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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2~13)
* 김삿갓의 대필 诗
"과연 명승절지에 名僧이 계시군요. 불초 감히 고명하신 분과 겨룰수야 없습니다만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야 시주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글이라면 그 스님도 뒤지지 않으시는 분이나 가신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셔야 할겁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 스님은 누구든 찾아오는 손님은 글을 알든 모르든글 실력을 시험해 보십니다. 그래서 상대는 안되지만 실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쾌히 대접을 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장으로
후려쳐 쫒아버립니다. 물론 시주께서는 좋은 상대가 되시겠습니다만."
김삿갓은 갈수록 흥미를 느꼈다.
"거참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만약 겨루기를 하여서 지는 편은 이를 뽑혀야 합니다. 아마 그 스님이 비장하고 있는 자루 속에는 뽑은 이가 한말은 넘을 것입니다."
"오 대단한 지고."
김삿갓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짧아 설혹 이를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날밤 김삿갓은 시승 생각에 잠을 제대로 못잤다. 아칙일찍 일어나 조반을 얻어먹고 곧장 입석봉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갈수록 산세는 더욱 험악해졌다. 고개는 가팔랐고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내리는 물소리는 웅장하기 조차 하였다. 삼십리 길이라고 하였지만 오시가 넘을 때까지 절반쯤이나 온듯 했다. 김삿갓은 배가 고팠다. 이른 아침부터 산길을 내처 걸었으니 배가 고플만도 헸다. 더구나 오시도 훨씬 지났지 않은가.
"물이라도 마시고 가야겠구나."
그는 조심조심 계곡쪽으로 내려갔다. 냇가로 내려가는 비탈은 가파르고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돌멩이도 많았다. 간신히 냇가로 나오자 의외로 냇가는 넓었다. 더구나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냇가 벼랑위에 아담한 정자가 있었는데 갓을 쓴 선비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별세상에 들어온 느낌이어서 한동안 김삿갓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 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커니 , 시회를 열고 있나보구나."
김삿갓은 제 정신이 들자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정자쪽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급히 걸었다. 그리고 그는 다짜고짜 정자안으로 올라갔다.
"지나가는 과객입니다만 말석이라도 빌릴수 있을까요 ?"
화선지를 펼쳐놓고 시작(詩作)을 하고 있던 선비들은 웬놈이냐는 듯 김삿갓을 쏘아 보았다.
"당신 글줄이나 지을줄 안다면 어디 끼어보구려. 하지만 글재주 없이 술 잔이나 얻어 먹으려 한다면 딴 데나 가보시오."
노골적으로 하대하는 말씨였다. 하지만 이런정도의 말에는 이미 이골이 난 김삿갓 아니던가.
"그저 책 몇권을 읽었습니다. 보아하니 공짜로 얻어 먹기는 틀린것 같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허 , 무료하던 차에 심심치 않은 구경거리가 생겼군 그래."
좌중에 팔자 수염을 기른 사내가 마치 김삿갓을 장난감으로 생각했는지 이렇게 거들고 나섰다.
"불초가 여러분들의 무료함을 풀어주게 되었다니 천만다행 입니다. 자, 어디 받아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모욕적인 말에도 낯색을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수작을 부렸다.
"운을 떼라는 말이군. 풍월구경을 하긴 한 모양인데 , 누가 운을 한번 붙여보지." 팔자수염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뭐 운이랄 것까지야 있겠소. 그저 생각나는대로 한번 읊어 보라고 하시오."
누군가 김삿갓을 얕잡아 보고 말을 하였다.
"보시다시피 불초는 워낙 불학무식한 놈이어서 막연히 글을 지을수는 없습니다.
글제라도 말씀하시면 억지로라도 뜯어맞춰 보겠습니다."
"그럼 금강산의 절경을 읊어보시오. 구경 좀 해봅시다."
"해보겠습니다만 불초가 글을 제대로 쓸줄 모릅니다. 하오니 어느 분께서 대필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친김에 김삿갓은 바보행세를 하였다.
"허허, 세상 살자니 별일을 다 보겠구먼. 그래 글씨도 쓸줄 모르면서 어떻게 시를 짓는단 말인가 ?
이거야 말로 기상천외한 일이로군. 좋소 , 내가 대필을 할터이니 어서 불러 보시오." 얼굴이 동그런 선비가 별꼴을 다 보았다는 듯 무릅까지 치면서 붓을 들었다.
"그럼 부르겠습니다. 소나무란 글자를 두자 쓰십시오.
김삿갓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소나무 송(松)자를 두자 쓰라는군. 松松이라 ..자 썼소."
"다음에는 잣나무란 글자를 두자 쓰시오."
"잣나무 백자로군. 栢栢이라..썼소."
"그러면 그 뒤로 바위라는 글자를 두자 적어주시오."
"바위 암 자로군..岩岩이라 썼소."
"끝에다 돌다라는 글자를 붙여주시오."
"돌회라 .. 廻라 썼소."
이쯤되자 좌중의 선비들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침들을 꼴깍꼴깍 삼키며 글이 이루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는 행을 바꾸어 물이란 글자를 두자 쓰시오."
"물 수(水)자 두자라고 ? 水水 썼소."
"다음으론 산이란자를 두자 쓰시오."
"묏 산자라 , 山山 썼소."
"그럼 곳곳이라는 글자를 두자 써주시오."
"곳처라는 글자군, 处处라고 썼소."
"끝에다 왜 기이하다고 할때 쓰는자 있지요? 그자를 한자 써주시오."
"이상할 기자로군.奇라 썼소."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끝났으니, 붙여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비들은 김삿갓이 부르는대로 옮겨적은 화선지의 조합된 글을 보고 깜짝놀랐다.
"세상에 이럴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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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3)
* 우뚝솟은 金刚山
松松栢栢岩岩廻 , 水水山山处处奇
(송송백백암암회 , 수수산산처처기)
<소나무 잣나무 바위가 돌고돌아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허 ..이거 천하의 명시일쎄 ! "
선비들은 글을 읊조리고 나서 무릅을 치며 감탄했다.
그들은 이미 금강산을 두고 읊은 수 많은 시를 많이 보아온 터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쉬운 글자만 사용하여 딱 두줄로 간결하게 적은 것은 처음이다.
"허어, 금강산의 경치를 이렇듯 쉽게 나타내는 방법도 있었구먼."
누군가는 탄식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은 금강산 곳곳의 절경 앞에 할말을 잊고, 이것을 글로 옮길 적당한 문구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이 초라한 나그네는 물 흐르듯이 쉬운글자로 술술 읊어버리니 감탄만이 나올 뿐이었다.
"아니 이런 재주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어찌 그토록 시침을 떼셨습니까 ? 우리가 그간 실례가 많았습니다.
과히 섭섭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뽐낸다고 이 주제꼴에 빛나겠습니까 ?
칭찬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선비들은 하인을 부르더니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술상을 차려 김삿갓을 상좌에 앉혔다.
"자, 드십시다. 거 볼수록 수작(秀作) 이로군"
김삿갓은 배불리 먹고 마셨다. 마신 술이 얼큰하게 올라오자 세상살이 사람의 일생이 한낮의 일장춘몽으로 여겨졌다.
"선비양반 , 이제 취향이 도도하시니 한수 더 들려주십시오. 귀를 씼고 기다리겠습니다."
김삿갓의 구술을 받아 적던 선비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하자 나머지 선비들의 이목이 김삿갓을 향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어떤 시가 나올까 기대 하면서 김삿갓의 거동을 주시한다.
"원 귀까지 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처럼 대접을 잘 받았으니 감사의 뜻으로, 한수 더 읊어보겠습니다."
김삿갓은 성큼 붓을 잡고 쓸줄 모른다는 글씨를 달필로 청산의 유수가 흐르듯이 쓱싹 휘갈기는데 ..
태산재후 천무북
(泰山在后 天无北)
대해당전 지진동
(大海当前 地尽东)
교하 동서남북로
(橋下 东西南北路)
장두 일만이천봉
(杖头 一万二千峰)
<큰 산이 뒤에 있으니 하늘은 북(北)이 없고 큰 바다가 앞에 있으니 땅은 동쪽에서 끝났도다>
<다리 아래로는 동서남북 길이 뻣어있고 지팡이 든 머리에는 일만이천봉이 걸렸도다.>
"명시로다 ,명시야 ..오늘 우리들이 운이 좋아 诗神을 만났구려."
좌중은 모두 넋을 잃고 있었다. 诗도 诗려니와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김삿갓의 재주가 더욱 놀라웠다.
술김에 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다시 한수를 읊고 싶었다.
"이번에는 五言 시를 지어보겠습니다."
선비들은 다시 긴장했다. 자기들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시 한줄 못 이루고 쩔쩔매고 있었는데 남루한 차림에 삿갓을 쓰고 불현듯 나타난 젊은선비는 그대로 시신이요 천재였다.
김삿갓은 다시 필을 들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자를 휘갈겼다.
촉촉 금강산은, 고봉이 만이천봉이라 (矗矗金刚山 , 高峰万二千 )
수래 평지망 이나, 삼야숙청천이라 (遂来平地望 , 三夜宿靑天 )
<우뚝우뚝 솟은 금강산은 높은 봉우리가 일만이천이라>
<평지를 바라보고 내려왔건만 사흘밤을 청천에서 잠이들었네.>
"허 , 또 .. 기가막히군."선비들은
다시 무릅을 치며 감탄했다.
"처음에 두 줄은 평범하더니 끝에 두줄에 삼야숙 청천이라, 이거 사람 미칠 노릇이군." 한 선비가 김삿갓의
화선지를 들고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젖는다.
김삿갓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마셨으니 볼일은 끝이 났고 진짜 볼일을 보러 가야만 했다.
"아니 어찌 일어서시오 ?"
선비들이 깜짝 놀라며 김삿갓을 붙잡았다.
"어줍쟎은 글 덕에 잘먹고 갑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요."
김삿갓은 그 자리를 미련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곤 시승이 있다는 입석봉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했다.
~~14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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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4~15)
* 立石峰 仙僧
입석봉은 글자가 말해주듯 깎아지른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은 짐승의 형상을 한것도 있지만 발돋움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상도 있었다.
"가히 만물상이로군 " 김삿갓의 입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헌데 시승은 어디에 살고있단 말인가 ?"
그는 바위 천지인 봉우리 아래쪽을 훑어 보았다. 시선이 머무르는 한 곳이 있었는데, 둥그스런 큰 바위 아래로 노송 가지가 휘늘어진 밑에 초막같은 암자가 빼꼼히 보이는 것이다.
김삿갓은 지체없이 그쪽으로 바삐 걸었다. 길은 바위사이로 나있는 사람이 발로 밟은 자욱이 있는 구불구불 바위 사이 길로, 자칫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면 송곳 같은 바위끝에 뼈가 으스러질 판으로 보였다. "자기가 무슨 은둔거사라고 이런 곳에 암자를 지었담" 김삿갓은 저절로 불평이 나왔다. 그러면서 아슬아슬 훠이훠이 땀 흘려가며 바위사이 비탈길을 내려와, 암자밑에 다다르자 신기하게도 딴판으로 평지가 나타났다. "허, 집터 한번 잘 잡았다."
이번에는 감탄이 나왔다. 뉘라서 이 높은 바위산 중턱에 평지가 있으리라 짐작인들 하겠나?
그러고보니 저 암자 속에서 시나 읊고 있을 노승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서 부터 암자까지는 싸리나무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길이 통로 구실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소로를 따라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않은 법당이 있었는데 법당 가운데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중이 보였다. 김삿갓은 저 중이 바로 그 글잘하는 시승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갔다.
늙은 중은 조용히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김삿갓은 한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그를 불렀다.
"스님 ... ! " 불경소리가 멋었다.
"뉘시오 ?"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고개는 여전히 숙인채였다.
"스님의 공부를 방해 한것 같아 대단히 죄송 합니다. 불초는 입성봉 밑을 지나는 과객 입니다."
"그럼 어찌 여기는 왔소 ?"
중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채 대꾸를 하였다.
"바위의 형상이 가히 만물상이라 절경에 심취하여 발길을 옮기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허허 , 그럴리가 있나 "
김삿갓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자기의 말이 꾸며낸 것임을 이 늙은 중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이 다시 말했다.
"혹시 딴 생각을 하고 오시지 않았소 ?"
"딴 생각 이라뇨 ?"
김삿갓은 자기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는 이 늙은 중을 다시금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다.
"방금 시주가 과객이라고 하지않았소 ? 적어도 자신을 과객이라 칭하려면 诗文에 능해야 할것 이니 과객은 시문에 통달 하였다는 말씀이 아니오 ?"
" ... "
김삿갓은 대답에 머뭇 거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후 입을 열었다.
"둔재의 몸으로 어찌 시문에 통달 하였다 말씀드리겠습니까, 다만 면무식을 면했다 여깁니다."
"겸손의 말씀이군"
"아니올시다. 실은 스님께서 시에 능하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을까 하여 찾아 왔습니다."
"하하하하 , 그럼 그렇지 ! "
늙은 중은 자기의 생각이 적중하여 기쁘다는 듯이 비로소 너털 웃음을 웃으며 김삿갓을 향해 돌아 앉았다."
김삿갓은 그의 얼굴을 보고 순간 다시금 감탄했다. 짧은 머리는 그대로 백발이었고 눈썹역시 하얗게 세었는데 그 아래 자리잡은 두 눈은 가을 호수처럼 맑으면서도 형형한 빛을 내쏘고 있었으니 , 늙은 중은 가히 仙风道骨의 풍채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 빈승에게 가르침을 받겠다고 ? 보시오 . 젊은 시주 , 왜 시를 한번 겨루어 보겠다고 솔직히 말 못하고 어물쩡하는게요 , 그야 이 늙은이를 대접하느라 그렇게 말 했으리라 알고는 있소만."
"외람되게 견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도해 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헌데, 빈승은 한 가지 괴퍅한 성질이 있습니다. 그 말도 시주께서는 들으셨소 ?"
올커니, 이 뽑는 이야기구나. 김삿갓은 그의 말뜻을 알아 차렸으나 내색을 하지않고 물었다.
"무슨 말씀 이신지요 ?"
"그럼 아직도 모르고 계신가 ? 우리 시를 주고 받는 내기를 함에 있어 한가지 약속을 하고 싶은데 , 그것은 어느 편이든 막히는 쪽은 진것으로 하되 진 죄로 이를 하나 뽑기로 합시다."
"당연한 말씀 입니다. 그 옛날 이백(李白)도 춘강(春江) 도리지원 (桃李之园)에서 시회를 베풀며 시불성(诗不成) 이면 주삼배(酒三杯)라 하여 벌주 세잔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
응당 벌을 받음이 옳을 것 입니다."
"하하하 ..과연 시주는 빈승과 좋은 상대가 될것 같소. 그럼 어서 이리로 올라오시오."
김삿갓은 법당 위로 올라가 늙은 중과 맞대고 정좌했다.
"빈승이 먼저 읊어갈 터이니 시주는 뒷글을 맞춰 주시오. 빈승이 더이상 부르지 못하거나 시주가 댓귀를 짓지 못하면 지는 것으로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작 합시다."
늙은 중은 법당의 천정을 바라보며 이윽고 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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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5)
* 诗僧(허공)과의 问答
노승 .. 조등입석 운생족
(朝登立石 云生足)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면 구름이 발 밑에서 일어나고>
삿갓 .. 모음황천 월괘순
(暮飮黃泉 月掛脣)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도다.>
노승 .. 간송남와 지북풍
(澗松南臥 知北风)
<물가의 소나무가 남쪽으로 엎드려 있으니 북풍이 주는 것을 알겠고>
삿갓 .. 헌죽동경 각일서
(軒竹东頃 觉日西)
<마루의 대나무 그림자가 동쪽으로 기우니 날 저무는 것을 알겠노라.>
노승 .. 절벽수위 화소립
(絶壁雖危 花笑立)
<절벽은 비록 위태로우나 꽃은 웃으며 피어나 있고>
삿갓 .. 양춘최호 조제귀
(阳春最好 鸟啼归)
<따듯한 봄볕 제일 좋은 때련만 새는 울며 돌아가네.>
노승 .. 천상백운 명일우
(天上白云 明日雨)
<하늘의 흰구름은 내일의 비가 될 조짐이요>
삿갓 .. 암간낙엽 거년추
(岩间落叶 去年秋)
<바위틈에 떨어진 낙엽은 지난 가을의 흔적이네.>
노승 .. 양성작배 기유일 최길
(兩姓作配 己酉日 崔吉)
<양성의 혼사일은 기유일이 제일 좋고>
삿갓 .. 반야생손 해자시 난분
(半夜生孙 亥子时 难分)
<밤중에 애를 낳으려면 해자시가 어렵도다.>
노승 .. 영침녹수 의무습
(影侵綠水 衣无濕)
<그림자는 녹수에 젖었으나 옷은 젖지 아니하고>
삿갓 .. 몽답청산 각불고
(夢踏靑山 脚不苦)
<꿈결에 청산을 거닐었으나 다리는 아프지 않도다.>
노승 .. 군아영리 천호가
(群鴉影裏 千戶家)
<무리진 갈가마귀 그림자 속에 천호의 저녁이 저물고>
삿갓 .. 일안성중 사해추
(一雁声中 四海秋)
<외기러기 울음소리에 사해(세상천지)는 가을임을 알리네.>
노승 .. 가승목절 월영헌
(假僧木折 月影軒)
<가중나무 가지가 부러져 달그림자가 추녀끝에 어른거리고>
삿갓 .. 진부채미 산임춘
(真婦菜美 山姙春)
<참며느리 나물이 제맛이 든것 보니 산이 봄을 머금었도다.>
노승 .. 석전천년 방도지
(石转千年 方到地)
<산위에 돌은 천년을 굴러야 땅에 이를 듯하고>
삿갓 .. 봉고일척 감마천
(峰高一尺 敢摩天)
<높은 봉우리는 한 자만 더하면 하늘을 찌를듯 하도다.>
노승 ..청산매득 운공득
(靑山买得 云空得)
<청산을 사니 구름은 절로 얻은 셈이요>
삿갓 .. 백수임래 어자래
(白水臨来 鱼自来)
<백수에 다다르니 물고기는 절로 오도다.>
노승 ..추운만리 어린백
(秋云万里 鱼鱗白)
<가을 구름이 만리에 뻗쳤으니 고기 비늘처럼 하얗고>
삿갓 .. 고목천년 녹각고
(枯木千年 鹿角高)
<천년 묵은 고목은 사슴뿔 인양 높구나.>
노승 .. 운종초아 두상기
(云从樵兒 頭头上起)
<구름은 나뭇군 아이놈의 머리위에서 일고>
삿갓 .. 산입표아 수중명
(山入嫖娥 手中鸣)
<산은 빨래하는 계집의 방망이 소리에 울더라.>
노승 .. 등산 조래갱
(登山 鸟来羹)
<산에 오르니 새들이 쑥국쑥국하며 울고>
삿갓 .. 임해 어처병
(临海 魚萋餠)
<바다에 가니 물고기가 풀떡풀떡 뛰더라.>
노승 .. 수작은저 춘절벽
(水作銀杵 春絶壁)
<물은 은 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삿갓 .. 운위옥척 도청산
(云为玉尺 度靑山)
<구름은 옥자가 되어 청산을 재는구나.>
노승 .. 월백설백 천지백 (月白雪白 天地白)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니 천지가 모두 희고>
삿갓 .. 산심야심 객수심
(山深夜深 客愁深)
<산도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의 수심도 깊도다.>
~~16회로~~~
●방랑시인 김삿갓(16~17)
* 김삿갓의 고백
김삿갓 ,노승(허공)과의 문답으로 어느덧 밤이 깊었건만 두 사람의 부르고 쫒는 시 짓기는 그침이 없었다.
노승이 부르면 김삿갓이 즉석에서 받고, 삿갓이 받으면 노승이 이내 불렀다.
부르는데도 막힘이 없으려니와 쫒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노승은 김삿갓의 뛰어난 실력에 내심 크게 탄복 하였다.
이것은 김삿갓도 다르지 않아 노승의 실력에 내심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 한다면 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것 같았다.
"어허 , 내 평생 가장 뛰어난 시재(诗才)를 만났구료. 더구나 젊은 나이에 이토록 무궁한 시상 (诗想)을 가지고 있다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오."
노승이 이렇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소생 금일에야 시선(诗仙)을 만나 뵈온듯 합니다.
대사님을 존경한다는 말씀밖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 시선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외다. 내 칠십 평생에 수 많은 시객을 만났으나 진실로 탄복하기는 처음이요. 오늘 내기는 이 빈승이 진것으로 합시다."
김삿갓은 펄쩍 뛰었다.
"대사님 솔직히 말씀드려 오늘밤 겨루기는 승패가 없는줄 압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는 판단이고 실은 불초가 굴복하였습니다. 왜그런고 하면, 불초 비록 용자(用字)에 능해 대사님의 부름에 쫒았다 할지라도 그건 한갖 재주에 불과할 뿐 그 속에는 심오한 뜻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사님의 시 속에는 평범함 속에 오묘한 뜻이 서려있으니 어찌 이 미천한 불초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겠습니까. 대사님 앞에 무릅을 꿇습니다." 김삿갓은 진정 겸허한 인사말을 하였지만 이 노승을 높게 우러러 모시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누가 뭐라 하여도 이 노승의 시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다.
"허허허, 빈승이 이겼다고요 ? 대체 그런 예의가 어디 있습니까 ? 빈승은 나이를 먹었으나 결국 나이값도 못하고 시주의 기도 꺾지 못했으니 빈승이 진것 입니다. 백중세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 입니다. 늙은이 대접 하느라고 이겼다고 하지 마십시오. 시주는 정말 대성할 분입니다. 헌데 어떡한다 ?" 갑자기 노승은 정색을 하고 김삿갓을 바라본다.
"무슨 말씀 이십니까 ? "
김삿갓은 영문을 몰라 노승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우리 처음에 약속을 하였잖습니까. 지는 쪽이 이를 뽑혀야 한다고, 헌데 빈승은 나이를 먹어 뽑을 이가 없으니 어떻게 약속을 지켜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삿갓은 빙그레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이를 뽑힐 사람은 불초이온데 하물며 대사님의 이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후학을 너그럽게 보살펴 주시니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며 노승을 위로하였다.
"하하하, 고맙소 오늘처럼 즐거움을 맛보기는 칠십평생 처음이오. 나무관세움보살." 노승은 합장을 하면서 김삿갓에게 일예를 보냈다.
두 사람은 십년지기 처럼 갑자기 친숙해졌다.
김삿갓은 노승을 진정 마음속 깊이 스승처럼 존경하였고 노승은 젊은 시인을 둘도 없는 제자처럼 사랑했다. 두 사람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시를 논하고 천하의 경륜을 논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두 사람은 의기가 부합되었다.
결국 김삿갓은 한여름을 노승과 더불어 지내게 되었다.
시를 지어 주고받는 사이에 여름이 무르익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글쎄 행색은 거지나 다름없는 젊은 과객이 입석봉 늙은 스님의 콧대를 꺾어 놓았다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노승과 김삿갓의 일은 사미승 밖엔 알수 없는 일이었건만 , 금강산 일대에 산재한 절과 인가에 이러한 말이 널리 퍼졌다. 말이란 한 사람만 건너가도 커지기 마련인가 ? 급기야는 늙은 중이 젊은 과객 앞에서 무릅을 꿇었다느니, 젊은 과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다는등 ..별의별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렇게 김삿갓의 이름은 어느새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떠도는 말이야 어찌되었든 김삿갓은 노승을 깎듯이 섬기었다.
스승으로서의 존경의 선을 넘어 일종의 부정(父情) 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노승에게 자기의 내력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는 노승을 신뢰하고 있었다.
"오 그렇던가. 이제야 하는 말이네만 내 자네를가까이 두고 보면서 뼈대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네. 아무튼 비극일세."
"나무관세움보살."
김삿갓의 집안 내력을 듣고난 노승은 눈을 감은채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묵상에 잠겨 있었다.
"대사님 ! "
김삿갓은 자신의 내력을 털어놓고 나자 천만감회가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좀 해야 속이 풀릴것 같아 노승을 불렀다.
노승은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대사님 불초에게 떨어진 기구한 운명은 어떻게 생각하면 전생의 업보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같은 운명을 맞기도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맞이하여 헤쳐 나가는 길은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어 집을 떠난 것입니다. 요즈음은 대사님 곁에서 즐거운 나날을 맞이하니 문득 불초도 불문에 입문하여 인간의 고해(苦海)를 건너가고 싶은 생각이 솟아 나는군요."
김삿갓은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았다. 노승이 인도만 하여 준다면 그의 제자가 되어 삭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승은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불문에 귀의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자네에게는 시가 있으니까. 시는 자네의 슬픔을 위로하고 마음의 갈등을 진정시켜 줄것 이니까. 또 자네 삶이 어려울때 밝은 빛을 비쳐 줄 것이네. 노승은 김삿갓의 시를 높이 사고 있는 터라 그의 불문의 귀의를 만류하였다.
어느덧 김삿갓이 입석암에 머문 지도 달포가 넘었다. 계절은 늦은 여름 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가을 기운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외출했던 노승이 돌아오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 술생각이 간절하지 ? 늙은 중과 같이 있자니 먹고 싶은 술도 못 먹고 꾹꾹 참고 있으려니 갈등이 여간 아닐걸세."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말하는 노승의 얼굴을 김삿갓은 의아스럽게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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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7)
*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도 박정해서, 봄날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대사님 , 갑자기 술 이야기는 어째서 하십니까 ? " 사실 술 생각이 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입석암을 훌쩍 떠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돌연 노승이 술 이야기를 꺼내자 마치 잊고 있었던 정든 여인의 이름을 듣는것 같아았다.
그러나 어째서 갑자기 술 이야기를 거내 놓는지 노승의 마음이 궁금했다.
"허허허 , 난 자네의 마음 속을 환히 알고 있네. 중이 되어가지고 자네에게 술 대접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마침 자네가 술을 실컷 마실 좋은 일이 생겼네."
김삿갓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수 없었다.
"입석봉 동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그럴듯한 절이 하나 있네. 내 지금 그 곁을 지나왔는데 천하에 내노라 하는 시객들이 모여 시회를 열고 있더구먼. 자네 심심할 것이니 거길 다녀오게 맛있는 술이 생길걸세. 그렇다고 너무 취해 돌아오진 말고."
김삿갓은 비로소 노승의 말을 알아 들었다.
"예. 시회가 열렸다면 구경을 가야지요. 얼마나 쟁쟁한 시객들이 모였는가 궁금합니다."
"이사람, 시객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술이 궁금하겠지 ? "
두사람은 너털 웃음을 웃었다.
"어서 다녀 오게나."
"예,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술도 술이지만 시회를 열고있는 시객들의 수준이 더욱 궁금하였다. 그는 가파른 길을 조심하면서 입석봉 기슭에서 동편으로 휘돌았다.
노송이 우거진 가운데로 제법 큰절이 보였다. 절 입구 시내위로 누각이 올라서 있는데 선비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김삿갓은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누각 아래로는 근처 아낙네들 인듯 서너 여인들이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허허, 호화판 시회로구나."
김삿갓은 공연히 신명이 났다. 누가 아는체도 하지 않는데 그는 성큼 누각위로 올라갔다.
"뉘시오 ? "
시객들은 불쑥 나타난 김삿갓을 힐끔 쳐다 보았고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예, 천하의 고명하신 분들께서 시회를 열고 계시다기에 구경차 왔소이다. 물리치지 마십시오."
선비들은 삿갓을 쓰고 차림새가 허술하여 혹 강호를 떠돌며 어설픈 글로 술이나 빌어먹는 그런 부류로 알았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이 젊은 과객에서는 냉큼 얕볼수 없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아 감히 물러가라는 말을 못했다.
선비들은 마냥 외면을 하였다.
김삿갓은 물러가라는 말이 없자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시를 가다듬고 있는 시제를 보니 가을이었다.
허허, 벌써 가을이던가 ?
김삿갓은 먼 산봉우리를 쳐다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칠월 하순. 평지 같으면 노염(老炎)이 기승을 부릴 때 인데 이곳은 지대가 높은 산중이다 보니 벌써 찬서리가 내린 듯 ,먼 봉우리 중턱이 붉으스럼하게 보인다.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삿갓의 가슴에는 가을에 대한 시상과 더불어 천만가지 감회가 아련히 깔렸다. 이런 김삿갓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선비들이 자기들 끼리 수근거린다.
"보아하니 사이비 과객은 아닌듯 하니 글을 한번 지어보라고 하면 어떠하오 ? 듣자하니 입석봉 시승을 이겼다는 젊은 과객도 삿갓을 쓰고 다닌다고 하는데 저 사람이 장본인인줄 뉘 알겠소 ?"
"그 삿갓을 쓴 과객은 지금 입석암에 눌러 있으면서 노승과 더불어 시선(诗仙)의 경지를 즐기고 있다는데 여기에 나타날 일이 있겠소 ?"
"하지만 저 사람 거동으로 보아하니 뭐가 나올법도 하니 글제를 주어 봅시다."
선비들은 구수회의 하듯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후 한사람이 김삿갓에게 말을 던졌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시상을 가다듬고 있는것 같은데 한수 지어 보겠소 ? "
김삿갓은 그렇지 않아도 시를 읊조리고 있던 차였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 불초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글제는요 ? "
"푸르던 나무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으니 이제 머지않아 낙옆이 짙게 되지 않겠소 .
떨어지는 잎을 보고 한수 지어보소. "
"예"
김삿갓은 간단히 대답했지만 이미 머리속에서는 어느새 한편의 시가 무르익었다.
"그럼 지필을 좀 빌려주실까요 ? "
"옛수 ! "
한 사람이 화선지와 붓을 내주었다. 김삿갓은 필을 들기 무섭게 싯귀를 죽죽 써내려갔다.
소소슬슬 우제제. 매산매곡 혹몰계
(蔬蔬瑟瑟 又斉斉. 埋山埋谷 惑沒溪 )
<낙엽이 쓸쓸히 휘날려. 산에도 계곡에도 시내에도 떨어지네>
여조이비 환상하. 수풍지자 각동서
(如鸟以飞 还上下. 隨风之自 各东西 )
<새가 나는 듯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바람에 휩슬려 사방으로 흩어지네>
녹기본색 황유병. 상시구록 우갱처
(綠其本色 黃猶病. 霜是仇綠雨更凄
)
<푸른것은 나무의 본 얼굴이고 누런 것은 병색이라. 서리도 원수이지만 가을비는 더더욱 처절 하구나>
<두자이하 정박물. 일생하위 낙화제
(杜子爾何 情薄物. 一生何为 落花啼 )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 박정해서. 일생을 봄 날에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18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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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8~19)
* 立石岩 老僧과의 작별
마지막 글자가 붓끝에서 떨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좌중의 시객들은 숨을 헉하고 쉬었다.
순식간에 싯귀를 써내려가는 재주도 비상하였지만 화선지 위에서 용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서체며 그 글자들이 토해내고 있는 뜻들은 천하의 일품이었다.
장내는 시감에 몰입되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한 시객이 무릅을 치며 입을 열었다. "기가 막히군. 대체 이런 글이 단숨에 나올수 있단말인가."
이 말을 신호로 시객들이 다투어 김삿갓을 칭찬했다.
그중 한 사람이 김삿갓을 요모조모 띁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선 혹시 입석암 시승과 다투어 이겼다는 바로 그 김삿갓이 아니시오 ? "
김삿갓은 빙그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가 바로 김삿갓 올시다. 지금은 입석암 대사에게서 글공부 가르침을 받고있지요."
"허허 , 이거 뜻하지 않게 고명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무한의 영광이로소이다." 시객들은 김삿갓을 상좌로 모셨다. 모두들 기쁜 표정이었다.
술상이 지체없이 나왔다. 김삿갓은 술잔을 사양하지 않았다.
비록 시인이 아닐지라도 초가을 금강산의 미칠것 같은 이 풍치를 보면서 어찌 술을 사양할 수 있으랴.
김삿갓은 술 좋고 안주 좋아 두주를 불사하고 마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술을 마실수록 외로움과 막연한 그리움이 전신을 휩쌌다.
"선생 , 청컨데 한수만 더 보여주십시요. 시를 즐기고 배우는 우리들은 삼가 귀감으로 삼겠습니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붓을 들었다. 사실인즉 그들을 위해 시를 읊는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시를 읊었다.
장하거연 근소추. 탈건포말 보사루
(长夏居然 近素秋. 脫巾抛襪 步寺楼)
<긴긴 여름 물러나고 가을이 다가와 . 건을 벗고 맨발로 절간을 거니네 >
파성통야 순장적 . 알색화연 요옥부
( 波通野 巡墻适 . 알色和煙 繞屋浮 )
<시냇물은 졸졸 담을 끼고 감돌고. 아지랑이 빛은 연기와 함께 집에 자욱이 퍼지네>
주도공허 생폐갈. 시유여채 상미수
(酒到处空 生肺喝 . 诗猶余債 上眉愁 )
<술을 다 마시고 빈병만 남으니 갈증만 더하고. 시만 자꾸 생각하니 수심만 맺혀지네>
여군분수 파초우. 응상귀가 일몽유
( 与君分手 芭蕉雨. 應相归家 一夢幽 )
<그대와 파초잎에 비내리는 이곳에서 작별을하면. 집에 돌아가서도 꿈속에 그리울 걸세.>
김삿갓은 이렇게 시를 써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수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깊어져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발길이 닿는대로 바위를 기어오르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산길을 미친듯이 헤매다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입석암으로 돌아왔다.
"꽤 늦었네 그려"
노승은 법당에서 그를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사님 , 산길을 좀 걸었습니다."
"그래 시회는 볼만 하던가 ? "
"술 몇잔에 제 시만 두어수 뺐기고 왔습니다."
"하하 그럴테지. 자네 시를 보고 모두 오금을 펴지 못했겠지 .. 헌데 술을 마신 사람같지 않구먼."
" 산길을 짐승처럼 헤매다 보니 어느새 다 깨어버렸군요."
노승은 김삿갓의 심중을 헤아리는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또 보름이 지나 추석도 지났다. 김삿갓은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불문에 귀이할 것도 아니면서 더이상 무료한 세월을 보내며 노승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그는 자기의 생각을 노승에게 전했다.
노승은 묵묵히 앉아 있더니 다음과 같이 시 한수를 지었다.
백척단암 계수하 . 자문구불 향인개 (百尺丹岩 桂樹下. 紫门久不 向人开)
<백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싸리문은 오랫동안 닫혀 찾는 사람이 없네>
금조홀우 시선과. 환학간암 걸구래
(今朝忽遇 诗仙过. 喚鹤看庵 乞句来 )
<오늘 아침 홀연히 지나가는 시선을 만났으니. 타고가는 학을 불러 암자로 그를 청해 불렀다네.>
이별을 아쉬워 하는 노승의 김삿갓을 뜨겁게 사랑하는 시였다. 김삿갓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필을 들어 시를지어 노승에게 건넸다.
촉촉첨첨 괴괴기. 인선신불 공감의 (矗矗尖尖 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
<꼿꼿하고 뾰족하고 기이함이 더욱 신비해서. 시선도 부처님도 신령님도 깜짝 놀라네>
평생시위 금강석. 급도금강 불감시 (平生诗为 金刚惜. 及到金剛不敢诗
)
<평생 소원은 금강산을 읊으리라 별러 왔는데. 막상 금강산을 대하니 시가 나오지 않도다.>
"역시 명시야 . 자네 떠난 후로도 몸조심하게."
"예, 발길이 닿으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날 노승과 점심상을 마주 대하고 석별의 정을 나눈후 김삿갓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입석암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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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9)
* 구름따라 발길따라
立石峰을 떠난 김삿갓은 한동안 시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떠나오긴 했으나 막상 갈 곳을 정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짜증이 날법도 했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제 다시 올줄 모르는 금강산이니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나가 바다 경치나 구경하자.
그 길로 북상하면 함경도 땅이 나오겠지."
내금강 곳곳을 돌아다니고 나니 어느새 구월 초순이 되었다.
산속에 가을은 빨리와서 벌써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도 눈에 띄었다.
김삿갓은 먹고 자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골마다 암자요. 절이 있었다.
간간히 풍류를 즐기는 시객도 있어 그는 술에 목마르지 않았고 밥 한 술에 배고프지 않았다.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금강 까지는 백여리가 된다고 했지만 가늠할수는 없었다. 그저 마냥 걷고 목마르면 냇가에 물을 마시고, 날이 저물면 암자나 절을 찾으면 그뿐이었다.
어느 감나무가 울창한 산골마을에 이르렀다. 산중에서 오랬만에 보는 동네였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김삿갓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마을로 들어섰다.
산골마을이라 돌담이 아니면 싸리나무 울타리였다. 밤은 벌써 다 털려 빈 가지만 남았는데, 집집마다 감나무는 감을 잔뜩 매달고 휘늘어져 있었다.
김삿갓은 무심코 어느 돌담길을 휘돌다가 우연히 돌담 너머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곳에는 국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순간 김삿갓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국화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국화꽃 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처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처녀는 열여덟,아홉이나 되었을까 , 삼단같은 머리가 탐스러운 엉덩이 위까지 치렁치렁 내려뜨려져 있는데 겨드랑이 부근의 살이 터질듯이 불거져 나와 있었다.
김삿갓은 부지중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처녀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수 없음이 자못 안타까웠다. 그는 돌을 던져서라도 처녀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뿐으로 얼굴을 더욱 담곁으로 바싹 붙이고 열심히 처녀의 자태를 감상하였다.
집을 떠나온지 어언 반년 , 한창 혈기가 들끓는 청춘은 그녀 쪽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김삿갓은 오랬동안 잊고 있었던 춘정이 샘솟았다. 숨결이 더워지고 심장조차 쿵쿵 뛰었다.
그는 어느새 애타는 자기의 가슴을 시로 읊조리고 있었다.
산중처녀 대여양, 완착분홍 단포상 (山中处女 大如, 緩着粉紅 短布赏)
<시집갈 때 다 된듯 무르익은 산중처녀,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구나>
적각창랑 수과객, 송리심원 농화향
(赤脚창랑 羞過过客 / 松离深院 弄花香)
<살색 좋은 통통한 다리는 과객을 부끄러워 하고 / 소나무 울밑 으슥한 곳에서 꽃향기를 희롱하네.>
김삿갓은 집을 떠나오기전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가 생각났다.
그리곤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돌려 돌담을 외면했다.
"지금쯤 아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 ..
막연한 걱정과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계속했다.
이렇게 몇 고개를 넘다보니 멀리서나마 바다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벌써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선 잠잘 곳이 급하게 되었다. 그는 인가를 찾았다.
지세를 보아 마을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산중에 홀로 있을수는 없었다.
한고개를 다시 넘었다. 주위는 벌써 어둠에 묻히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김삿갓은 서너호의 화전민 부락을 발견하였다. 우선 마음이 놓였다.
처마가 땅에 닿을듯한 토담집들이었다. 그는 한 집을 찾았다.
"주인장 계십니까 ? "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허스름한 차림의 사나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굴 찾으시는지요 ? "
"과객이 날이 저물어 염치없이 찾아 왔습니다. 부엌도 좋으니 그저 산짐승의 해나 면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손님 누추하지만 들어가십시다. 아무리 단칸방이라지만 이렇게 찾아오신 손님을 부엌으로 모실수야 있겠습니까 ? "
역시 가난한 사람일수록 인정만은 따듯했다.
김삿갓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공기는 매우 탁했다.
"손님 저녁 진지 드셔야지요. 저희도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산골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살기 때문에 대접이 변변치 못합니다."
김삿갓은 미안하여 안절부절 하였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거 너무 염치가 없군요.
그러면서 삿갓을 벗어 한쪽 구석에 놓았다.
이집도 식구래야 두 내외 뿐이었다. 부인이 저녁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조에다 감자를 섞은 밥이었다. 그동안 절간을 다니며 신세를 졌던 터라 하얀 쌀밥이나 보리가 반쯤 섞인 밥을 먹던 입맛이라 들여온 밥은 매우 껄끄러웠으나 주인 내외의 따스한 인정이 너무 훈훈하여 식욕이 절로 일었다.
저녁을 마친후 김삿갓은 주인 내외와 금강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방이라 어쩔수 없이 주인 내외와 동침을 하게 되었다.
때문에 잠자리가 몹시 불편하였다.
어설픈 잠자리였지만 설핏 잠이들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단칸방임을 불구하고 간밤에 잠을자게 되었으니 삿갓은 주인아낙을 볼 염치가 없었다.
아침이나 얻어먹고 어서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는데 상이 들어왔다. 쌀이라곤 찾아 볼수 없는 보리밥 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손님 대접을 하느라고 갖 지은 밥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식사를 마친후 그는 주인 내외에게 백배 치하를 한후 길을 떠났다.
왠지 뭉클한 감개가 앞을 맊아 그는 시를 한수 읊었다.
곡목위상 첨착진, 기간여두 근용신 (曲木为橡 詹着塵, 其间如斗 僅容身)
<굽은 기둥 찌그러진 처마는 땅에 닿으듯, 방조차 북통만하여 겨우 몸을 움직이겠네>
평생불욕 장요굴, 차야난모 일각신
(平生不欲 长腰屈, 此夜难馍 一脚伸)
<평생 긴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 했는데 간밤에는 다리조차 못펴고 새우잠을 잤구나>
서혈연통 혼연칠, 봉창모격 역무신
(鼠穴煙通 渾然漆, 蓬窓茅膈 亦无晨)
<쥐구멍으로 연기가 통해 방안은 칠흑같이 어둡고 창에는 칡과 억새가 엉켜 아침도 모르더라>
수연면득 의관습, 임별은 근사주인
( 雖然免得 衣冠濕, 临別慇 勤谢主人 )
<비록 이렇기는 했어도 옷젖음을 면했으니 떠날때는 은근히 주인에게 감사할밖에.>
~~20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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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0~21)
* 眼中七子 皆为盜
김삿갓은 외금강에 이르러 바다와 접한 금강산의 또다른 풍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이제 계절은 중추(仲秋)로 접어들어 산중의 바람은 얇은 베옷을 헤집고 들어와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는 마침내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망망한 바다를 보니 막혔던 속이 확 트이는것 같으면서도 시름은 파도를 타고 더욱 간절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외금강에서 함경도 땅으로 가는 길은 바다와 육지가 숨박꼭질을 하는 길이었다.
바다를 끼고 나란히 길을 걷다가도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다는 갑자기 먼곳에 있었다.
이렇게 해금강이라 일컬어지는 외금강을 지나 북으로 발길을 계속하자 강원도 땅이 다하고 함경도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어선 큰 읍내는 통천(通川) 이었다.
통천은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삼백여호의 큰 읍이었다. 읍내 저자거리를 지나 어느 소슬대문이 거만하게 솟아 있는 집 앞에 당도하였다.
무슨 잔치가 있는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대문을 들낙거리고 울 안에서는 기름 냄새와 더불어 음식냄새가 풍겨 나오는데 배가 고픈 김삿갓의 회를 요동시켰다.
김삿갓은 마침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냉큼 물었다.
"이집에 무슨 경사가났소이까 ? "
"네, 윤진사 아버지의 회갑잔치라오."
김삿갓은 올커니 했다. 밥과 술을 넉넉히 얻어먹겠구나. 그는 다짜고짜 소슬대문으로 들어섰다.
"당신 누구요 ? "
하인인 듯한 사내가 문간 안에 서 있다가 사납게 소리친다.
"앗따 , 그사람 간떨어지게 만드네. 누구긴 누구야. 윤진사 춘부장님 수연에 참석하러 왔지."
김삿갓이 눈을 부라리며 응수하자 사내는 주춤했다.
그리곤 살펴본 꼬락서니로 보아 윤진사쪽을 잘아는 망쪼들은 양반 껍데기 쯤으로 생각되어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넓은 대청에는 잔칫상이 호화스럽게 차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로 회갑을 맞은 늙은이가 의관을 갖추고 점잖을 빼면서 앉았고 , 맞은 편에는 이지방에서 행세깨나 하는 상객들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대문간 곁에는 아무렇게나 둘러앉은 걸인에 가까운 부류들이 있었다.
좌중을 둘러본 김삿갓은 기왕에 얻어 먹을것, 상객들이 앉은 대청위로 성큼 올라섰다.
"아니, 어디라고 올라서는게요 ! "
김삿갓의 행색을 마뜩하지 않게 쳐다보던 하인 한 놈이 김삿갓 뒤통수에 대고 큰 소리를 질렀다.
일순 , 좌중에 모두는 김삿갓과 하인을 향했다.
"아니 무슨일인데 그러냐 ?"
윤진사가 큰 소리가 나자 점잖게 참견 했다.
"글쎄 걸인 주제에 대청으로 오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 소인이 끌어내리는 중입니다요."
"오늘 같은 날 너무 큰 소리 내지 말고 술잔이나 먹여 보내도록 하여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행색은 걸인 행색을 하였지만 막상 걸인 취급을 받고보니 기막히기도 하고 울화도 치밀었다. 그는 점잖을 빼는 윤진사가 얄미워 그쪽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인도인가 부대인, 주인인사 난위인"
(人到人家 不待人 , 主人人事 难为人 )
통천 지방에서는 글줄이나 읽는 윤진사라 삿갓의 이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음 ? "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김삿갓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이미 홱 돌아서서 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봐라 저분을 모셔오너라."
"저 걸인을요 ? "
하인놈은 영문을 몰라 주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놈아 내가 보기에는 보통 걸인이 아닌것 같다. 냉큼 가서 불러 오너라."
하인놈은 궁시렁 거리면서 김삿갓의 뒤를 따라 문간으로 뛰어갔다.
"윤진사, 무슨 일이오 ? "
술을 마시느라 삿갓의 말을 못들은 손님이 물었다.
"초라한 과객인데 잘하면 좋은 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초라하다니 행색은 어떻습디까 ? "
"허름한 무명 두루마기에 삿갓을 썼습니다."
"그래요 ? "
"아니 그런 과객을 알고 계시오 ? "
"듣자하니 삿갓을 쓰고 다니는 젊은 과객이 금강산 일대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더군요.
금강산이라면 숨어서 공부하는 인재나 고승이 많을 것인데 그들보다 윗질이라 하더이다. "
풍문으로 김삿갓의 행장을 들은 모양인데 , 윤진사에겐 초문이었다.
"금강산이 여기서 어디라고 그 글 잘하는 과객이 왔겠소 , 삿갓이야 누구든 쓰면 될것이고."
한편 김삿갓은 큰 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배를 주릴지언정 말석에 끼어앉아 콩나물 대가리를 씹고 십지는 않았다.
"이보시오 ! "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알아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낯선 곳에서 설마 자기를 부르랴싶어 삿갓은 그냥 걸었다.
"여보시오 삿갓쓴 양반."
그제야 김삿갓은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까 그 하인놈 이었다. 김삿갓은 울컥 분통을 터트렸다.
"뭣 때문에 나를 불러세운단 말이오 ? "
김삿갓은 조금전 분풀이를 하듯 눈을 부라리며 뒤따라온 하인놈을 위 아래로 훝으며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나으리께서 댁을 모셔오랍니다."
"나를 ? "
"어떤 일인줄 나도 모르겠지만 하였튼 가십시다."
김삿갓은 아까 자기가 내뱉은 말을 윤진사가 들였으려니 생각했다.
그리고 하인을 따라 다시 윤진사 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올라오시오. 아까는 대접이 소홀했던 것 같소. 너무 괘념치 마시고 술이나 한잔 드시오."
김삿갓은 대청으로 올라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보아하니 글께나 아시는 선비신듯 한데 이런 자리에서는 의례 시 한 수 쯤은 오갈법 하지 않겠소 ?
음식을 드시면서 천천히 글놀이나 해봅시다." 윤진사는 호기심이 동해 이렇게 서두를 꺼내놓았다.
음식상이 새로 차려져 나왔다. 김삿갓은 우선 먹고 볼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양하지 않고 이것저것 배불리 먹고 마셨다.
"애, 지필묵을 가져 오너라"
윤진사가 아들에게 명하자 장성한 아들 하나가 냉큼 가지고 왔다.
"저 선비께 드려라."
삿갓 앞에 지필묵이 놓여졌다.
"그럼 , 내 노부님을 위하여 수연시 한 수만 지어 주십시오."
사실 윤진사는 뭣인가 속에 들은체 하고 있는 삿갓을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연시를 청해 삿갓의 실력을 알고 싶었다.
"음식을 대접 받았으니 그 값을 해야지요. 그냥 돌아가면 진짜 걸인이 되지 않겠소이까 ? "
삿갓은 필을 들었다.
그리고 생각도 할 필요 없다는 듯 , 첫 귀절을 달필로 써 놓았다.
"피좌노인 불사인"
(彼坐老人 不似人)
"뭐라고 ? "
윤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기 부친을 가르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같지 않다고 썼으니 , 이런 모욕이 또 어디 있으랴. 손님들도 글씨를 넘겨 보더니 쑥덕쑥덕 거렸다.
삿갓은 일부러 보란듯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
다음 귀절을 썼다.
"의시천상 강신선"
(疑是天上 降神仙)
이 글을 보자 울그락푸르락 하던 윤진사 얼굴이 바보처럼 해맑아졌다.
"하하하하..이것 참 기막히군 ! ..나는 첫 귀절을 읽고 깜짝 놀랐구먼, 내가 나이를 들었어도 아직도 성질이 괄괄해서 큰 일이란 말씀이야."
좌중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 귀절을 써내려 갔다.
"안중칠자 개위도"
(眼中七子 皆为盜)
좌중은 다시 한번 난리가났다.
"당신 누구보고 도둑놈이라고 하는 거요."
"음식을 좋게 얻어 먹었으면 고이 삭힐 일이지 재는 왜 뿌리는거야 ? "
윤진사 아들들이 벌떼같이 일어섰다.
"가만 있어라. 글이란 완성을 한 후 평하는 법이다."
윤진사는 소매자락까지 휘저으며 성난 아들들을 만류했다.
"참 사람들 성질도 급하구료."
김삿갓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결구를 써놓았다.
"투득천도 헌수연"
(偸得天桃 献寿宴)
즉 ,효성을 나타낸 글이었다.
"하하하 내 그럴줄 알았소이다. 정말 본인으로선 따를 수 없는 명시 올시다 !
내가 틀림없이 ,사람을 보기는 잘 보았지."
윤진사는 입이 귀에 걸릴정도로 웃으며 좋아했고 성을 내던 그의 아들들도 싱글벙글이었고 좌중에 손님들도 삿갓의 재주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어쩌면 글귀 한 귀절로 사람들을 모두 울고 웃게 한단 말인가 ?
기가 막히군, 기막혀 !"
"여봐라 , 오늘 뜻밖에도 뛰어난 시객을 만나 , 좋은 수연시를 얻었으니 그 답례를 해야겠구나.
들어가서 나 주려고 만든 의복 일습을 내오거라."
"아버님 , 갑자기 새 옷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 "
아들 하나가 물었다.
"앞으로 날이 꽤 추워질 터인데 저 선비님 옷은 아직도 여름 옷이 아니냐 ? 솜 둔것으로 내오거라."
김삿갓은 수연시 덕분에 음식을 마음껏 대접 받았음은 물론 , 솜둔 두루마기며 핫바지 저고리까지 선물받게 되었다. 미구에 눈이 내릴 터인데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하룻밤을 편히 지낸후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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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21)
*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듯 우뚝 솟아있네.
통천에서 안변까지는 이백 오십리라 했다.
하루해가 또 저물었다. 어둠발이 내리기 시작할 때가 나그네에게는 제일 외로운 시간이다.
김삿갓은 아무 집이나 들어설 양으로 조그만 마을로 들어갔다. 첫눈에 가난한 마을이라 생각되었다.
세상은 참 고르지 않다. 소슬대문에 하인까지 두고 거드름 피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다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겨우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헌데 김삿갓이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이 더 많고 인심을 쓰는데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들이 더 좋았다.
김삿갓은 오막살이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방안에서는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 호롱불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인장 계십니까 ? "
"뉘시오 ? "
방안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뒤이어 방문이 열리면서 오십세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목을 빼고 쳐다본다.
"나그네가 어둠을 만나 ,미안하게도 하루밤 신세를 지었으면 합니다."
"허허 , 우리 집에도 손님이 오실 때가 있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주인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김삿갓은 일례를 보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시오 ?"
사람 좋게 생긴 주인이 삿갓을 보고 물었다.
"먼 길을 가시는구료. 참 저녁은 아직 자시지 않았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주인은 방 한쪽 구석에서 실타래를 감고있던 마누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누라는 그림자 처럼 소리없이 밖으로 나갔다.
"두 양주분만 계시오 ? "
"아들 하나하고 며느리가 있지요. 이곳은 어촌도 아니고 농사지을 땅도 별로 없는 곳이라 살기가 참 곤란한 곳이지요."
"아 네, 그렇군요"
삿갓은 주인장의 이곳 형편을 듣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보았던 빈촌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김삿갓과 마주보고 있는 주인장도 말이 없고 삿갓도 이렇다니 말이없이 , 두 사람은 묵묵히 등잔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부스럭 부스럭 나뭇단을 풀어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얼마후 밥상이 들어왔다.
간단한 저녁상이었다. 조밥이 한그릇, 된장찌개에 김치 한보시기가 전부였다.
김삿갓은 몇번씩이나 치하를 한후 수저를 들었다.
언젠가처럼 이집에서도 주인 내외와 같이 한방에서 잘수밖에 없었다. 불을 끄고 누웠으나 잠은 금방 오지 않았다. 아랫목 쪽에서는 주인 내외의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손님이 자고 있는줄 아는 모양이었다.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저녁은 그렇게 대접했다손 치고, 아침은 어떡하지요 ? " 부인의 말이었다.
"글쎄, 우리같은 집에 손님이 찾아 와준것 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아침에 조밥을 드릴수야 있나 , 박초시네 집에 뭐라도 맏기고 쌀 되라도 얻어 올수는 없을까 ? "
"뭐가 있어야지요. 두루마기 하나 변변한 것 없는데 그나마 며느리가 입고 가고 없으니 어떡한데요."
"음, 정 선달네 집에 날이 새거든 가봐요. 손님이 왔다고 사정하고 쌀 한되만 꿔봐요."
이들의 이야기를 어두운 방에서 듣고있던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애처로울 정도로 그들의 인정이 따스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른 새벽 , 김삿갓은 소피를 보러 가는척 하고 주인 내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 그들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면 모를 일이되, 알고 있으면서 밥을 얻어 먹을수는 없었다.
초겨울 , 차가운 새벽 바람을 쏘이며 정처없는 발걸음을 옮겨놓는 김삿갓,
은 저절로 싯귀가 읊조려졌다.
반중무육권귀채, 주중핍신화급리
(盤中無肉 權歸菜, 廚中乏薪禍及
籬)
<밥상에는 고기대신 채소가 뽐을 내고, 부엌에는 땔감이 없으매 화가 울타리에 비친다>
부고식시동기식, 출소부자역이행
(婦姑食時 同器食, 出所父子易衣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그릇 밥을 먹고, 출타할 때는 부자가 서로 옷을 바꿔 입는다.>
아침도 굶은채 그는 한나절을 꼬박 걸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길가에는 인적이 없었고 , 멀리 산아래로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족히 이십여리는 걸어가야 될것 같았기 때문이다. 걸으며 날짜를 꼽아보니 시월 하고도 그믐이었다.
"허 , 내일부터 동짓달이로구나"
날짜를 꼽아본들 무었하랴 싶지만 한편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동짓달, 이제 평지에도 눈발이 날릴 것이다. 또한 살을 에이는 바람도 몰아칠 것이다.
김삿갓은 공허한 마음으로 산천을 휘돌아 보았다. 산도 들도 텅텅 비어 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먼 산 봉우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다정다감한 시인의 가슴에는 시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물들었다.
엽락척용 설만두, 세여천탱 흘연부 (葉落瘠容雪滿頭, 勢如天撑屹然浮)
<잎은 져서 앙상하고 눈은 봉우리에 가득한데,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듯 우뚝 솟아있네>
여령나립 아해사, 혹자중간 선학유
(餘嶺羅立兒孩似, 或者中間仙鶴遊)
<그 아래 봉우리는 아이인양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어떤 봉우리에선 학이 놀고 있구나.>
~~22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