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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56) - 사람의 수 666
본 문 : 계시록13:16-18, 14:1
계13:16-18, 14:1입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 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지난번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공부했습니다.
용이라고도 하고, 옛 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는 사단이 그 죽은 것 같았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그리고 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 권세를 주어서 세상을 핍박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세력을 추종하게 만드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엄청난 능력과 기적과 이적을 가지고 세상과 성도들까지도 미혹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 가짜 목사, 가짜 선지자로 우리 예배당 안에 이미 들어와 있음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뿔 달린 마귀의 모습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존경 받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궁금해 하는 666이 등장합니다. 많은 분들이 666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고 또 잘못된 확신 속에서 괜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16절과 17절을 봅시다.
계13:16-17절을 여십시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 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그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모든 자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그런데 그 표는 짐승의 이름이며 그 이름의 수라고 합니다. 그러면 먼저 성경에서 이 표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봅시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군인들과 노예들 그리고 신전 봉사자들에게 표를 찍었습니다. 그 표는 ‘소유’와 ‘보호’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던 신전 제사장들 손에 찍힌 표는 그가 그 우상에게 속해 있다는 의미였고, 노예의 손이나 이마에 찍혔던 표는 그 노예가 어떤 주인의 소유였는가를 말해주는 표였습니다.
요한은 당시 사람들이 척 알아들을 수 있는 그 ‘표’의 개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표를 받은 자들은 그 표를 준 자의 소유라는 당시 사람들의 심상을 가져다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도 어떤 표를 받습니다.
계14:1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여기 보면 십사만 사천,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이마에 짐승의 이름이 아닌,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받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표나 짐승의 표를 ‘이름’이라고 할까요?
성경에서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바로 그 존재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여기서 ‘다른 이’와 ‘다른 이름’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름’하면 그 당사자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열국의 아비’, ‘야곱-속이는 자’, ‘모세-건져낼 자’, 예수-구원자‘ 이처럼 성경에서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그 당사자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사만 사천,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새겼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새겨 넣으셨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 누가 계십니까?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짐승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것은 무슨 뜻이 됩니까? 사단 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새겨져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주인은 사단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 사단의 사주를 받고 거기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짐승의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그 짐승의 이름이 모든 자에게 새겨져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 오고 오는 모든 자들에게 그 짐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자’에는 우리 모두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고전15:22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과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서 타락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죽어야합니다. 그 모든 이들은 짐승의 표, 사단의 이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자인 아담의 장남 가인에게 바로 그 표를 주십니다.
창4:15절을 보지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이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세기를 보면 타락한 인간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표를 받습니다. 가인은 분명 저주받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슨 표를 주신 것일까요?
이 표는 가인뿐만 아니라 아담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저주의 표입니다. 그 표를 받은 모든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그 표를 주시고 ‘세상이 너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세상과 가인이 한편이라는 표가 주어졌기 때문에 가인은 세상으로부터 적대시 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의 이름,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께 영원히 저주를 받게 되는 그 사단과 그 사단의 세력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 안에서 이 저주받은 땅에 태어나는 모든 자들은 전부 그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어떤 한 무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야 할 그 짐승의 표를 예수에게 새겨버렸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는 택하신 자들의 원래의 그 짐승의 표를 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라는 안경을 쓰시고 그들을 보아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의인이라 칭하시고 당신의 양자라고 법적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이제 짐승의 표를 받은 죄인들은 없어지고 예수의 이름을 받은 자들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엡1:3-7, 12-1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 심을 받았으니“
이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 하나님의 표를 받은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구별된 사람들을 ‘구별된 자들’, ‘성도’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이 땅에서 사망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겔9:3-6절을 찾습니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전부 죽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표를 받은 사람만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삼아주십니다.
계22:3-4절을 보면,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보세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그 이마에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자’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겠지요?
그럼 이제 그 짐승의 표, 짐승의 이름이 왜 666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여기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많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적 근거와 당시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성경적 근거에 의한 해답을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6이라는 숫자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십니다. 그 6일 동안의 창조는 7일째의 안식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7일째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안식은 완성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6이라는 숫자는 안성 되지 못한 ‘미완성, 아직 부족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완성과 안식의 숫자 7과 삼위 일체 하나님의 3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표기할 때 777로 표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3장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용과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무엇을 패러디(parody)하고 있었습니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 일체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흉내는 내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가짜 세력을 가리켜 666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인의 재앙, 나팔의 재앙에서 보면 여섯 번째까지는 저주와 심판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곱 번째에서는 항상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환상으로 끝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6이라는 숫자와 7이라는 숫자가 일관성 있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666이란 요한계시록 전체에 깔려 있는 일관된 상징을 배경으로 한 숫자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즉 계13:16절을 잘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6개의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13:16절을 여십시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 한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여기 보면, 요한이 의도적으로 6이라는 숫자에 맞춰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을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의 높이가 60규빗이고, 폭이 6규빗이었습니다. 짐승의 세력인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를 상징하던 그 신상이 왜 60규빗, 6규빗인지 아실 수 있겠지요? 다른 근거도 찾아봅시다.
왕상10:14-18, 26절을 봅시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 육십 륙 금 달란트요
그 외에 또 상고와 무역하는 객상과 아라비아 왕들과 나라의 방백들에게서도 가져온지라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이백을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육백 세겔이며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삼백을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삼마네라 왕이 이것들을 레바논 나무 궁에 두었더라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 솔로몬의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 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상11:3-4절도 봅니다. “왕은 후비(후궁)가 칠백 인이요 빈장(첩)이 삼백이라 왕비들이 왕이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었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위의 문구들은 솔로몬의 타락을 지적하는 구절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은과 금을 많이 가지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말과 병거를 많이 두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아내를 많이 두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신17:16-17절입니다. “왕 된 자는 말이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으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나라 왕의 세상적인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존하고 의뢰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당시 왕들이 힘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은과 금, 그리고 말과 마병, 그리고 첩들을 못 갖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모두 다 어겼습니다. 우리가 읽었던 열왕기상 10장이 바로 그 솔로몬의 타락을 묘사하는 첫 부분인 것입니다. 그 솔로몬의 타락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합니까?
666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솔로몬의 세입중수가 육백 육십, 륙 금 달란트요”왕상10:13). 그러니까 666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은과 금과 말과 마병과 첩들로 자기의 힘을 과시하는 죄를 범한 것처럼 하나님이 아닌 이 땅의 힘과 보물을 추구하여 거기서 평안을 얻게 만드는 성도들이 반드시 경계해야 할 그 악한 세력과 기관과 방법들 전부를 가리켜 666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런 세상적인 세계관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계시다면 혹 짐승의 표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너무 쉽게 섣불리 구원의 확신을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지난 시간에 보았던 마태복음에 나오는 가짜들은 전부 자기들이 진짜인줄 알고 죽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수 천 년 동안 오로지 인간들을 속이는 것만 연구한 엄청난 힘을 소유한 사단이 우리의 원수요 대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단과 악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야 하는 신앙인들을 미혹해서 자기의 이름 위해 살도록 부추기는 세력임을 잊지 마십시오. 바벨탑을 쌓았던 그 죄인들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창11:4절을 보면,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보십시오. 그 짐승의 세력은 자기의 배와 자기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까지도 이용하게 만드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나’를 올려놓는 것입니다.
지금도 힘 있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혹 자기의 명예와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지금 예배당 안에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로 예배당 안에 있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777이 아닌 666의 세력이 하나님의 흉내를 비슷하게 내면서 수많은 가짜 교회 공동체를 이 땅에 만들어내고 있고, 또 올바른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거짓 가르침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속아서 그 길이 맞는 줄 알고 끝까지 올곧게 좇아가는 사람들, 또한 그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666에 대한 당시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해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번 계13장의 ‘두 짐승’의 강해를 통해 두 짐승의 이야기의 배경에는 ‘네로의 이름과 그에 대한 전설’이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계13:18절에 짐승의 수 곧 사람의 수인 육백 육십 육이라는 숫자에서 요한이 ‘게마트리아’(gematria)를 채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 ‘이름의 수’란 그 이름이 ‘짐승의 이름’과 동격 관계로 짐승의 이름을 숫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알파벳은 각기 숫자를 가진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름에 포함된 알파벳에 해당되는 모든 숫자를 더한 결과를 이름 대신에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폼페이의 어느 벽에 쓰여진 낙서에 ‘나는 그의 이름이 545인 그녀를 사랑한다’라고 씌어있다고 합니다(Mounce, 260). 여기에서 545는 이 낙서를 기록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수’라는 것은 바로 ‘짐승의 이름’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에서 그는 누구인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은 당시 자기의 편지를 받아보는 독자들에게 ‘문화적 공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설과 같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여러 가지 자료들을 활용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네로의 전설’입니다. 즉 네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로마의 동부전선에 대치하고 있던 파르티아 제국으로 도주하여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전설과과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전설의 내용이 요한계시록의 여러 부분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로라는 이름이 요한계시록에 직접 거명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는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이러한 네로의 전설은 요한계시록에서 두 가지 형태로 창조적으로 활용이 됩니다.
하나는, 계13장에서 치명적 상처가 회복(계13:3-4)되는 짐승의 힘의 회복 혹은 상승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대적을 네로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종말론적 대적으로서의 네로가 로마를 위협한다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대적으로서의 네로와 로마 제국적 힘을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13장은 로마의 멸망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백성을 핍박하는 로마의 능력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네로가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로마에 대한 위협적 존재로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은 네로의 폭정으로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 그의 죽음을 기뻐했던 사람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돌아와 로마를 다시 지배하게 된다면 과거보다 더 폭군이 될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은 일곱 심판 시리즈에서 심판의 일환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계17:7-18절에서 네로의 전설의 형태는, 네로와 그의 동맹군이 동방으로부터 복귀하여 로마를 파멸시키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의 배경에서 ‘그 이름의 수’ 666은 바로 네로의 이름의 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666이 시저 네로의 헬라어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한 후 그 이름에 내포된 모든 숫자를 합한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도요한은 다시 한 번 짐승이 네로 황제의 모델로서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유명했던 ‘오멘’이라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어떤 사람의 이마에 666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영화가 몇 편 더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666을 ‘바코드(bar-cord)다, 앞으로 나오게 될 전자 신분증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계7:3-4 ; 9:4).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으신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이 이마와 손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이마는 지성과 이성을 상징하는 것이고, 손은 행동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복장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그들에게 드러나는 부분은 이마와 손 외에는 다 가려져 있습니다. 저자가 ‘표를 받는다’는 표현을 쓸 때 드러난 부분인 이마와 손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안과 밖이 모두 타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 말 그 666이 바코드나 전자 신분증이라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요한이 보낸 요한계시록 편지를 받아보고 읽고 그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 속에서 무슨 위로가 되었을까요?
이 요한계시록의 최초의 수신자는 2000년이 지난 우리도 아니고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고 당시 일곱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입니다.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요한계시록의 편지가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코드’니 ‘전자 신분증’에 대해 알았겠습니까?
어떤 주장처럼, 이 부분은 미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1장부터 요한계시록22:21절까지 전체가 시공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책입니다. 어떤 부분도 우리와 관계없는 부분은 없습니다.
어떤 주장처럼 요한계시록 4장 이후 계5-22장 부분은 우리와 관계없는 미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면, 2000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교회공동체는 필요 없는 성경의 말씀을 들고 있었던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666이 ‘바코드다, 전자 신분증이다’라도 주장하는 자들을 한국 장로교회와 신학교들이 이단으로 규정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에 속고 있습니까? 지금도 기독교 서점에 가면 그런 책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저자들과는 한번 공개토론을 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경책 한권만 갖고 말이지요?
그 666이 바코드나 전자 신분증을 말하는 것이라면 왜 계13:18절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만이 그 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 666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도 그 바코드만 받지 않으면 괜찮은 것입니까? 아니면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도 그 바코드를 받게 되면 구원이 취소됩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 아닙니까? 666, 짐승의 표라는 것은 그렇게 여러분들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나 모양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계13장의 666과 대조하여 나오는 계14:1절의 십사만 사천이 구약의 하나님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 그리고 거기에 허다한 무리를 상징하는 1,000을 곱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666도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흉내 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오고 오는 세대의 악한 세력을 총칭하여 상징하는 숫자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지요. 마귀의 세력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비슷하게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용, 옛 뱀, 마귀, 사단에게 그 권세와 힘을 받아 세상을 핍박하고 미혹하는 존재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고 그 힘의 원리를 추구하게 하고 따라가게 만드는,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가르침과 철학이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며 그들에게 미혹당하여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말고 이 땅의 힘과 보물 같은 것으로 자신의 행복과 만족의 근거를 삼으려하는 모든 자들을 666,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그 666이 ‘사람의 수다’라고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만사형통이다, 모든 병이 다 낫는다, 삼박자 축복, 자기들의 배와 자기들의 이름을 위한 기독교를 가르치는 자들 전부 다 666의 표를 받은 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오히려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하나님의 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손해를 보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17절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못한 자들은 ‘이 땅에서 매매를 하지 못 하더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상인들의 조합인 ‘길드 조직’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길드(guild) 조직에 가입하면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적으로 매매를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신앙인들이 세금 꼬박꼬박 내고 원리원칙대로 장사 해보십시오. 무슨 이익이 남습니까? 그런데 신앙인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매매를 못하게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오히려 이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환난과 핍박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얻어내는 무당종교가 아닙니다.
‘패치 아담스’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명작 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존 인물인 미국의 의사 ‘헌터 아담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 ‘헌터 아담스’는 불행한 가정환경을 비관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스스로 정신 병원에 입원합니다. 거기서 ‘헌터 아담스’는, 진정한 의사는 단순한 의료행위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치료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터득합니다.
병은 나아도 또 걸리고 결국 사람은 모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단순히 사람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질을 높이는데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췌장암 환자에게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과 친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애 씁니다. 이 ‘패치 아담스’는 의료행위로 그들의 병을 치료함과 동시에, 그 병을 앓는 속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인간 치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패치 아담스’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평안하고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병이 낫고 잘 살게 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병이 나았는데 여전히 죽음 뒤의 세상이 두렵고, 부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참 행복을 알지 못하는 그런 마취제를 투여하는 것이 목회자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병은 여전한데, 여전히 가난한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 앞에서도 하나님만으로 행복한 진짜 치료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런 참 목자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이기를 소원합니다.
첫댓글 사람의수 666
계시록 강해 56^
수고 감사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