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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대신문> 2002년 6월 10일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2002년 6월 4일 밤은 1954년 스위스대회 이래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를 새로 쓰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부산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D조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누르고 16강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실로 반세기만에 거둔 쾌거였다. 모든 신문들이 다투어 1면 톱기사로 승리 소식을 알렸다.
한국팀 첫 승리 소식이 대서특필되던 그날, 신문 한 귀퉁이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형서점인 종로서적이 부도를 냈다는 기사가 조그맣게 났다. 셔터가 내려진 종로서적 입구에는 책이라도 건져보려고 몰려든 1백여 명의 출판사 관계자들만이 웅성대고 있었다고 한다. 95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소가 허물어지는 모습이었다.
종로서적의 역사는 1907년 예수교서회가 현재 위치의 목조기와집에 기독교서점을 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교문서관, 종로서관 시대를 거쳐 1963년 종로서적센터로 이름을 바꾸면서 서울의 대표 서점으로 자리 잡았다. 종로서적은 60, 70년대 젊은이들에게 유일한 지성의 공간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제대로 된 도서관을 찾아보기 힘들던 시절, 그나마 몇 있던 공공도서관들마저 온통 폐가식으로 운영되어 직접 책을 뽑아 펼쳐볼 수 없던 시절, 진정한 의미의 도서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종로서적은 특히 교통 요지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대형서점이어서 수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워낙 많은 인파가 출입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 대리석 계단들이 접시바닥처럼 움푹 패여 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7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나에게 종로서적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거의 유일한 원천이기도 했다. 내 인생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몇 권의 책들을 처음으로 만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만일 그 몇 권의 책들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나의 인생은 얼마나 암담했을 것인가! 정말 아찔한 일이다.
종로서적의 몰락은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1980년대부터 강성노조와 경영진, 창업자 가족간의 내부갈등 등에 시달리면서 적극적인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던 70년대 전성기 때의 모습에 연연해 주차장이 없는 등의 문제에 안일하게 대처한 것도 소비자들을 멀어지게 한 요인이었다. 더욱이 인터넷 서점과 다른 대형서점들의 할인 공세가 가열되면서 경영난이 심각해졌다고 한다.
월드컵 첫 승리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던 그 시각에 국내 최고의 책방이었던 종로서적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아무런 직접적인 인과관계 없는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우리 사회가 처한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로 받아들여진다.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는 유난히 집착하면서, 국민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지적 인프라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우리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히딩크의 작전이 효력을 발휘하여 한국 축구팀이 16강에 들어선다고 하자. 그 후 천운이 따라주어 8강에 진출한다. 8강에 들어서자 온 국민은 축제분위기에 싸인다. 세계가 한국의 저력에 놀라게 된다. 그 결과 수출과 생산의 간접적 효과를 크게 얻게 되고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16강에 끼건, 8강에 끼건, 아니 정말 운이 좋아 월드컵 우승국이 되건,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더 훌륭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운 좋은 승리가 우리 사회에 더 해로울지도 모른다. 중병 든 환자에게 환각제를 투여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찌감치 월드컵 8강에 진출한 북한이 그 후 얼마나 좋아졌는가? 왕년의 월드컵 우승국가 아르헨티나에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듯이 우리나라 도서관에는 책이 없다. 우리나라의 그 많은 대학도서관들의 도서 구입 예산을 합쳐봐야 미국 하버드 대학의 도서 구입 예산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학원생들이 논문을 쓰려고 도서관에 가봐야 구할 수 없는 책이 훨씬 많다. 세칭 일류대학교 도서관들도 예외가 아니다. ‘찾는 책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일본의 도서관을 가보라! 없는 책이 없다. 일본은 ‘찾는 책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이 평소 책을 즐겨 읽기라도 하는가? 출판계는 이미 5월부터 서적 매출이 뚝 떨어져서 한숨만 쉬고 있다. 월드컵 분위기에 들떠 다들 책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고서야 ‘국민성이 냄비 같고, 들쥐 같다’는 비난에 어떻게 제대로 응수할 수 있겠는가? 온 국민의 축제에 재 뿌리는 소리 하지 말라고 돌을 던져도 좋다. 무릇 생명 있는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한 사람, 그 사람이 필요하다”는 텔레비전 광고 카피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작정 시류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중심을 지키는 어른스러운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