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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부안 변산반도를 다녀와서
1. 추억
연초에 겨울여행을 떠났다. 초청받아 가는 것이었지만 여행은 언제나 내게 설렘을 가져다준다. 부안 변산반도와 전주 한옥마을, 변산반도는 서너 번 간 곳이지만 전주 한옥마을은 제대로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특히 이번 여행은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큰 아들과 함께 가는 것이어서 내게는 의미가 더했다.
변산반도는 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왼쪽으로 산을, 오른쪽으로 바다와 해안을 끼고 달릴 때 일몰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생각해보면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다 어느 순간 바다가 등장하는 정자에서 감포 가는 길이며. 눈이 시린 코발트블루의 남해가 광활하게 펼쳐지는 여차에서 홍포 가는 길까지 해안 드라이브 코스 좋은 곳이 한두 곳이겠냐 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산반도의 30번 국도를 감히 우리나라 해안드라이브의 최고 코스라고 말하는 이유는 순전히 일몰 때문일 것이다.
해넘이 명소답게 변산반도 곳곳에 일몰 포인트가 포진해 있다. 층층한 기암절벽 옆으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는 채석강, 지는 해가 온 바다와 바위를 붉게 물들여 마치 붉은 셀로판지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같은 기분을 선사하는 적벽강이 대표적이고, 워낙 경치가 뛰어나 낙조대를 따로 두고 있는 내변산 월명암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괜찮다. 특히 도청리 솔섬 너머 지는 해를 만날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변산 8경 중 하나라고 했다. 내 경험으로는 적벽강과 모항에서의 일몰이 가장 좋았다.
적벽강에 자리를 잡고 장엄하게 떨어지는 해를 마주하면 문득 하늘은 원래 붉은색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스친다. 층층이 쌓인 7000만 년 세월 위로 붉은 불덩이가 내려앉는 광경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에 가깝다. 이른 봄에 유채꽃이 활짝 필 때면 일몰의 붉은 색과 유채꽃의 노란색이 어우러져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항은 내변산(內邊山)과 외변산이 마주치는 지점의 바닷가에 자연 조성된 자그마한 해수욕장으로, 아담한 백사장과 울창한 松林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곳이다. 모항은 변산반도에서 가장 한적한 해수욕장으로 규모는 작지만 서해의 다른 해변과 달리 물이 빠져 해변이 드러나도 하얀 모래가 가득하고, 해수욕장 곳곳에서 바다낚시와 선상낚시를 즐길 수 있다. 주변에 제주나 해남지역에서만 서식하는 호랑가시나무군락(천연기념물 122) 있다.
모항하면 떠오르는 책이 있다. 박형진이 지은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라는 산문집이다. 이 책은 아직도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변산, 그곳 사람들의 사연 많은 이야기를 모아놓았다. 오징어처럼 질긴 사람이라는 오징어 양반, 외출할 때마다 새하얗게 화장하는 분칠네, 오줌을 마셨다는 박공진 등등 이 책은 변산 사람들의 힘든 삶, 그리고 넉넉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절하고 익살스럽게 들려준다. 또한 찹쌀고추장보다 맛있는 보리고추장, 할머니 등긁개로 만들어 쓰던 옥수수 강치 등 예전의 농사와 먹거리 이야기를 통해 자연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삶의 모습도 그리고 있다.
안도현의 시 ‘모항 가는 길’은 모항을 가장 잘 그린 시로 유명하다.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 밥 먹다가 석 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 중략 -.......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해안드라이브 코스를 위해 변산반도를 찾았다면 변산해수욕장에서 곰소항까지 달려봐야 한다. 모항은 이 구간 중앙에 위치한다. 모항에 이르면 차를 세워두고 청량한 공기 한 줌을 마셔보아야 한다. 그러면 안도현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이미 모항이 내 몸 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다. 적벽강, 채석강을 거쳐 해안드라이브의 아름다움은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변산면 지도에서조차 작은 점에 지나지 않은 모항에 이르면 그 처절한 아름다움에 지나온 기억들을 다 잊게 된다.
2. 내소사 꽃살문양
‘ 사랑으로 아픈 사람은 내소사로 오세요’ 라는 어느 시인의 글귀가 생각났다. 전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길이 일주문에서부터 600미터 가량 이어졌다. 새하얀 눈들을 채 털기도 전에 하늘로 뻗은 모양이 마치 승천을 갈구하는 듯했다. 전나무 숲을 지나면 참하고 고운 중년의 여인 같은 아담한 절이 보였다. 내소사에는 천 년 넘은 나무가 넉넉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천 년이면 참으로 긴 날들인데, 그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것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죽여졌다.
내소사는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능가산 가선봉 기슭에 있다.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_라 칭했다. 내소사 창건 시에는 큰절인 대소래사와 작은 절인 소소래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에 해당된다. 대소래사는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소래사가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다른 절들은 전란 통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내소사만 남았다. 지은 것도 사람이고 불태운 것도 사람인 것을 보면 사람이 참 무서운 존재인 것 같다. 잘 보존된 봉래루 화장실 등 옛 건축물과 근래에 신축한 무설당, 진화사, 범종각, 보종각, 선원, 회승당 등의 건축물이 조화롭게 잘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내세우지 않고 빈터를 두고 어울리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소사는 꽃살문양이 유명하다. 배열과 조각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게 나무를 다루는 장인의 손길이 하늘의 마음을 읽은 듯하다. 긴 세월 동안 자연의 손길이 어루만져 색도 사라지고 나무의 근육이 다 드러났다. 그럼에도 살이 곱다. 문에 새긴 문양도 보물이 되는 걸 내소사에서 처음 알았다.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추는 결구기법으로 조성된 대웅전에는 네 쌍의 문짝에 모두 다른 모양의 꽃살들이 색색으로 새겨져 있다. 이 꽃살창들은 빗살창틀(살을 엇비슷하게 어긋나도록 맞춰서 촘촘히 짜 만든 창틀) 위에 덧붙여진 것들이 아니라 창살 자체에 꽃잎들을 새김하여 조립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단청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색이 지워져 나뭇결만 드러난 상태의 꽃살은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고 정교해 마치 꽃잎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사계절 지지 않는 연꽃, 모란, 국화, 매화가 대웅보전에 한 가득이다. 전내 후불벽에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후불 벽화로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내소사는 조금씩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절이다. 언뜻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절 같지만 가만히 여유를 갖고 보면 그만한 절도 없다. 위용을 자랑할 만한 산세는 아니어도 적당한 높이로 둘러친 능가산은 듬직하다. 뽐내지도 기죽지도 않은 능가산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싼 경내로 들어서면 절 안은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조금씩 높아진다. 두 번째 계단에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만나게 되는 수령 천 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다. 입압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이라 하는데, 당산나무가 절 안으로 들어온 드문 예 중 하나이다. 경내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고려 시대의 동종이 걸린 범종각과 봉래루이다. 보물 제277호인 고려 동종은 종신에 삼존 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봉래루의 주춧돌은 있는 그대로에 꼭 필요한 손질만을 가해 천연덕스럽다. 내소사는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한 장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욱 아름답다.
돌아서 오는 길, 동행한 아이들이 개구쟁이마냥 내게 장난을 걸었다. 마침 폭설이 온 직후라 놀이기구는 그저 눈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눈폭탄을 흠뻑 맞았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는 것, 그저 마음 가는대로 생각하는 것, 그래도 그 마음속에 사악함이 들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겨울 내소사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채석강에 마음 드리우고
날씨가 흐린데다가 밀물이어서 채석강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오는 길에 보니 물이 많아 볼 수 없다하여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행한 이들이 우회했음에도 나는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 쪽으로 하여 채석강에 접근하였다. 희생 없는 대가는 없다는 내 지론 때문이었을까.
채석강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있다. 서해가 호수였던 약 7000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이 파도에 깎이면서 이루어진 해안절벽이 장관이다. 썰물 때면 채석강의 너른 갯바위를 거닐며 그 절경을 가까이서 감상하고 파도가 뚫어놓은 해식동굴도 들어가 볼 수 있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백을 생각하니 저 아름다운 풍경을 시로서 그려 보고 싶은 마음 가득했으나 마음을 따라 가지 못하는 내 솜씨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花間一壺酒 꽃나무 사이에서 술 한 병 놓고
獨酌無相親 친한 이도 없이 홀로 마시네.
擧杯邀明月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 그림자를 마주하니 세 사람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달은 본디 술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르네.
暫伴月將影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行樂須及春 봄날에 즐거움을 누리네.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면 달이 배회하고
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면 그림자 어지럽네.
醒時同交歡 깨어서는 함께 서로 즐기다가
醉後各分散 취한 뒤에는 각자 서로 흩어지네.
永結無情遊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 영원히 맺어
相期邈雲漢 멀리 은하수에서 만날 날 기약하네.
-<月下獨酌 월하독작 1>
이백 음주시의 대표작인 <월하독작>은 모두 4수로 되어 있는데, 이 시는 1수이다. 방랑시인 이백의 이미지를 술과 달보다 더 잘 대변해주는 사물도 없는 것 같다. 민간에서는 이백이 당도의 채석강(采石江)에서 술에 취해 배를 타고 강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다 죽었다고 한다. 채석강은 장강에서 강폭이 제일 좁고 험한 곳으로 강물의 달과 산중의 달이 서로를 비추는 풍경이 그만인 곳이다. 문득 보름 날 밤에 이곳에서 달과 어우러진 바다와 절벽을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백처럼 술에 취해 달에 취해 물에 잠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채석강을 보니 이백이 생각나고 이백을 생각하니 술이 생각났다. 바다와 달이 어우러진 기암절벽 아래서 배 띄우고 술 나눌 수 있으면 나 또한 시인이 되리라. 술은 무엇이어도 좋겠지만 이왕이면 중국의 모태주는 아니어도 우리나라 문배주처럼 맑고 독한 술이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종을 가리지 않는 나지만 굳이 따진다면 흐린 술보다는 맑은 술을 좋아하고, 도수가 낮은 술보다 도수가 높은 술을 좋아한다. 따뜻한 구들막이 아니라면 자연 속에서 마시는 것이 좋고, 큰 잔보다는 작은 잔에 여러 번 나누어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술을 마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과 술을 마시느냐이다. 나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나와 정서가 통하는 사람, 긴 밤을 지새워도 들어줄 말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 그리고 술자리는 술자리로서 족한 사람이 좋다. 어느 세월에 저런 사람 만나 저런 곳에서 저런 술을 마시면서 공감하는 정서를 나누어보겠나.
채석강을 찾은 게 이제 4 번째인가 보다. 10년쯤 전 4월에 어떤 모임에서 가족동반으로 오고, 그 다음해 7월에 동생네 가족들이랑 함께 오고, 그보다 몇 해 전에 홀로 여행 다니던 시절 여름에 왔었다. 겨울에 온 건 이번이 첫 번째인가 보다. 계절마다 느낌이 달랐지만 내게는 유채꽃이 활짝 폈던 어느 해 이른 봄날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갈 때는 다시 오마 하지만 다시 오지 못하는 게 태반인 게 우리네 인생이니 어느 세월 유채꽃 필 때 다시 오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쓸쓸해졌다. 문득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최고의 명기로 이름을 날린 부안 출신 기녀 이매창의 시들이 생각났다. 그녀는 기녀임에도 평생 한 남자만 품고 살았던 여자이다. 짧은 만남 긴 이별에도 님을 잊지 못해하다가 그것이 병이 되어 죽은 여자이다. 죽어 거문고와 함께 묻힌 여자가 바로 이매창이다. 그녀의 그리움에 가슴 아픈 시 몇 수를 보자.
봄이 싫여 병상에 누은 게 아니어
떠나신 그대가 그리워 그렇지 ......
뜬 세상 괴롬은 말하기도 싫다
어쩌지 못하는 건 못 펴는 정(精)이어
-병상음 / 이매창-
봄 오고 그댄 올 길 바이 없고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덧없는 마음
들여다보는 거울엔 먼지가 끼어
거문고 소리만 달 아래 흘러간다
-그대에게 / 이매창-
애끊는 정(精)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에 머리칼이 반(半) 남아 세였고나
생각는 정(精)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님 생각 / 이매창-
누군가를 저토록 그리워하는 여인이 있다면 나 그 여인을 위해 평생을 살아도 좋으리라.
4. 적벽강에 아쉬움을 남기며
혼자가 아닌 일행이 있어 채석강을 서둘러 나오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멀리 적벽강을 바라보았다. 채석강에서 격포해수욕장 건너 백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붉은 암벽의 적벽강이 있다. 적벽강은 채석강과 나란히 하여 있어도 암석색부터 다르다. 둘 다 중생대 백악기 때 퇴적층이기는 하나 퇴적물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놀았다는 적벽강과 흡사하여 그 이름을 본 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적벽강은 채석강 바로 옆에 있는 죽막마을을 경계로 해안 절벽 일대를 가르킨다. 이름 그대로 붉은색 암반과 절벽으로 해안이 이루어져 있어 찬란한 절경을 이룬다. 죽막마을 해변에는 부안 격포리 호박나무 무리가 바람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적벽강은 채석강의 명성에 가려 찾는 이의 수가 채석강만 못하지만 아는 이들은 적벽강을 더 높이 치기도 한다.
변산해변의 절경을 빚어내고 있는 적벽강은 붉은색을 띤 바위와 절벽으로 해안이 이루어져 있어 맑은 물에 붉은색이 영롱하며, 특히 석양 무렵 햇빛을 받아 바위가 진홍색으로 물들 때 장관을 이룬다. 후박나무 군락 앞 해안의 암반층에 형성된 석물상 가운데 어느 것은 여인의 유방 같고, 또 어느 것은 토끼 모양을 하고 있는 등 바위 하나하나가 만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돌아가면 높이가 30m 정도 되는 2개의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그 안에 용굴이라 부르는 50㎡ 면적의 동굴이 있다. 용굴에서 북쪽으로 용두를 돌아가면 검붉은 암벽으로 덮여 있다. 이곳에는 검은색·갈색 등 형형색색의 수석이 깔려 있어 절경을 이룬다.
적벽강에 가면 꼭 들려야 할 곳이 있으니 바로 수성당(水城堂)이다. 수성당은 수성할머니를 바다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고 했다. 아직도 신당 인근 주민들이나 어부들은 해신과 그의 딸 8자매신을 정성껏 모시고 있다고 한다.
일정에 쫓겨 시간에 밀려 적벽강을 눈앞에 두고 떠나려니 마치 긴 세월 헤어져 있던 그리운 이를 곁에 두고 만나지도 못하고 떠나는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가는 버스 속에서 다짐했다. 내 다시 오리라. 그리하여 너를 만나 긴 시간 동안 아름다운 회포를 풀리라.
첫댓글 추억을 읽으니 불현듯 전혜린이 생각납니다.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와서였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