀, 독수리, 두더지, 독거미, 불개 등 수없이 많은 동물들, 난쟁이, 현자, 교황, “제 발로 거지가 된 자”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여행한다. 여행을 통해 깨달음은 심도를 더해 가고 차라투스트라도 성숙해 간다.
이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느낌으로 읽어야 할 대목들, 지나치게 개인적인 구절들이어서 독해되지 않는 구절들, 불필요해 보이는 언사들을 비롯해 해독해내기 쉽지 않은 대목들이 많다. 니체 자신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이 책을 온전하게 읽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온전하게 읽겠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니체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을 관류하는 근본 주제는 ‘영원회귀’ 사상이다.
“사물들은 정의와 징벌이란 것에 따라 도덕적으로 정돈되어 있다. 오, 만물의 유전이라는 징벌과 ‘생존’이라는 징벌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 없을까?” 광기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다. 이것은 징벌로서의 생성과 생존의 이야기이며 영원회귀의 이야기이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생성은 그 자체 부정의한 것이다. 그래서 만물은 징벌을 받아 ‘아페이론’으로 돌아가곤 한다. 여기에는 우주에 투영된 정의/부정의의 감각이 존재한다. 만물 유전은 징벌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야 한다는 것(da-sein)은 징벌이다. 영원회귀는 징벌이다.
☞ 위의 두 문단에서 광기의 설교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니체)의 주장과 다르다. 즉, 영원회귀는 '징벌'이 아니다. 반대로 니체는 '생성의 결백'을 말한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결백과 관련된다. 삶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 긍정을 위해서는 결국 생이 죄가 아니라 기쁨이어야 하는 것이다!
“생존 또한 영원히 되풀이해서 행위가 되고 죄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존’이라는 징벌에서 영원한 것이다.” 달빛 속에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저 거미, 저기 저 달빛, 영원한 사물들에 대해 속삭이며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나와 너,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했었고 또 어느 날엔가는 다시 존재할 것이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흐른다.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와 결부된다. 아무런 새로울 것도 없는 삶을 끝도 없이 되살아야 한다는 것. 니체는 허무주의와 대결하는 철학자이다.
☞ 바로 위의 두 문단의 연관성이 이해되지 않는다.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와 결부되는 것이 맞지만, 허무주의에는 두 유형이 구분되는데, 어떤 의미의 허무주의를 말하고 있는지 글 전체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허무주의에 대한 이해는 니체 사상의, 특히 영원회귀 사상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얼버무리듯 허무주의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허무주의와 긍정의 관계가 적절하고 정확히 언급되어야 한다(허무주의에 관해서는 내가 쓴 '문제는 니힐리즘이다'라는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완전한 글은 못 되지만 중요한 핵심은 짚고 있다). 또한 “생존 또한 영원히 되풀이해서 행위가 되고 죄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존’이라는 징벌에서 영원한 것이다.”라는 인용 대목은 차라투스트라(/니체)의 말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니체의 책을 읽을 때는 화자를 잘 고려해서 뉘앙스를 살펴 읽어야 하는데, 이 글에서는 그런 뉘앙스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회귀 사상을 거꾸로, 니체의 반대로 읽어가고 있다.
나와 너, 존재했고 또 존재할 것
허무주의와의 대결은 영원회귀의 긍정을 통해 수행된다. “나는 너희들에게 ‘의지는 일종의 창조하는 자’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너희들로 하여금 이 터무니없는 노래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모든 존재들은 역능을 의지한다.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존재들은 역능의지“이다”. 의지는 창조하는 존재, 차이를 창조해내는 존재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함은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요, 되돌아옴을 긍정하는 것이다.
☞ 우선, 역능의지? 이런 어설픈 말이 어디 있는가? 니체의 권력의지와 관련해서는 나의 많은 논평과 김진석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위의 인용구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의지의 좌절'과 관련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부분 때문에 니체는 허무주의와의 대결을 극단으로까지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럼 어찌해야 '죄'인 생성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 글에서는 가장 중요한 이 면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니체에게 차이의 창조는 열역학 제1법칙(‘에네르기 보존의 법칙’)의 영향 하에서, 즉 동일성으로서의 전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니체에게 영원회귀의 긍정은 되풀이됨에 대한 긍정이다.
☞ 이 문장은 니체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이며, 보통 유고의 한 대목('권력의지'로 편찬된 책의 아포리즘 가장 뒷부분에 나오는)과 연관해서 전거를 대는데, 이것은 니체 스스로가 강력하게 폐기한 사고실험이다. 열역학 법칙을 들먹이는 건 현학취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니체는 '동일성으로서의 전체'라는 것을 꿈꿔본 적조차 없으며, 무한 생성을 말할 뿐이다. 되풀이됨은 무한 생성일 뿐이며, 어떻게 해야 무한 생성을 긍정할 수 있는지를 필자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뒤에서 베르그손을 들먹이며 니체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의 지속이 지닌 무한 생성의 측면은 적어도 니체의 생성의 결백함과 같은 내용이다.
“일체의 ‘그랬었지’는 창조하는 의지가 나서서 ‘나는 그러하기를 원했다!’고 말할 때까지는 한낱 흩어져 있는 조각돌이요, 수수께끼이자 끔찍한 우연에 불과하다.”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요, 그것을 의지의 필연으로 바꾸는 것이다.
☞ 이 말에 책임지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을 끝까지 읽어도 이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맨 마지막 문단의 엉뚱한 의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적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런 글을 신문이라는 공공재에 발표하지 않는 것이 책임 있는 학자의 기본 아닐까? 인터넷 사이트에 발표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세계는 주사위놀이를 하는 신들의 도박대”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대수(大數)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률론은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시킨다. 주사위를 더 많이 던지면 던질수록 확률은 더욱 정확해진다. 그러나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은 던지기라는 행위를, 매번의 수(手)를 그것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던지기의 행위, 매번의 수를 수학적 확률을 공고히 해 주는 ‘경우’들, 함수값들로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이 때 삶이란 고귀한 의미에서의 ‘놀이’로서 다가온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은 연민의 정까지도 없애준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을 죽이기까지 한다.”
☞ 이런 말들의 배경에 이 '놀이'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야 하는데, 이것이 없다. 놀이를 하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그것은 허무주의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설명될 문제이다. 의지가 아무리 시도를 해도 곧 무화되고 마는 세상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지를 감행할 것인가? 우리는 구약 전도서를 극복해야 하며, 초인이건 넘어가는 인간이면, 아니면 위인이건, 그 극복이 관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극복과 영원회귀가 어떤 관계인지 다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게 생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 번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반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세계의 원인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아니다. 주체는 자신이 영원회귀의 한 원인이 됨으로써 영원회귀의 결과가 된다. “나를 얽어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온다. 그 매듭이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영원회귀와 함께 되돌아오는 것, 자신이 그 원인이자 결과로서 참여하는 것은 영원회귀에 어떤 차이를 도래시키는 것은 아니다. “나 다시 오리라. 이 태양과 이 대지, 이 독수리와 이 뱀과 함께. 그렇다고 내가 새로운 생명이나 좀 더 나은 생명, 아니면 비슷한 생명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열역학적 동일성이 얼마나 무겁게 니체를 누르고 있는가가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때문에 니체에게서 영원회귀의 긍정은 단적인 차이에의 긍정이 아니라 세계의 동일성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건들을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또 다시 위대한 대지와 위대한 인간의 정오에 관해 이야기하고, 또 다시 사람들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초인이 “넘어서 가는” 자라면, 그가 넘어서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세계의 어떠함, 어떤 “것”으로서의 세계는 단순히 영원회귀한다. 초인이 넘어서 간다면, 그것은 이 영원회귀하는 세계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이다. 넘어서 감은 공간적 이미지가 아니라 생존 양식에서의 차이의 이미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니체에게서 영원회귀의 긍정은 단적인 차이에의 긍정이 아니라 세계의 동일성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건들을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니체에 대한 완벽한 오독이다. 오히려 니체가 말한 것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위의 세 문단에 인용된 <차라투스트라>의 구절들은, 자세히 문맥을 보면, 니체의 말이 아니다. 니체는 여기서 정확히 화행론적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영원회귀하는 세계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넘어가는 것이 초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른바 그 '열역학적 동일성'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또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넘어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말은 쉽고 행동은 멀기만 하다.
영원회귀가 좀더 명확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정식화되려면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에게서 세계의 동일성은 와해된다. 차이는 세계 내에서만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그 자체, ‘전체’에서의 차이가 문제이다. 베르그송은 이런 ‘절대 차이’를 도입한다. 여기에서 ‘창조’라는 말은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세계 내에서의 어떤 창조가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의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의 창조이다. 니체의 발짓을 멈칫거리게 했던 동일성은 와해된다.
☞ 베르그송이 왜 언급되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짐작컨대 니체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이리라), 적어도 내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체의 생성의 결백함(사실 이것이 허무주의를 낳는다)은 베르그송의 지속 이론에 선행하며 이를 선취한다. 니체가 말하려 했던 것은, 바로 무한히 계속되는 생성이 우리를 짓누를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내가 '환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라는 대목은 번역하여 올린 것도 바로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의 모색, 또는 니체의 해석의 모색 때문이었다. 이 대목이 영원회귀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도 지난 번에 언급한 적이 있다. 사실 이 대목은 오해의 여지는 별로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 수 있겠지만, 일관되게 이해해 보려 하기만 한다면, 오해의 여지는 없다는 것이다.
초인의 길 함께 갈 순 없는가
영원회귀를 사유한다는 것은 차이와 반복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반복이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의 운동, 차생(차이생성)에서 발생하는 반복, 잠재적 차이가 현실화되는 과정과 떼어서는 존립할 수 없는 반복이다. 여기에서 반복은 허무주의적 색채를 떨어버리고 차이의 힘을 구현하는 결정적 계기로서 다시 자리매김된다.
☞ '반복은 허무주의적 색채를 떨어버리고 차이의 힘을 구현하는 결정적 계기로서 다시 자리매김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속 말해왔지만, 허무주의적 색채를 어떻게 떨어버릴 수 있는가가 답변되어야 할 대목인데, 오히려 그것이 결론으로 주장되고 있다.
영원회귀를 긍정하고 초인에의 길로 가는 것은 한 개인의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가능하다. 차이에의 긍정, 차이를 만들어내기.(물론 이 때의 차이는 베르그송의 절대 차이가 아니라, 허무주의 극복에서 나타나는 차이이다) 이 차이는 헤겔적 주인-노예의 변증법이 아니다. 노예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권력에의 의지’가 추구하는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영원회귀의 삶 자체의 긍정을 통해서 획득하는 차이이며 고귀함이다.
☞ 논증이 없고 주장만 있다. 자꾸 말하지만 차이(생성)를 긍정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특히 삶 자체가 가장 큰 의문이 되고 있는 마당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결국 현란한 수사만 넘치고 알짜는 없다. 전혀 없다!
그러나 거리의 파토스는 함께-감의 파토스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초인에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것은 니체를 맑스와 함께 사유할 때 부딪치는 문제이며, 맑스와 니체가 사상적으로 현대를 맞이한 이래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 왜 갑자기 거리와 함께-감이 대립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지? 거리의 파토스라는 것이 무슨 뜻이길래? 게다가 맑스는 함께-감이고 니체는 함께-가지-못함이라는 것인가? 이런 수사는 무의미한 수사이다.
* 총평: 신문에 실리는 글이라면 독자에게 적절한 수준에서 눈높이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 필자는 자기 식의 개념 이해와 개념 규정을 나열(설명이 아니다)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독자 수준에 맞지 않은 글을 이 개인 홈페이지에 쓰는 것과는 별개 문제이다. 내가 가끔 독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엉뚱한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외적인 글을 쓸 땐, 나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학자로서 진지해야 할 장소가 있고 장난을 해도 좋은 장소도 있다. 특히 이 홈페이지에 전념하지 못하는 데는 건강과 경제상의 문제 등 여러 이유들이 있고, 게다가 신문처럼 빠른 속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 사족: 내가 '영원회귀'나 니체에 대해 긴 글을 잘 쓰지 않고는 있지만, 이 홈페이지를 통해 무척 많은 글을 공개한 바 있다. 진지하기만 하다면 어떤 질문이라도 받을 용의가 있지만 이미 답한 것에 대해서는 필요할 때만 언급하고 싶다.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고, 게다가 몇 되지 않는 게시판 내에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반론이나 반박, 또는 비판을 위해서라면 일단 '니체'라고 검색해 본 후에 그렇게 하시길 바란다.
* 사족 하나 더: 신문에 실린 '초인'의 모델이 되었다고 소개한 상은 너무 마음에 안 든다. 필자의 견해였는지 기자의 견해였는지 모르겠으나, 저 상은 히틀러의 상이지 니체의 상은 전혀 아닌 것이다.
출처 김재인님의 홈페이지 http://www.armdown.net
http://armdownzen.cafe24.com/zbxe/philosophia/22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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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곤 선생의 사족 : 전 개인적으로 박병철님의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마치 최명관님의 방법서설/성찰을 서울대중도에서 읽고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책을 거의 통째로 복사하고 최근에 와서야 다시 한 권 구입하고야 만 것과 비슷한 임팩트였지요). 그러나 김재인님(들뢰즈번역전문가)의 글을 통해 한 수 더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죠? ^^
첫댓글 아,,,,원문글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듯 모를듯해서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하고 짜증이 났었는데 김재인님의 비평을 읽고나니 좀 위안이 되네요 ㅎㅎ
김재인님은 천개의고원의 역자이지요. 홈피한번 클릭해보세여~~! 유용한 읽을거리들이 산재해 있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