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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간 탈출 5,22- 6,13 모세가 야훼에게 탄원하다의 6,9의 내용을 이어 시작합니다.
6,9
º 그리고 그들을 모세에게 귀기울이지 않았다.
→ 영(레아흐, רוח : 숨, 바람)의 짧은 때문에
→ 그리고 힘든 노역 때문에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 6,9절에게 마무리 됩니다.
10절로 넘어가면서 다시 엘로힘에서 야훼가로 바뀌고, 야훼가 모세가 말하고 그리고 모세가 파라오에게 얘기합니다.
탈출 5,22-6,13
11 "너는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라고 하여라."
아주 단순한, 우리가 앞에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12 이에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도
제 말을 듣지 않았는데, 어찌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앞에서 다섯번이나 싫다고 한 모세가 또 한번 " 야훼의 면전에서 (לפני יהוה)" 여섯번째로 부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입이 안떨어져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 이부분의 원문을 보게되면
6,12
º 그리고 나는 두 입술이 할례받지 않았습니다.
(ואני ערל שפתים)
입술도 할례를 받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원래의 표현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즘의 유아 세례의 경우에 아기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입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제들이 기도하실때 "에파타" 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축복을 해야지 아이의 말문이 트인다고 생각해서( 모세가 말하는 입술의 할례와 같은 생각)
이 부분을 조금더 깊게 생각보자고 하시며
신명 10,16
º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백성들에게 하는 이야기로 '마음에 할례를 한다' 여기서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구약성경의 말은 '심장'을 얘기합니다. 심장이 할례를 받아서 심장이 하느님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의미.
기억해야 할 '입술의 할례, 심장의 할례' 그리고 예레 6장을 보면
예레 6,10
º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알아 듣도록 경고해야 합니까?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 거리가 되고 그들은 그 말씀을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귀의 할례' 로 입술도 귀도 심장도 할례받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참다운 자신의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할례받아야 한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안에 있어야 한다) 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 부분과 관계해서 신약성경의 한 대목이 생각나야 합니다.
사도 7,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스테파노가 자신을 고발한 유다인들을 향해 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신명기와 예레미야, 또는 탈출기에 나와있는 할례를 통해야 만이 자신들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신학이 신약의 사도행전까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스테파노의 시기까지도 연결)
그렇다고 어디가서 " 너, 왜 그렇게 말을 못해?" 라고 상대방이 물었을 때
" 응, 나는 아직 할례를 안받아서 그런것 같아.." ^^;;; 라고 하면 안된다고 하시며,
세월이 지날수록 신부님도 어떤 것이 잘 들리지도 잘 보이지도 않는것 같아 자꾸 들은 것에 대해서 확신도 없고 정말 들었나? 확인해 봐야 할 것 같고, 착각하는 일도 많은 것 같아서 나이 먹을 수록 삶이 불안해 지는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라고 생각을 해보적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어린이들이나 아직 성장해야 할시기에 할례받아야만 비로서 제 역할을 한다는 기저에 깔린 신학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후에 할례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서로 넘어가면서 사무엘 전후, 열왕기 상.하권에서 하느님께 탄원할 때 많이 쓰입니다.
"주님(야훼여!), 내가 할례받지도 않은 자들에게 이렇게 져야 되겠습니까?
나의 목숨이 할례조차도 받지 않은 이들에게, 이렇게 넘겨져야 겠습니까? 라는 표현으로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따라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했다. 하는 것은 올바른 기능을 한다, 제대로 기능을 한다. 것으로 할례 받았다. 라는 표현으로 고정해서 사용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언가 열등하다. 라고 보는 " 그 열등한 존재에게 제가 져야하겠습니까?" 라는 표현으로 이해해 볼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탄원' 중에
" 왜 하느님 당신은 이 백성에게 악하게 합니까?" 라는 탄원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이 악할 수 있다.
라는 것, 굉장히 우리들에게 당혹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내용이
다른 부분에서도 등장합니다.
악하게 하다.
백성이 불평하자, 모세가 하느님께 탄원하고,
사렙타의 과부이야기와 그의 아들에게 까지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적어도 위의 두 문장안에서 하느님이 악할수 있다. 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다신적 신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착한 신은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신은 악한 일을 하는 선과 악의 구도안에서)
유일신 사상으로 넘어오면서 신학안에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대체 세상 안에 악한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일까?에 대해서 온갖 다양한 애기들을 할 수 있지만
태어난지 며칠도 안된 아이에게 일어난 불행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나쁜짓을 많이 하는 이웃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선한 행동을 계속하는 이웃에게 찾아오는 지속적인 불행은 ? 어떻게 설명합니까?
상선벌악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악의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일신 사상의 커다란 딜레마 중에 하나인, 판관기 9장이나 사무엘 전서에서 나오는 몇가지 구절들은 '악령' 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지만, 가끔 역사를 일으키시기 위해서 악한 영을 세상에 보내시기도 한다는,
탈출기에서도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이 하십니다.
단순하게 그 부분만을 읽게 되면, 그런 질문이 우리에게 생깁니다.
' 하느님께서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면 파라오에게 선한 마음을 일으키시지?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라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신학이 갖는 한계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탈출기가 적힌 그런 사건보다 훨씬 더 발달한 신학을 갖고 있지만은 오늘날의 신학자들도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하십니다.
'악이란 무엇이냐?' 라는 악의 존재,
아우구스 성인의 말씀을 이어받아 오늘날 신학자들이 '악이란 선의 결핍이다.' ( 빛이 없는 어두움 같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정말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악한 일(범죄)들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아이를 잃은 한 엄마가 찾아와 "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십시오" 라는 말에
" 저는 못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하느님의 뜻을 알수는 없지만, 그리고 기도드리며 하느님을 원망할 수는 있지만 설명을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신학적인 지식만으로는...." 라고 하셨던 체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처럼 여기서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욥기 1장에서도 사탄때문에 악한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악령, 더러운 영에 관해서 얘기합니다.루카 22장 3절의 유다에게도 사탄이 들어가서 그렇게 예수님을 배반하였다는 이야기로,
루카복음만 읽으면 유다의 책임이 아닌 사탄의 유혹이라는 생각이듭니다.(다른 존재에 유혹에 빠진것처럼)
그렇다고 우리도 어떤 나쁜 행동을 하고나서
" 이건 내가 한게 아니라....때문에 그런거야." 이런식의 답변은 곤란하겠지요 ?!
내 마음안에 악한 마음을 키워갈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을 쫓아갈 것이냐?! 라는 선택안에서 우리들의 삶이 이루어 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풀기 위해서 악한 존재들을 설정하기도 합니다. 이미 창세기때 말씀하신 라합, 레비아탄, 베헤못, 이와 같은 존재들이 신약에서 사탄,
악령(רוח רעה), 더러운 영과 연결되어 서술되기도 합니다.
이제 신부님께서 예전부터 하고싶으셨던 일, 창세기때부터 등장한 족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강의를 이어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탈출기 6,14- 27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는 꼭 다루고 나가야하는 부분이라고 하시며, 일단 족보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흐름이 끊깁니다.
마치 창세기를 읽듯이 지금까지의 역사와 앞으로 이어질 역사가 족보를 통해서 기본적인 밑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의 이야기는 조금 쉬어가는 부분입니다. 조금 더 섬세하게 확대경을 들이대고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문학적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백주간 하시면서 이런 족보가 나오면 설마 건너 뛰신 분들은 없겠지만, 빠르게 읽으셨을 것 같습니다.( ^^;;)
천천히 읽어가 봅니다.
레위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탈출 6,16-25절에서 끝납니다. 레위에 앞서서 14- 15절에서는 르우벤과 시메온의 씨족(משפחה, 미슈파하)에 관해서 나옵니다.
레위와 르우벤과 시메온은 형제 관계입니다.
탈출기 1,2절을 보면은 르우벤과 시메온과 레위가 연달아 나옵니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레아의 아들들입니다.
여기나온 족보는 따라서 레아의 아들들에 관해서만 나옵니다.
르우벤든 첫째, 시메온은 둘째, 레위는 셋째 아들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횟수, 연령에 관해서는 세사람에 대하서만 언급합니다. 레위는 137세, 크핫은 133세, 아므람은 137세. 여기서 레위는 아론의 증조부로 크핫은 아론의 할아버지로 아므람은 아론의 아버지입니다.
증조부(레위) ㅡ 할아버지(크핫)ㅡ 아버지(아므람) ㅡ 아론까지,
이스라엘(야곱) 부터 피느하스까지 일곱 세대가 언급됩니다.
(이스라엘 - 레위- 크핫- 아므람- 아론- 엘아자르 - 피느하스)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공간을 나타내는 완전수는 4( 동서남북), 시간을 나타내는 완전수는 7입니다.
7은 한퀴(한세대)가 돌아간 완전수, 시간에 관한 완전수입니다.
7세대가 언급되는데 모세와 아론은 5번째 세대입니다.
탈출기에서 일반적으로 언급할 때는 항상 모세와 아론이라고 언급하는데, 유독 20절에서만은 아론과 모세 라고 언급됩니다.
아론이 모세의 형이기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라고 짐작해 볼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23절에서 아론의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 반면 모세와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에 관한 언급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아론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 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20절은 아므람이 자신의 고모 요케벳 (יוכבד)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אלישבע)를 소개하면서, 암미나답의 딸이며 나흐손의 누이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엘아자르의 아내는 프티엘의 딸로 소개가 됩니다.(문학적인 관찰로서 기억해 두고)
모두 족보는 일곱 세대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성조사부터( 야곱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에서 부터) 앞으로 전개될 탈출기 후반부를 뛰어넘어서 레위기, 민수기, 이후를 준비하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탈출기 28장에서도 그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레위기 9장, 민수기 3장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족보는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중심에 서게 될 사제 가문. 레위 집안과 임금 가문. 유다 집안을 서로 연결시키게 됩니다.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와 관련되는 암미나답, 나흐손은 유다 집안이고 그리고 다윗의 조상입니다.
룻 4,18-22
이것이 페레츠의 족보이다. 페레츠는 헤르론을 낳고,
헤츠론은 람을 낳았으며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다.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고 나흐손은 살마를 낳았으며,
살몬은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
마태 1,3-6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함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으며,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루카복음에서도 나옵니다.
루카 3,32-33
다윗은 이사이의 아들, 이사이는 오벳의 아들, 오벳은 보아들의 아들, 보아즈는 살라의 아들, 살라는 나흐손의 아들,
나흐손은 암미나답의 아들, 암미나답은 아드민의 아들,
아드민은 아르니의 아들, 아르니는 헤츠론의 아들, 헤츠론은 페레츠의 아들,
페레츠는 유다의 아들이다
마태오 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쭈욱 내려가서 예수까지 , 루카복음은 예수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까지. 암미나답은 아드민의 아들,
아드민과 아르니는 앞선 마태오 복음의 족보에서는 없어요! 룻기에서도 안나오는데 대신에 '람' 이라는, 람이 암미나답을 낳았고, 마태오 복음에서도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반면에 루카 복음에서는 람이 없고 아드민과 아르니가 나옵니다. 여기서 아르니의 '르' 와 아드민의 '민'을 합치면 '람' 이됩니다.
이 족보는 탈출기에서 시작해서 룻기, 열왕기에서 이어지고 신약에서도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인물은 '암미나답' '나흐손' 인데,
문제는 암미나답과 나흐손은 유다지파이고,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나오는,
엘리에제르는 레위지파이고, 따라서 사제 지파와 왕의 지파가 혼인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굉장히 이상적인 것입니다.)
제정이 일치되는 적어도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이상적이었습니다. 왕이 통치는 하는 근본적인 권력은 신에게서 나온다. 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신관이 무너뜨리는 것을 지금의 민주정입니다. 민주정에서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 철학은? 신학적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전통을 반대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그와 같은 천년이 넘는 역사의 실험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잘못한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교회가 잘못 다스리는 왕들을 정말로 견제하고, 올바른 통치에 관해서 교회가 얘기했다면은 그리고 교회가 그와 같은 권력을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역사 내에서 교회의 배를 불리지 않았다면 세상의 역사는 다르게 흘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이상 사람들이 교회가 왕권과 세상의 권력의 뒤에서 신적인 그와 같은 힘을 실어주는 그런 시스템은 세상안에서 성공하지 못한것입니다.
이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그런 민주적인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그 현장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성공했습니까? 라고 물으시고 이것도 또한 어느정도 회의적이지 않은가?...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정치하는분들과 대화하셨을 때, 정치하는 분들 또한 같은 생각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것을 공약으로 내놓고 선거를 했을 때 떨어질 확률이 높아서...주저하신다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옳은 길이 이루어지는 것 보다, 내 욕심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경향이 짙어서 ...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 아파트, 주식, 부동산)은 절대로 줄어들어서는 안되고..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큰 위기를 맞고 있는 듯 합니다.
한표 한표 행사하는 권력을 나눠갖고 있는 국민들이 성숙하지 않을 때 그와 같은 체험이 쌓여나가서 세상이 정말로 우리가 바랐던 좋은 세상으로 가지 않을때 민주주의라는 전체적인 시스템이 한꺼번에 붕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누군가 강한 독재자가 나와서 우리를 다시 끌어주면 어떨까?" 이런식의 선한 독재자에 관한 생각들을 서로 나누고, 그런 이야기들이 들리게 됩니다.
족보안에서는 왕의 권력을 갖고 있는 유다 집안과 사제적인, 신께 제사를 드리는 신학적인 부분에 자리를 차지하고 레위 집안과의 혼인을 이상적으로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레위 집안입니다.
여기서 모세를 말을 듣고 삼천 명가량을 죽인 레위 지파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오늘날 생각해 볼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구약성경에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에서 레위 지파가 등장합니다.
굉장히 잔인하고 그러한? 예를 들어 본당신부님이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볼때 사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관한 열정은 가득한 모습의 레위 지파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신명기 10장에서의
레위 지파 : 신명 10,8-9
그때에 주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따로 가려내셔서, 주님의 계약 궤를 나르게 하시고,
주님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그 때문에 레위인에게는 동족과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다.
그 대신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대로,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신다.
여기서 바알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나중에 광야에 나가서 다른 민족과 싸울때도 레위 지파는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궤를 지킵니다.( 레위 지파의 주된 역할)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그들은 일정한 영토를 차지하지 않고( 몇개의 도피성을 받습니다만),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다른 지파들이 수입이 생기면 십분의 일은 레위 지파에게 주는, 왜냐면 그들은 자신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할수 없습니다.
레위 지파는 야훼 하느님과 성막, 계약의 궤, 성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조금 특별한 지파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인물로서 피느하스를 말씀하셨습니다.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아론 사제의 손자이며 엘아자르의 아들인 피느하스,
피느하스가 가나안 여자를 데리고 온 이스라엘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사제인데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위의 내용에서 피느하스를 이상적인 사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6절을 살펴보면,
탈출 6,14- 6,27
26 "이스라엘 자손들을 부대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라." 하신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
이부분의 주교회의 성경과 달리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아론과 모세이다. 로 순서가 나와있습니다.
27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려고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말한 이들도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
이 부분에서는 본문에서도 순서가 모세와 아론입니다.
따라서 한번 아론과 모세였다가, 다시 모세와 아론으로 뒤바뀌는 그와같은 대목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 족보는 탈출기에 등장인물들을 창세기에 조상들과 한편으로는 연결시키고, 그리고 이후에 이야기들과 다시 연결시키는
전체적으로 조상들의 성조사부터 마지막 광야를 헤매는 민수기에 이야기까지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처럼 설명이 되어있는데, 그 중심에는 있는 존재는 아론입니다.(모세가 아닙니다)
따라서 제목도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아니라, 그냥 아론의 족보라고 하는 것이 솔직할것 같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흐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들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그와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지나간 시간들이 이 족보를 통해서 반성되고 앞으로의 시간들이 조망되는 동시에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정체성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가 누구인지에 관해서 선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론이 레위에 자손이라는 것이 큰틀에서 강조되고 그것은 그가 앞으로 수행하게될 사제직무와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아론에 집중되어 서술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을 쓴 이들은 아마도 레위 지파의 누구인, 사제계..
따라서 우리들이 모세오경을 얘기하면서, 신부님께서 그 대목을 다 강의하시지 않으시지만, 야훼계 . 엘로힘계 . 제관계 . 신명기계를 얘기하실 때 이 족보의 부분은 아마도 사제계와 관련된 사람들의 편집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석학자들의 견해라고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레위로부터 계산한다면 모세와 아론은 창세기 15,16절에서 언급된대로 4대째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15,13절은 400년의 세월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한세대가 백년씩 거쳐가는, 한세대를 백년이라고 계산하는 것이 오경에 일반적인 계산법이라고 볼수 있는것인지 또는 여러가지 조금은 다른 전승이 있는것인지에 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암미나답과 나흐손이란 인물은 마태오복음 1,4절 그리고 루카복음에서도 예수의 족보내에서 기억되는 인물들입니다. 따라서 탈출기 6장에서 등장하는 족보는 한편으로 구세사적 의미를 지니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아론과 엘리세바의 혼인은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종교와 정치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직무를 주실때 종교적인 직무뿐만 아니라 그 모든것을 통합합니다.
사도직이란 의미안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조하듯이 왕직. 사제직. 예언직이라는 세가지 직무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 직무가 예수님의 가르침안에 다 어우러져있고, 예수님을 왕으로서 사제로서 또 예언자로서 세상안에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모델로서 복음안에서 우리들에게 기억되고있다고 하셨습니다.
야훼가 모세를 부르고 모세가 야훼의 명령을 수행하지만, 그 첫째 단계는 파라오의 거부로 마무리됩니다.
이제 이런부분이 다 마무리되고 우리가 읽은 그 다음인 탈출 6,28부터 그 둘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세는 다시금 파라오에게 파견됩니다.
아직까지 앞선부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앞선 문제에서 마지막으로 모세는
"저는 입이 안떨어져 말을 못합니다."
탈출 5,22-6,12
12 이에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도
제 말을 듣지 않았는데, 어찌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모세에게 야훼는 어떠한 대답도 않습니다.
탈출 5,22-6,13
그리고 저는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 합니다."
탈출 5,22-6,13
13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 다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령하시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들과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보내셨다.
라고 되어있고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족보의 앞에 내용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게 끝납니다. 야훼는 명령하고 모세는 못하겠다는 말로 일단 마무리를 하고 족보가 나오고 다음에 내용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다시금 파라오에게 파견됩니다. 야훼 하느님이 다시한번 모세를 설득하고 모세는 다시금 파라오에게 파견되는데, 그 강한 손에 밀려서 파라오는 결국 이스라엘을 내보낼 것입니다.
거꾸로 읽어본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열가지 재앙의 이야기를 준비하고있습니다.
다음시간부터 열가지 재앙에 관해서 이야기하실텐데 왜?
열가지 재앙이 있어야만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누구인지? 야훼가 누구인지? 파라오에게 이집트인들에게 야훼가 누구인지를 설명하지만 스토리라인 전체는 왜? 열번째 재앙이있어야 했는지, 야훼가 이집트의 맏이들을, 맏배를 죽여서까지 파라오를 설득해야만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준비되고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야훼가 왜? 강한 손? 강한 팔을? 펼쳐야만 했는지를...
말씀을 끝으로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히브리어는 항상 최승정신부님 탈출기I 책을 통해 참조하며 익히고 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하느님께서 저를 강한손? 강한 팔? 로 이끄셨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다시금 하느님을 확실히 믿게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강한 이끄심의 시간을 통해 저의 신앙이, 믿음이 더 성장하였고 그 기억을 통해 앞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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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