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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에 대한 톰 라이트의 설명
https://youtu.be/pPrYmqNwfs4?si=OgT-IpfsWjOZC8gS
아주 먼 고대에는 어떤 일이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어떤 왕이나 통치자들이 큰 나라를 통치하면서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나라에게 자기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럴 때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조약은, ‘나는 너에게 이런 일을 하고 너는 나에게 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나라와 일종의 정치적인 협정을 맺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맺게 되는 협정은 그 당사자 간에 협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포괄적으로 표현되었으므로 우리에게는 더 많은 학문적인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필요한 일이겠지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시대에서 우리가 계속 알게 되는 것은 성경은 언약에 대하여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이 어떤 백성과 체결됩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협정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맺으시는 언약은 하나님께 대하여 적용되어 그 언약에 충실하게 하며, 그리고 역시 사람에게 적용되는데 그렇게 하나님은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것이 하나의 주제가 되어 성경을 관통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언약은 국가간에서만 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간에도 체결됩니다. 개인간의 언약 형태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결혼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결혼은 구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중의 하나입니다. 그 결혼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오면 그 결혼언약은 메시아와 그의 신부에 대한 것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언약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 요한계시록에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면 이 언약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아담 또는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다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 지침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에덴동산을 돌보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는 실제로 그것이 언약이라고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일어난 일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것에 대하여 언급할 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하거나 그리고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다고 하거나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저는 늘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한 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 멀리 나아가 아담과의 언약에 대한 가정을 과도하게 하여 거기로부터 어떤 생각을 추론해내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데까지만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약이 나타나는 곳은 노아와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노아를 통하여 온 만물과 더불어 체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전에 다룬 부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땅에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장차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내가 엄격하게 시비를 가린다면 모든 만물은, 모든 인간과 함께 멸절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본래 의도하신 계획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부르셔서 처음 계획된 대로 그 프로젝트를 재개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셔서 땅 위에 사는 천하만민에게 이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홍수로 멸절하지 않을 것을 보여주시려고 무지개를 구름에 두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전사가 자기 활을 들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지개는 비가 온 후에 구름 속에서 나타나는 활모양의 것으로서 창세기 9장에서 언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맺은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나의 신실함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그 후로 어떻게 행하실까요? 그 다음에 우리가 만나는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15장입니다. 그 언약은 나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 바뀝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뜻은 ‘나는 열국의 아버지다!’입니다. 창세기 17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창세기 22장에서 갱신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의 분위기는 매우 어둡고 우울합니다. 그 장의 앞부분에서 아브람은 땅과 가족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하지만, 이 약속이 장차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요. 저는 자녀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을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너에게 자녀 하나만을 줄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자손을 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좀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따라 할 때 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작동하는 방식을 볼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이 그 언약을 충실히 지키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언약의 한쪽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가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도덕적으로만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 점은 이 언약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자신이 그 언약을 충실히 지킬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그 언약이 체결되는 방식은 좀 특이한 고대의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대 근동의 세계의 의식으로서, 언약의 체결자가 고대 근동에서 희생 짐승을 잡아 죽이고 둘로 갈라서 쪼갠 후에 그 짐승의 쪼개진 사체 조각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내가 이 언약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짐승들처럼 둘로 쪼개져도 좋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맺은 언약에서만 하나님은 친히 짐승들의 쪼개진 사체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언약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15장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은 인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 전체 본문을 알고 있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하나님이 그에게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가족을 줄 것이며, 그를 많은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가족을 넘어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방언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가족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전에도 지금도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전개되면서 언약은 갱신되었고 그 결과 할례라는 표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7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서 한번 더 갱신되는데, 그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았고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그 아들을 건지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살던 때로 나아갑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바로 그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토라)을 주셨고 그 토라, 즉 율법은 십계명으로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율법 전체가 포함됩니다. 율법은 언약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율법이 그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모세가 언약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렸는데 그 이야기는 출애굽기 24장에 나옵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되었으며 너희 가운데로 하나님이 오셔서 사실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그 이후로 전개되는 구약성경의 모든 일에서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가 언약에 대하여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다윗과 맺은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은 사무엘하 7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시기를, 그의 자손이 마침내 성전을 건축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셔서 자기 백성 가운데 영원히 함께 거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단지 그가 낳은 어떤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뿐 아니라, 그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시편에도 인용됩니다. 특히 시편 89편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나는 다윗과 언약을 맺었다! 그의 자손을 내가 영원히 견고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위는 내 앞에서 영원하여 대대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시편 89은 다른 시편과 마찬가지로 중간에 그 내용이 바뀝니다. 즉, 다윗과 맺은 언약을 찬송하다가 그 시의 중간에 가면, 이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주님은 주님의 종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셨습니다. 주님은 그 언약을 폐기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다윗 계보의 왕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언약은 깨뜨려진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호소는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과 깨질 수 없는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호세아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로 소개됩니다. 호세아서에는 과거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마치 젊은 남자가 자기 신부를 인도하여 그녀에게 사랑의 약속을 하고 자신의 신부로 삼은 것처럼 하셨습니다. 호세아서에는 그 이전의 언약을 회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결혼언약을 맺으신 이야기입니다. 호세아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조를 버렸으므로 그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고 그 후로 모든 일을 겪을 것이다.’ 포로생활은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처절한 이혼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언약을 깨뜨리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갱신될 것이라는 약속이 이사야와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에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받습니다. 새 언약이라는 말은 특별히 예레미야 31장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새 언약을 맺을 것인데 그것은 옛 언약과 같이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둘 것이므로,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나에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54장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평화의 언약을 너희와 맺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다른 본문에도 나타나는데요, 그것은 에스겔 34장과 다른 곳입니다. 여호와의 종이 수고한 일 때문에, 그 이야기는 이사야 52장과 53장에 나오는데요, 하나님은 언약을 갱신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평화의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로 와서 마시게 할 것이다. 나는 그들과 언약을 맺을 것인데, 그것은 다윗과 맺은 언약이다.’ 이 말씀은 말하자면, 다윗에게 주신 약속과 언약을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이제 야훼의 자비로운 임재와 사랑과 풍성한 선물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바로 이 그림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는 어디에 가시든지 그런 마음으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설교하실 때든지 비유로 가르치실 때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 언약을 충실히 이루실까요? 그 대답은, ‘하나님이 언약을 충실하게 이루시는 때 나타나는 모습은 바로 이것이다’입니다. 그 모습은 이 젊은 유대인 예언자가 두루 다니면서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바로 그 모습이며, 병자를 치료하시고, 슬기롭게 하지만 도전적으로 가르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그 밖의 모든 비유들입니다. 또한 두 아들이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 이야기에서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이 먼 길로 나갔고 다른 아들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의 정점은 예수께서 가까운 친구들을 데리시고 나가셨을 때입니다. 바로 그 밤에 주님은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새 언약이다.’ 포도주를 따라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나는 너희와 많은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서 피를 흘린다.’ 이 위대한 주제의 출전은 출애굽기와 예레미야입니다. 더 거슬러 가면 아브라함에 이르며, 어쩌면 아담의 메아리가 그 뒤에서 울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바로 이 핵심으로부터 세워집니다. 그 핵심은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 새 언약의 약속과 히브리서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새 언약이 이제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은 예수께 초점을 맞추면서 모든 신자에게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언약 신학에 대하여 설명한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 같은 본문도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반복적으로 우리가 발견하는 두 가지 사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언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이 자기 약속에 충실하게 행하시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언약은 하나님이 어떤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뚫고 들어오셔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그리고 바울이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우리는 되돌아보고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셔서 주님이 되신 것과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이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줍니다. 비록 우리가 그 언약의 성취를 아직 볼 수 없을지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신약성경의 교회가 나가서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의 가족이 됩니다. 그 가족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들은 서로 언약을 맺은 사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화합과 평화와 형제애의 언약을 맺습니다. 그 일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위해 힘씁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교회라는 가족과 개개의 가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들이 맺은 언약과 교회의 언약 가운데 계십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표징이 됩니다. 피조물에 대한 신실하심,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심, 그 신실하심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창세기에서 시작한 모든 이야기는 마침내 완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지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전에도 신실하셨고,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시고 항상 그러셨듯이 늘 신실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 신학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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