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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역사의 변화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수가 있으니 잘 읽어보세요. 경주의 숭덕전제사도 밀성박씨의 주관으로 치루워 오든것을 숭덕전주관으로 변한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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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박혁거세
2016.07.10. 16:52
박씨의 선조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에서 시작되었으니 신라가 이룩되기 전에
고조선의 유민들이동해 해변이나 산골에 흩어저 살아서 육촌을 이루었고 육촌에는 각각 촌장이 있었다.
알천 양산촌( 閼川 楊山村) –
이알평(李閼平)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 최소벌도리(催蘇伐都利)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 손구례(孫俱禮)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 배지타(裵祗陀)
치산 진지촌(치산 珍支村)
-정지백호(鄭智伯虎)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설호진(薛虎珍)
나정
그 때 육촌을 통솔할 임금이 없음을 걱정한 끝에 육촌장들이 알천에 모여서
사흘 동안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단군기원 2265년(서기 전 69)에 고허촌 소벌도리가 멀리 양산을 바라보니 그 밑에 나정(우물)
근처 숲사이에 오색이 영롱한 서기가 뻗치고 용마가 큰 소리를 지르며 신선이 꿇어 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이는지라 즉시 쫓아가 보니 용마는 보이지
않고 한 포가 있는데 큰 알 같기도하고 박 같기도 하였다.
소벌공이 신기하게 여겨 포를 깨어 본 즉 사내아기가 태어나니 풍채가
단정하고 아름다운지라 동천에 목욕시켜 들이니 온 몸에 광채가 나고 가까이 있던 새와 짐승들이 神人의 탄생을 축복하여 노래하고 춤을추기로 육촌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받들어
길렀다.
진한 사람들의 말에,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박이라 삼고 혁혁한 광명을 이 세상에 내려주고 오래 오래 살아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다한다.
열세살에 어른과 같이 숙성함으로
육촌 사람들이 받들어서 임금으로 모시었으니 이 때가 바로 단기 2277년(서기 전 57년) 갑자 사월 병진일이었다.
오릉(五陵= 사적172호)
신라의 시조왕릉으로 전하는 오릉은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의 능묘로 사적
제172호(봉분 높이 10m, 지름 20m 내외)로 지정되었으며,모두 5기의 능이 있는데, 박혁거세왕과 왕후인 알영왕비,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5위(位)의 능묘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하고 있으며,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외형은 경주 시내 평지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다른 많은 삼국 시대 신라 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봉토분으로 4기는 원형분이나 1기는 표형쌍분으로
되어 있다.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로 표형쌍분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2기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와 같이 5기중 1기는 표형쌍분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숭덕전(崇德殿)
신라 시조왕박혁거세의 묘(廟)로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다.
1429년(세종11) 왕명에 의해 창건되어, 봄과 가을에 증사(中祀)의 예로 치제(致祭)할 것을 정식으로 정하였다. 1723년(경종3)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참봉 2인을 두어 관리하게하였다. 1752년(영조28)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 시조가 백성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하였다.
제관으로는 헌관(獻官),
축(祝), 장찬(掌饌), 집준(執尊), 집사(執事), 찬자(贊者), 알자(謁者) 등이다. 헌관은 관찰사가 왕을 대행하여 치제하였다.
나정(蘿井)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들어 있는 우물로 사적 제 245호이다.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옆에는 조그만 시조유허비가 있다.
옛날 진한 땅에 고조선의 유민이 세운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6촌
촌장들이 어느날 양산(지금의 경주 남산) 숲속에 있는 우물인 나정 곁을 바라보는데 이상한 빛이 드리워졌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다가가보니, 우물가에 큰 알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사내 아이가 태어나와 마침내 자라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서기
6년(남해왕 3년)에 이곳에 묘전을 세우고 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제를
올렸다.
알영정(閼英井) 비각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로, 오릉원 내에 있으며, 우물터에
비각이 서있다.
성모사(聖母祠)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나정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성령의 힘에 의해
잉태되어 성모(聖母)에게서 났다는 또 한가지 설이 있다. 성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선술(仙術)을 얻어 신선이 되어, 동해 바다 위에 나와
놀다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머물다가 시조왕을 낳았다고 한다.
성모사는 성모를 기리기 위해 경주 사악 선도산 주봉의 높은 바위 밑에
지은 것이다.에 26대 진흥왕 때 안흥사(安興寺)의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사당의 왼쪽 아래 땅 속에서 황금 160냥을 얻었다는 기록과,
경명왕 때는 왕이 이곳에 올라와서 매 사냥을 하다가 매를 잃고 신모에게 기도하여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에는 임진왜란 때 후손 언수(彦秀)가
숨어서 피란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오래된 역사와 전설을 가진 사당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것은 구한말 전 참봉(前 參奉) 기문(基汶)이 비각을
중건하고, 다시 1963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
<p>◆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휘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 박씨들은 남남의 박씨가 아닌 다 같이 한 집 박씨라는 뜨거운 정분과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끈끈한 화목을 다져왔습니다. 말하자면 밀성 큰집, 고양 둘째 집, 속함 셋째 집....이런 식으로 말씀이지요 .위계질서(?)도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 중요한 宗事를 의논할 시는 항상 밀양에서, 아니면 주로 경주 崇德殿에서 지금은 남남처럼 되어버린 각 파의 대표들이 有司가 되고 그 중의 한 분이 都有司가 되어 하기도 하고, 책을 편찬할 시는 그 분들이 편집위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 모두가 사라지고 다만 전국적 규모의 신라 오릉 보존회가 春祭, 秋祭를 통해 그 정서를 조금은 이어 온다고 나 할까요... </p>
1.기록을 보면 숭덕전에서 大韓 光武 3年(서기1899)에 간행한 朴氏 史譜는
順天人: 박해문, 박주동
潘南人: 박재응, 박이양, 박종국, 박윤양.
密城人: 박준기, 박봉래, 박재화
高靈人: 박청우
竹山人: 박전필 이런 선조들이 주관을 했던 기록이 있고,
또 그 뒤로는 都廳에
順天人 :박종현
密城人 :박재형, 박용대, 박희용, 박수만, 박시순, 박시하, 박윤상, 박영민, 박영립, 박윤수, 박영래, 박학래, 박근수, 박규희, 박성민, 박준우, 박영수, 박종화, 박경양, 박영곤. 박영규, 박용규.
高靈人 : 박봉빈, 박청우
潘南人 : 박정양, 박인양.
月城人 :박종만
高靈人 :박인식
竹山人 :박종우, 박전필
이상 분들께서 주관하셨고, 회의 임원진처럼 교체 또는 유임하여 일해 내려온 모든 분들을 일일이 소개 못함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이 분들은 모두 각 파를 대표하는 분들로 주로 당시 書院에 출입하는 학식 있고 경륜 있는 훌륭한 先人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분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史料와 族譜같은 것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게지요.
2.당시 이분들이 崇德殿에 모여 시조의 유래에 대하여 글귀를 다듬은 것은 이 사이트의 타이틀과 같은 <박혁거세와 탄생신화>가 아닌 <始祖王 誕降事實>,<始祖王妃 誕降事實>로 하여 책을 만들었으며, 원문은 전일 제가 소개해 드린 바와 같습니다.
이 내용은 박씨대동보 또는 각 파보의 첫머리에도 반드시 실려 있습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휘혁거세 자손 박씨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만.... 이것이 저의 옹색하나마 되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기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 것은 시조의 근원에 대하여는 탄생신화나 설화나 설이 아닌 탄강사실 그대로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귀 사이트의 [족보란? FILE의 **박혁거세 탄생신화...에서]
제8열 :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아 보기가 흉해서> 또는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는둥 하는 불경스러운 기록은 다른 곳에서 퍼온 글이라 하더라도 살펴보시고 과학적 고증사실이 아닌이상 삭제함이 마땅하다 사료되는데 귀하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전술한 사연으로 정한 시조왕. 시조왕비 탄강사실 원문 어느 구석에도 그런 내용은 볼 수 없습니다.
이상이 또한 그에 대한 해답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이 사이트의 구석구석마다 밀양박씨, 밀양박씨 하고 있는데, 굳이 틀렸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가급적 밀성으로 표기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본래 왕자이신 휘언침께서는 밀성으로 봉군되셨기 때문에 밀성대군이라 하였고, 따라서 그 후예들의 관향은 자연 밀성이 된 것이며, 밀성은 후에 밀양으로 지명이 변한 것입니다만.... 때문에 관향과 관련한 지명의 변천사는 족보편찬시에 반드시 삽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명이 그렇게 바뀌었으니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고 넘겨버린다면, 만약에 경주박씨와 월성박씨가 엄연히 틀림에도 같은 파로 인식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世係)가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p>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박씨는 박씨인구의 70 ~ 80%를 차지할 만큼 번창하였으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 박씨를 8박이라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박씨는 김씨, 이씨와 더불어 인구가 가장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 문헌에 314개의 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는것으로 알려지며, 이중 46개의 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 조사에서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는 인구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에 순위는 275성 중 김씨, 이씨 다음이었다.
<p>⊙ 신라가 생기기 전 여섯 마을(6부족)에 촌장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p>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의 알평(謁平)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 있으며, 진주 소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具禮馬)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의 지백호(智伯虎) - 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 있다.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의 지타(只他)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虎珍)
이(李)씨의 유래
•총 240개의 본관과 1,418,945가구 5,985,554명이 있다.(1985년 현재)
손(孫)씨의 유래
•총 23개의 본관과 368,717명이 있다.(1985년 현재)
•경기, 경주, 광주, 구례, 김해, 나주, 남원, 달성, 밀양, 보성, 부녕, 비안, 안동(일직), 전주, 진주, 창녕, 청주, 충주, 평안, 평양, 평택, 평해, 해주 손씨가 있다.
•손씨는 문헌에 118본이 나타나 있으나 7본을 제외하고는 그 유래를 알 수가 없다.
•손씨중 일직(안동) 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 사람인 무산 대수촌의 촌장인 구례마의 손자 손직이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손씨로 성을 하사받아 생긴 손직의 후손이며, 경주, 밀양, 월성, 청주, 평해 손씨는 구례마의 후손인 손순(孫順, 자는 사구, 호는 문효)를 시조로 하고있다.
•손순은 모량리 사람으로 일찍이 아버지 손학산을 여의고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린 아들이 늙으신 어머니 운오의 끼니를 빼앗아 먹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자식은 다시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한번 떠나시면 다시 모실 수 없으니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가 굶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해야겠다며, 아내와 의논 후 어린 아들을 취산(=모량리 서북쪽에 있음)으로 데리고 가서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그곳에서 돌종이 나왔다 한다. 아내는 "이 종을 얻은 것은 필시 이 아이의 복인 듯 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으면 안되겠습니다." 하여, 아들과 돌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집의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리니 그소리가 대궐까지 들리어 당시 흥덕왕이 "서쪽에서 종소리가 나는데 그소리가 맑고 멀리 들리니 보통 종이 아닌 듯 싶다. 조사해 보라!" 하여 신하가 조사하여 왕에게 그 내막을 아뢰니, 왕이 효행에 감복하여 집 한채를 내리고 쌀 50석을 하사하였으며, 835년(신라 흥덕왕 10년)에 손순을 월성군에 봉했다 한다. 이에 손순이 원래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홍효사라 하였으며, 이 절에 돌종을 모셨다. 그후 신라 진성여왕 때에 후백제의 침입으로 절과 종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 - (삼국유사 인용)
•손순의 묘는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효자동에 있으며, 향사는 음력 10월 1일에 지낸다.
배(裵)씨의 유래
•총 45개의 본관과 323,004명이 있다.(1985년 현재)
•개성, 경남, 경주, 고령, 고양, 곡강, 곤양, 금강, 금성,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해, 달성, 대구, 대전, 밀양, 분성(김해), 곤산(고양), 상주, 서산, 선산, 성산, 성주, 수원, 아낙, 안동, 안성, 온양, 의성, 전주, 정주, 진주, 창녕, 청산, 청주, 평산, 풍산, 풍성, 함흥, 해주, 협계, 홍해, 화순
•경주 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 사람인 금산 가리촌장 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후 32년(유리왕 9년)에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하사 받았다. 후에 한지부가 오늘날의 이름과 같은 경주로 바뀌면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지타의 한자표기는 무엇이 정확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1.금산가리촌장 지타[祗陀]
2.금산 가리촌장(金山 加利村) 지타(只他)
3.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 조선대학교 정보전산
•그러나 그후에 후손들이 어떻게 이어졌는지의 기록은 없다. 단지,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나 배현경은 원래 성이 없이 백옥(白玉)이라 불렸으며, 나중에 성을 배씨로 했다고 한다. 중시조 배현경은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궁예가 고구려에서 태봉을 세울 때, 이를 도와서 벼슬이 행오에서 출발하여 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고 개국 일등원훈에 서훈되었으며,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도로 옮길 때에 개주 도찰사가 되어 새도읍을 건설하는데 공을 세우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9년(태조 19년) 그가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하고 나가자 숨을 거두었다. 왕이 대궐로 돌아가던 중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세우고 통곡을 하였다 한다. 후일 고려 성종15년(서기 995년)에 평산 태백성에 태사사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향사한다.
•우리나라 배씨는 모두 지타(태사공)의 후손이었으나 자손이 번성해짐에 따라 본관과 파가 나뉘어졌으며, 대동보를 부정하고 다르게 족보를 만든 파도 있다.
•경주 배씨는 1985년 현재 90,027명이 있다.
설(薛)씨의 유래
•총 8개의 본관과 34,262명이 있다.(1985년 현재)
•개성, 경주, 밀양, 순창, 순천, 옥천, 진주, 창원 설씨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기원은 신라가 생기기 이전(BC 57년)의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6촌장의 한사람인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虎珍)으로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유리왕 9년(32년)에 6촌이 6부로 개칭하고 명활산 고야촌을 습비부로 고쳐 성을 설씨로 하사 받았다. 습비부가 경주에 속하므로 본관을 경주로 하고, 시조를 설지덕(薛支德)으로 하였다. 그의 36세손인 설자승이 고려 인종때 예부시랑으로 순화(순창)백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변경하였으나 설귀창을 파조로 하는 개성파는 원래의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경주 설씨는 1985년 현재 7,689명이 있으며, 순창 설씨는 24,181명이 있다.
<p>⊙ 박혁거세 오릉 춘분대제 </p>
<p>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위업을 기리는 숭덕전 춘분대제가 20일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봉행 됐습니다.
2001년 3월 20일(춘분) 향사에는 신라 박씨 자손 천여 명이 참가해 ,신라 천년의 영광을 전승해 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경주 지역에선 매년 춘분, 박씨 외에도 미추왕을 모신 황남동 숭혜전에서 경주 김씨 자손들의 향사가 봉행 되고, 석탈해왕을 모신 동천동 숭신전에서도 경주 석씨들의 대제가 거행된다.
</p><p>
최근에 수정한 날짜 2001-06-07
수정한 사람 박태진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