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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의 백제 공격로에 대한 군사학적 연구/이 재 준
1. 머리말
2. 백강과 기벌포에 대한 종래의 제 학설
3. 군사학적 고찰과 문헌검토
4. 맺음말
1. 머리말
660년 당나라 소정방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 백제를침공하였다.『구당서』에 소정방은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熊津江口(웅진강구)1)에 이르러 江口(강구)를 지키는 백제군을 격파하고 곧장 백제의 왕도로 가서, 신라군과 함께 공격함으로써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웅진강구에 대해『삼국사기』에는 白江(백강) 또는 伎伐浦(기벌포)2)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663년 백제부흥운동 시에 唐(당) 수군이 백제를 지원하는 倭(왜)의 선단을 크게 패퇴시킨 지역을 중국 측 사료에는 白江口(백강구)3)로 기록하고 있고, 일본 측 사료에는 白村江(백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660년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하기 위하여 들어온 지역이 웅진강구, 웅진구, 기벌포, 백강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663년 왜군과 당군이 전투를 벌인 곳이 백강구 또는 백촌강이라 하여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남대학교 군사문제연구소 연구원
1)熊津江口(『舊唐書』券83列傳第33蘇定方); 熊津口(『新唐書』券220列傳 第145百濟); 熊津江口(『資治通鑑』券200唐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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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강구, 웅진구, 백강, 기벌포, 백강구, 백촌강으로 표기되는지역은 분명 백제의 관문이었거나 군사상 중요한 지역 또는 격전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 위치가 어디인가가 주요한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위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는 등 통일된 견해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이유는 사료가 엉성함은 물론 기록되어 전해지는 지명도 여러 가지여서 혼란스러우며, 1300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지명과 지형의 많은 변천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대부분 역사지리학적 방법이나 음운학적 방식에 의한 유사지명찾기 등 문헌에 의한 방법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떤 위치를 비정하고자 한다면 그 위치가 갖는 본질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는 비정하고자 하는 위치가 갖는 본질은 주요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본다.
2)白江/伎伐浦/熊津江口(『三國史記』百濟本紀義慈王20年);伎伐浦(新羅本紀太宗武烈王7年);依(伎伐浦(券42列傳第2金庾信中);熊津口(券44列傳第 4金仁問).
3)白江/白江口로 동일(『舊唐書』券84列傳第34劉仁軌/券199上第149東夷百濟;『新唐書』券108列傳第33劉仁軌/券220列傳第145東夷百濟제 ;『資治通鑑』券201唐紀17)
위치가 갖는 본질이라고 하면,『삼국사기』에 기록된 백강이나 기벌포는 防者(방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위치이며, 중국 측 사료에 기록된 웅진강구나 웅진구는 唐(당) 소정방군의 공격로상에 있으며 唐軍(당군)의 상륙지점이자 백제군과 싸운 장소로 攻者(공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위치이다. 따라서 전적지의 위치비정은 문헌에 의한 고찰과 병행하여, 당시의 백제 방어계획이나 당군의 침공계획 등 전투행위의 본질을 함께 고찰하여야 한다. 이에 본고는 종래의 백강, 기벌포에 대한 제학설을 알아본 연후에, 현장 답사결과를 가지고 군사학적인 지형분석 방법을 통해 그 위치를 비정하고자 한다.
비정된 위치에 대해서는 사료분석을 통해 추가적으로 검증을 하도록 할 것이다. 다만 위치비정에 있어 논란이 되고있는 웅진강과 백강이 동일한 강인지 아니면 별개의 강인지, 다시 말해 660년 백제도성 함락시의 백강과 663년 주류성 함락시의 백강이 동일한 강인지의 여부는 논외로하고자 한다. 단지 660년 소정방의 백제 침공로에 대하여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당시의 병법이나 전략전술적인 측면 등을 고려한 지형분석을 통하여 그 위치를 비정하고자 한다.
2. 백강과 기벌포에 대한 종래의 제 학설
가. 종래의 제학설
백강, 기벌포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일찍이 연구되었다. 먼저 津田左右吉(진전좌우길)은 “당군이 상륙한 기벌포는「신라본기」에 ‘所夫里州 伎伐浦(소부리주 기벌포)’임을 볼 때 소부리는 부여일대이므로 기벌포는 부여 부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김유신전」에 ‘蘇定方...等沿海入伎伐浦(소정방...등연해입기벌포)’라고 하였으므로 바다에 가까운 곳이다.4)라고 하였다. 小田省吾(소전성오)는 동진강구의 界火島(계화도)와 부안읍의 백제이름인 皆火(개화)가 음성 상 닮았다고 하여 백강구 및 기벌포는동진강 하구이어야 한다.5)고 주장하고 있다.
池內宏(지내굉)은 “기벌포는 백강지구와 같이 금강의 하류인 海口(해구)의 이름이고, 웅진강 및 백강과 그 범위를 같이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기벌포는 웅진강구 및 백강구와 같이 금강입구를 말하는 것이다.”6)라고 하였다.
今西龍(금서룡)은 “660년의 기벌포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伎伐浦一名白馬江, 在今扶餘縣西五里(재금부여현서오리)’의 기사와『삼국유사』의 ‘長岩又孫梁一作只火浦又白江(장암우손량일작지화포우백강)’이라 하였는데 장암은 부여군 관내의 場巖(장암)에 비정할수 있고 손량은 세도면의 紗浪(사랭이)에, 지화포는 금강과 석성천이 만나는 곳의 남쪽지점인 猪浦(저포) 와 비슷하므로 백마강 하류에 있는 古多津(고다진)7)인 것 같다. 한편『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백강은 당의 사적에서 백강이라고 칭하는 곳과는 同名異水(동명이수)이다. 그러므로 660년 소정방의 백제도성 함락 시에 나타나는 백강은 현재의 부여 관내를 지나는 백마강이며, 663년 주류성 함락시의 백강(백촌강)은 만경강이나 동진강 외에 비교적 해수가 깊은 변산반도 남쪽 줄포·내포가 타당하므로 2개의 백강이 있다.”8)고 주장하고 있다.
4)津田左右吉,「百濟戰役地理考」,『朝鮮歷史地理』第一券,1913,pp.169~175.
5)小田省吾,『朝鮮史大系上世史』,朝鮮史學會,昭和4年,1929,pp.194〜195.
6)池內宏,「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滿鮮地理硏究報告』14,1934,pp.140~146.
7)고다진은 고려 때까지 명칭이며 조선시대에는 고다지원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반조원이 되었다. 반조원은 지형이 곶(串)으로 되어 있어 원래는 곶지 또는 고다지라 하였음. 『한국지명총람』, 한글학회,1974.
輕部慈恩(경부자은)은 “당군이 일부러 금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배를 전진시켜 80㎞를남쪽으로 가서 백제군과 싸웠다는것은 부자연한 일이다. 웅진강은 공주로부터 부여까지를 말하고, 백강은 부여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곳까지의 사이를 부르던 이름이다. 따라서 백강은 현재 금강의 고칭으로 한산, 서천, 군산지방이며 백촌강과 같은 것”9)이라고 하였다.
한편 한국 학자들의 백강에 대한 의견으로 먼저 노도양은 “백강, 기벌포, 백강구를 지금의 금강하류로 보는데 동의하지만, 663년『일본서기』의 백촌강을 백강과 이름이 비슷하다고 하여 동일시함은 잘못이다. 백촌강은 동진강이나 만경강이 아닌 부안 서쪽을 흐르는 두포천을 말한다.”10)고 하였다.
김재붕은 “백제라는 국호는 직산·안성지방의 고 지명이므로 안성천이 백재강 또는 백강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백강,백촌, 백촌강을 아산만에 주입하는 안성천과 안성천하구의 백석포에 비정한다.”11)고 하고 있다.
8)今西龍,「白江考」,『百濟史硏究』,1934,pp.375~378.
9)輕部慈恩,「百濟都城及び百濟末期の戰跡に關する歷史地理硏究檢討」,『百濟遺跡の硏究』,吉川弘文館,1971.
10)노도양,「百濟周留城考」,『明知大論文集』1980, pp.23~29.
11)김재붕,『전의 주류성 고증』,연기군,1980,p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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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래는 “기벌포는 지화포라고 하였는데 부안의 옛 이름이 界火(계화) ․ 戒發(계발)이며 지금도 계화도란 이름이 남아있고 갯벌이 길게 형성된다. 정방이 東岸(동안)으로 상륙하려면 강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야 하는데 그러한 강은 동진강 밖에 없다. 또한 정방의 13만 대군을 만재한 1,900여 척의 대 선단이 덕물도에서 보급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柴糧(시량)이 충분치 못했을 것이고, 여름철에 식수·채소류 등을 20여 일간이나 저장 비축이 불가능하며, 하선즉시 전투가 어려워 상륙 후 충분한 휴식과 육상에서의 정비가 필요하였고, 척당 65명씩 타는 소범선 1,900여 척이 해상의 태풍을피할 수 있는 곳으로 기벌포와 백강구, 즉 계화도와 동진강을 택했을 것이다.”12)라고 하였다.
이종학은 “소정방은 덕물도로부터 직통으로 웅진강구 좌측에 상륙한 것이 아니라 백강(기벌포)에 상륙하였다. 그것은 당군이 백강을 지나고 신라군이 탄현을 통과 했다는 보고를 받자 계백을 먼저 탄현에 파견한 것은 백강이 더 멀고 위협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계백이 패하고 나서 군대를 모아 웅진강구에 포진시켰다. 따라서 당군의 교두보는 백강이며 웅진강과는 별개의 강이다. 소정방은 작전기지 또는 교두보의 관점에서 동진강, 즉 백강에 상륙하여 병사들의 휴식과 전투준비를 갖추고 난 후, 백제․신라군이 치열한전투를 치른 뒤 천천히 웅진강에 도착한 것이다.”13)라고 하였다.
12)전영래,「三國統一戰爭과 百濟復興運動硏究」,『군사』4,1982,pp.25~27.
『白村江에서 大野城까지』,신아출판사,1996,pp.30~31
13)이종학,「주류성·백강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군사학적 연구방법 고찰」,『군사』52,2004.『한국 군사사 연구』,충남대학교 출판부,2010,pp.24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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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희는 “백강은 泗沘(사비)의 별칭이었으며 백촌강과 백마강은 백강에서 파생한 보다 후대의 이칭일 것이다. 그러므로 백강이란 지명을 고정시킬 수는 없고 부여 사비를 방사원점으로 하여 보다 하류의 곳곳에 백강이 분포하는 것이다. 또다른 가설로는 熊=白(<伯)(大),長)으로 등식화 할 수 있다. 따라서 熊津)>白(伯)江>錦江(錦水)으로, 熊津>伎伐浦>白(伯)江>長岩>岐浦∼長浦로 보아 그 방사원점을 공주 웅진에 두어 있어 금강, 白(伯)江=白村江 등이 파생하므로 곳곳에 백강이 분포한 것이다.”14)고 하였다.
심정보는 “웅진강구 및 백강지구는 다 같이 현재의 금강하구에 해당한다. 장항읍 장암동, 손량 등은『삼국유사』의 ‘長岩又孫梁一作只火浦又白江(장암우손량일작지화포우백강)’과 같으며, 지화포와 기벌포는 同音異寫(동음이사)이다. 그러므로 백강은 금강하구이며 기벌포는 장항이다.”15)고 하였다.
박성흥은 “기벌포는 임천에서 한산사이의 금강을 말하며 백마강의 범주에 속한다. 이 강은 『삼국사기』에 백강으로 나오는데, 이 백강과 달리 백촌강전투가 벌어진 백강은 아산만과 삽교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당진군 석문면과 고대면 일대가 백촌강=백강구이다. 또한 이 지방에 백사, 백석촌, 장암, 지벌포, 손량이라는 포구의 지명도 실존한다.”16)고 하였다.
14)도수희,「白·雄·泗沘·伎伐」에 대하여,『百濟硏究』14,1983,pp.31~32.
15)심정보,「白江의 位置에 대하여」,『韓國上古史學報』2,韓國上古史學會,1989.
「白江에 대한 硏究現況과 問題點」,『百濟文化』32,公州大學百濟文化硏究所,2003.p.182.
16)박성흥,『홍주 주류성고』,홍주문화원,1989.
『내포지방의 고대사와 홍주 주류성과 당진 백촌강 연구』,조양인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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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석은 “『周書』이래로 사비시대의 도읍지를 웅진으로 혼동하여 왕성이름을 따서 백강을 웅진강이라고 했다. 이에 중국에서 금강을 웅진강으로 부른 것과 달리, 부흥운동기간 왕성이었던 부안 주류성 옆의 동진강을 백제 사람들이 부르듯이 백강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17)고 하였다.
이도학은 “당나라 때 쓰인『한원』에 웅진하의 근원은 나라 동쪽경계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서울[國] 북쪽으로 100리를지나며, 또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였듯이 웅진하는금강의 통칭이다. 또『삼국사기』에 당과 신라군대가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계백이 황산에 나갔으나 패전한 직후에 웅진구에서 당나라군대와 싸웠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기벌포와 웅진구는 동일한 장소이지만 백강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여 기벌포와 웅진구는 금강하구이지만 백강은 동진강이다.”18)라고 하였다.
김영관은 “백강은 장암, 손량, 지화포 등으로 불렸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천포영을 고려시대에 장암진성이었다고 하였으니 금강하구의 서천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화포 역시 기벌포의 한자식 표기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소정방은 방어시설이 취약하고 상륙 후 진군하기가 편하며 신라군과 합군하기가 수월한 군산방면으로 상륙하였다.”19)고 하였다.
17)서정석,「백제5방성의 위치에 대한 시고」,『호서고고학』3,2000.
18)이도학,『한국 고대사,그 의문과 진실』,김영사, 2001, pp.208~211.
19)김영관「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로와 금강」,『백제와 금강』,서경문화사,2007, pp.24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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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용은 “백마강의 往津(왕진)으로부터 고다진(현 반조원)까지 흰모래가 많은 백사가 펼쳐져 있고, 부여 쪽에서 보이는 석성면의 파진산은 희여치라 하여 흰바위를 뜻하므로 백강으로 불렸을 것이다. 따라서 백강은 부여 근방 천정대로부터 반조원까지다. 또한「백제본기」의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계백장군을 보내’20)를 ‘곧(已) 지날 것’으로 해석하여 부여 근처의 반조원을 기벌포로 비정한다.”21)고 하였다.
나. 기존연구에 대한 검토
기존 연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웅진강과 백강은 동일한 강으로서 백강을 금강하구로 보며 기벌포는 서천포, 장항, 군산등으로 보는 견해이다.
두 번째는 웅진강과 백강이 서로 다른 별개의 강으로서 백강은 동진강이고 기벌포는 동진강하구의 계화도로 보는 견해이다.
세 번째는 660년 사비도성 함락시의 백강과 663년 주류성 함락시의 백강이 서로 다른 강으로서, 전자의 백강은 웅진강 하구이고 후자의 백강은 동진강, 만경강, 줄포, 내포, 두포천, 아산만 입구, 안성천 하구 등으로 보며 기벌포는 금강하류인 장항 등으로 보는 견해이다.
네 번째는 웅진 앞을 흐르는 강을 웅진강으로, 부여 앞을 흐르는 강을 백강으로 보는 견해로서 기벌포는 석성천과 금강이 만나는 고다진으로 보는 견해이다.
다섯 번째는 백촌강과 백마강은 후대의 명칭으로 백강을 어느 한 곳에 고정시킬 수 없고 곳곳에 백강이 분포한다는 의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백강과 기벌포에 대한 기존연구의 시발은 소정방의 백제 침공로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 연구가 663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는 왜군과 당군이 싸웠던 백강을 규명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도 역사지리학적, 음운학적 방법 등 다양한 접근방식을 시도하고 있지만 오로지 문헌에 의한 연구뿐이었다. 더욱 아쉬운 것은 소정방의 상륙전투에 대한 戰域圖(전역도)를 제시한
20)又聞唐羅兵已白江·炭峴遣將軍堦伯(『三國史記』「百濟本紀」義慈王20年)
21)엄정용,『백강-기벌포 ·탄현 ·주류성의 위치비정-』, 바다기획,2011,pp.7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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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아쉬운 것은 소정방의 상륙전투에 대한 戰域圖(전역도)를 제시한 연구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벌포 위치비정에 한하여 기존의 연구를 구분해 보면, 금강하구인 서천포 및 장항일대, 군산일대, 동진강의 계화도, 부여 근처의 고다진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기벌포가 소정방이 실제 상륙한 지점인가 하는 문제는 검토가 되어야 하지만, 제기된 지역들에 대해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기벌포가 서천포 및 장항일대라는 견해에 대한 검토이다.
이 견해는 진전좌우길, 지내굉, 경부자은, 이병도, 노도양, 심정보, 홍사준, 이도학, 서정석 등이 주장하고 있다. 이 설은 중국 측 사료의 웅진강구나 웅진구는 현재 금강의 입구이며, 소정방이 좌안으로 올랐다는데에22) 근거를 두고 있고,『삼국유사』에 기록된 長岩(장암)이 현재 장항읍 長岩洞(장암동)이라는 근거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정방이 7월 10일 신라군과 백제도성 남쪽에서 신라군과 만나기로23) 하고 7월 9일 웅진강구에 상륙하여 백제군과 전투를 하고 곧장 사비도성으로 진격하고 있다24)는 기록 내용으로 볼때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서천이나 장항에서 부여까지는 직선거리로 34㎞이고 거리 왜곡률25)을 고려하면 50㎞나 되기 때문이다.
고대군대의 일일 행군거리로는 도저히 갈수 없는 거리이며 최소한 4일이 소요26)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부여 사비도성 남쪽에서 신라군과 만나려면 큰 장애물인 웅진강을 도하하여야 하므로 도저히 하루 만에 갈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22)定方出左涯昇山而陣與之戰(『三國史記』, 「百濟本紀」義慈王20年)
23)定方謂法敏曰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與大王兵會(『三國史記』,「新羅本紀」太宗武烈王7年)
24)至熊津江口...定方升東岸...定方於岸上擁陣水陸竝進飛檝鼓譟直趣眞都(『舊唐書』券83列傳第33蘇定方)
25)도상에서 직선거리에 거리 왜곡률 1.472를 곱하면 도보로 갈 수 있는 실제거리가 나온다.(http://blog.daum.net/cdh571/3245)
26)고대 군대의 하루 행군거리는 一舍라 하여 30리로 본다.(이병도역주,『國譯三國史記』,을유문화사,1977.p.425)
중국고대 도량형 1리는 423.9m임(주 25)참조),∴ 50㎞ ÷(1리거리 0.4239×30리)=3.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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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기벌포를 동진강 하구나 계화도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소전성오, 전영래, 이종학 등이 주장하고 있다. 이 설은 소정방이 동안으로 올라 백제군과 싸웠다27)는 기록에 부합되는 강은 남북으로 흘러야 하는데 그러한 강은 동진강 밖에 없으며, 계화도가 음성상 지벌포와 유사하고 계화도에 진흙벌이 형성되어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종학은 작전기지 또는 교두보 관점에서 타당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소정방이 상륙한 동안은 중국 측에서 보면 백제영역 전체를 동안으로 볼수도있으며, 기록에 나오는 갯벌은 웅진강 내륙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당시에 당은 백제침공 시 작전보안을 위해, 왜의 사신도 억류하는 등28)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굳이 대 선단이 기도를 노출시키며 금강입구를 지나 30여㎞까지 남진 했다가 다시 웅진강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7월 10일 사비도성 남쪽에서 신라군과 만나기로 한 당군이 충분한 휴식이나 재보급을 받기 위해서 7월 9일 동진강이나 계화도에 상륙했다는 것은 일정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이다.
한편 작전기지는 각종 작전이 계획되고 지원되는 지역이나 지원시설이 있는 곳이며, 교두보는 도하작전 시 주력부대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고 적절히 방어할 수 있으며 계속되는 공격의 발판을 제공하는 적측에 있는 지역이다.29) 그런데 충분한 휴식과 전투준비를 했다는 것을 작전기지 또는 교두보 개념으로 보는 것은 그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휴식을 취한 후 천천히 웅진강에 진입했다고 하는 것은 7월 9일 당일 백제군과 전투를 치르고 있는 사료의 내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7월 10일이면 신라군과 만나야 하는데 하루전날 동진강일대에서 상륙하여 전투했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27)주 24)참조
28)伊吉連博德書云庚申年八月百濟已平之後九月十二日旅客本國十九日發自西京十月十六日還到東京(『日本書紀』券26,齊明天皇6년)
29)『합동 ·연합작전 군사용어사전』,합동참모본부, 2010, pp.4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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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군산설에 비정하는 견해이다. 군산설은 김영관 등이
주장하고 있다. 군산에 상륙할 경우 부여까지의 거리가 장항보다도 먼 65㎞나 되는데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중간에 논산천이나 석성천 등 하천이 육군에게는 장애물이 되며 곧장 도성으로 갔다는 사료내용에도 부적합하다.
네 번째는 기벌포를 고다진에 비정하는 견해이다. 고다진은 금강과 석성천이 만나는 지점으로 금서룡, 엄정용 등이 주장하고 있다. 이 견해는 앞서 제기한 안정복의『동사강목』과『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부여 가까이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소정방이 상륙 후 전투를 하고 백제도성 남쪽으로 진격하는 일정과 병력운용 측면을 고려하면 타당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 판단이 된다. 하지만 소정방 군대가 상륙한 지점이 기벌포가 맞는지는 검토가 되어야 한다.
3. 군사학적 고찰과 문헌검토
가. 백제의 방어전략과 기벌포
660년 백제가 치른 나당연합군과의 전투는 7월 9일 신라군과
황산벌 전투, 당나라군대와의 웅진강구 전투, 7월 12일 나당연합군의 사비도성 포위공격에 따른 왕성방어전투가 전부로 전해진다.
그리고 7월 13일 의자왕의 아들 융이 사비도성에서 항복하고 7월 18일에는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사비도성으로 와서 항복하고 있다.30) 이를 보면 백제는 세 번의 전투에서
660년 소정방의 백제 공격로에 대한 군사학적 연구 | 13
황산벌 전투를 제외하고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하고 맥없이 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응하여 어떻게 싸우겠다는 전략이나 싸울 의지조차도 없이 맥없이 주저앉은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에 백제의 방어전략을 살펴보고 당나라 군대를 막기 위한 백강 즉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겠다. 다음은 백제가 어디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 토의하고 대응하는 내용을 전하는 사료이다.
A-⓵성충(成忠)이 임종상서에 말하기를 “무릇 군사를 쓸 때는 반드시 그 위치를 살펴 택해야 할 것인데, 상류에 자리 잡고 적을 끌어들인 뒤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언덕에 오르지 못하게 하며 험난하고 좁은 길에 의거하여 적을 막아야 보전 할 수 있습니다.”31)
⓶ 좌평 의직(佐平義直)이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물에 익숙지 못하므로 처음 육지에 내려서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 급히 치면...신라는 당나라군사가 불리한 것을 보면...그러므로 당나라 군사와 먼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⓷ 달솔 상영(達率常永)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예봉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신라를 쳐서 기세를 꺾은 후 형편을 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나라를 보전 할 것입니다.”
⓸ 흥수(興首)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 기율도 엄하고 분명합니다...백강(혹은 기벌포)과 탄현(혹은 침현은 우리나라 요충지여서 한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당나라 군사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며,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 굳게 지키면서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다음 힘을 합해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⓹ 대신들이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그의 말을
30)『三國史記』,「新羅本紀」太宗武烈王7年.
31)『三國史記』,「百濟本紀」義慈王1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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⓹ 대신들이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그의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당군은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물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으로 올라오게 하되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할 수 없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마치 조롱속의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⓺ 왕이 그럴 듯하다 여겼다. 또 이미 당나라와 신라가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혹은 곧 지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계백장군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나아가 신라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싸워 이겼으나...패하였다. 이에 군사를 모아 웅진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지키게 하였다. 정방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에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들은 밀물을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 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으로 나아가 30리(一舍)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32)
사료 A-⓵∼⓹는 백제의 방어전략 내지는 계획이며 사료 A-⓺은 실제 대응한 결과이다. 먼저 어디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백제의 계획을 살펴보자.
사료 A-⓵은 656년 옥에 갇혀 죽어가면서 성충이 의자왕에게 올린 임종상서이다. 전쟁이 난다면 육로로는 침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언덕에 오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강의 상류에 위치하여 적을 끌어들여 싸워야 할 것을 전하고 있다. 사료 A-⓸는 고마미지현에 유배된 흥수의 답변으로 명칭만 탄현과 백강으로 달리 했을 뿐 성충과 같이 요충지에서 방어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사료 A-⓹는 흥수의 말은 믿을 수 없다며 백강과 탄현에 들어오게 한 뒤에 결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 사료 A-⓶, ⓷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토의하고 있다. 즉, 주 전투력을 당군과 신라군 중 어느 쪽에 먼저 집중 투입하여 전투할 것인지를 토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충과 흥수가 말한 침현과 기벌포 중 어느 곳에서 먼저 결전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32)『三國史記』,「百濟本紀」義慈王2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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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다. 결국 탄현(침현)과 기벌포(백강) 2개소를 결정적 장소로 보는 데는 백제의 모든 군신들이 이의가 없는 듯하다. 단지 탄현과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결전하느냐 아니면 들어오기 전에 결전하느냐의 차이와 주력을 어느 곳에 집중하여 방어하느냐의 차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토의된 내용을 보면 백제의 방어전략 내지는 방어계획을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방어목표는 왕성, 즉 도성이다. 도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당군과 신라군을 각개격파 한다. 각개격파를 위한 최적의 장소는 탄현과 백강이다. 탄현과 백강은 나라의 요충지여서 가히 적을 막을 수 있다. 요충지에서 적을 지연시키면서 지치기를 기다린 다음 때를 보아 공격하여 나라를 방어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던 같다.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요충지로 선정된 탄현과 백강(기벌포)은 오늘날 중요지형지물로 볼 수 있다. 중요지형지물은 피아 공히 확보 또는 통제함으로써 현저한 이점을 제공받는 국지 또는 지역이다.33) 중요지형지물을 선정하는 이유는 방어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지형을 선별하기 위함이며, 선정된 지형에 병력을 배치하여 효과적인 방어를 하기 위해서다. 백제는 신라군과 당군이 동시에 침략해 오는 상황에서 도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탄현과 백강(기벌포)에 병력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탄현과 백강이 선정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오늘날 지형분석을 통한 계획수립의 방법으로 당나라 수군을 방어하기 위한 백강(기벌포)가 선정되는 과정을 판단해보고자 한다.
백제의 입장에서 수로를 통한 수군의 공격으로부터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중요지형지물로 고려할 수 있는 지역은 장항과 군산일대, 부여 양화면 입포리 일대, 금강과 논산천이 만나는 부여군 성동면 일대
33)김광석 편저,『용병술어 연구』,병학사,1993.p.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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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강경읍 대안), 석성면 186고지의 파진산 일대 등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강의 입구이거나 또는 강폭이 좁거나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 등으로 고려된 것이다. 이들을 비교분석하기 위하여 요도에 위치를 명기하여 검토해보고자 한다.
<요도 1> 중요지형지물 선정
위 요도에 명시된 중요지형지물에 대하여 방자 입장에서 분석
(war game)을 통하여 최적의 장소를 선정해보자. 주요 분석내용은 고려된 지역에서 효율적인 방어를 위한 관측과 사계, 진지 편성 용이성, 점령시간, 저지 격멸 가능성, 적 지연효과, 당군과 신라군의 합군 저지도 등이다.
우선 지형 “1”인 장항과 군산일대는 침략해 오는 당나라 군대를 원거리에서 조기에 발견하여 격멸할 수 있고, 격멸에 실패하더라도 도성방어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그러나 적보다 월등하거나 대등한 수군 없이는 침략군을 격멸하거나 저지하기에는 불가능한 장소이다. 왜냐하면 장항과 군산과의 양안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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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거리 즉 강폭이 5㎞가 넘기34) 때문이다. 당시의 무기체계를 고려할 때 수군 없이 양안에 배치된 군대로는 당군을 저지할 수가 없는 곳이다. 화살의 비거리는 겨우 145미터35)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멀리 나간다는 노는 사거리 220m여서36) 노를 사용하더라도 도강하는 당군을 저지할 수 없다. 따라서 지형 “1”은 왕도로부터 원거리에 있어 지연효과 가능성이나 양군의 합군을 저지하기에는 용이하나, 도성으로부터 원거리로 진지를 점령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며, 바닷가로서 갯벌이 넓고 길어 진지를 편성하기에도 매우 부적합할 것이다. 또한 금강의 폭과 당시 무기체계를 고려 시 저지격멸 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지형이다.
지형 “2” 양화면 입포리 일대는 강폭이 갑자기 좁아지고 직각으로 꺾이는 곳으로 물살이 빨라지므로 당나라 군대를 수상에서 저지하기에 비교적 용이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포리 일대에는 병력을 배치할 수 있지만 건너편 대붕암리 쪽에는 갯벌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성당리 방면 강가로 병력을 배치할 경우 협조된 공격이 어려울 것이므로 진지편성이 불리하다. 또한 중앙군대를 입포리에 배치하려면 사비도성에서 도강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어 진지점령 시간 면에서 불리한 지점이다.
지형 “3”은 금강과 논산천이 만나는 부여군 성동면 우곤리 및 개척리 야산 일대와 대안의 세도면 장산리 야산은 당나라 군대를 양안에서 협격으로 저지하기에 용이한 장소이다. 그러나 이 지역으로 당군이 상륙한다면 곧바로 육상으로 사비도성으로 진격할 수 있는 지역으로 지연효과 가능성은 떨어지나, 당군이 지천인 논산천 쪽으로 우회하여
34)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1:5만 지도에서 보면 양안 거리가 4㎞이며 군산지역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35)정진명,『한국의 활쏘기』,학민사,2003,p.31.
36)삼국시대의 노는 사거리가 220m였다.(임용환,『전쟁과 역사』, 삼국편, 혜안, 2002. p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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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하여 성동면이나 광석면 쪽에서 신라군과 만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지형이기도 하다. 진지점령 시간은 왕도로부터 약 14키로 이격되어 있어 급박한 상황에서 병력을 배치하기에 용이할 수 있고 갯벌이 짧고 산이 형성되어 있어 진지편성에도 용이하다. 따라서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되고 지켜져야 하는 곳이다.
지형 “4”는 석성면 파진산 일대로 인근에서는 비교적 높은 186미터의 산악이며, 사비도성으로 이르는 주요 도로를 통제는 물론 감제 관측할 수 있고 또 산 아래는 강폭이 좁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왕도와의 거리도 10킬로서 짧은 시간에 진지를 점령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산악이 있어 저지격멸 가능성도 양호한 곳이다.
하지만 파진산 앞쪽의 하봉정리와 석성리 일대는 포구 형태로 되어있어 진지편성 시 유휴 병력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왕도와 거리가 너무 가까워 지연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며 탄현으로 접근하고 있는 신라군과의 합군 저지에도 매우 불리한 지역이다. 이 지역을 당군에게 내어 준다면 사비도성이 바로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중요지형지물 선정 분석표
구 분
관측과 사계 진지편성 용이성
진지점령 시간 저지격멸 가능성
지연효과 가능성
당·라합군 저지도
순위
지형 “1” ― × × × ○ ○ 4
지형 “2” ― × × △ △ ○ 3
지형 “3” ― ○ △ ○ × △ 1
지형 “4” ― △ ○ ○ × × 2
이상에서 볼 때 고려된 지형 “3”이 도성방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중요지형지물로 선정될 수 있다. 즉, 금강과 논산천이 만나는 부여군 성동면 우곤리와 개척리 야산 일대에 주병력을 배치하여 당군을 저지 또는 격멸하며, 논산천으로 우회하여 신라군과의 합군을 저지 또는 지연시켜야 한다. 따라서 본고는 백제가 지키고자 했던 기벌포의 위치를 성동면 우곤리와 개척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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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선정된 지역이 과연 타당한지를 사료의 기록내용을 통해 검증해 보고자 한다.
사료 A-⓵에서 성충은 강의 상류에 위치하여 적을 끌어 들인 연후에 라고 하였다. 상류에 해당되는 지역은 지형 “3”과 “4”이다. 사료 A-⓸에서 흥수는 백강이 나라의 요로로서 장부 한사람의 단창으로도 만 명을 당해 낼 수 있다며 당병이 백강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백강의 요로라 함은 강폭이 좁아지는 지역일 것이므로 장항이나 군산지역은 될 수가 없다. 강의 폭이 좁아지는 지역은 지형 “2”, “3”, “4”가 해당이 된다.
그러면 백강은 과연 어느 곳인지가 규명 되어야 한다.『삼국사기』의 백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웅진에 도읍하고 있던 501년에 백가가 동성왕을 죽이고 502년 가림성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무령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는 기록이다.37) 이 기록에 의하면 백강은 가림성 근처이어야 하므로 현재 부여군 세도면과 임천면 일대일 것이다. 가림성은 현재 임천의 성흥산성38)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갑자기 비바람이 닥치자 백마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다 하여 조룡대라 하고, 강을 백마강 이라고 하였다39)는 전설기록도 백강이 부여지방임을 나타내고 있다. 전설에서 유래한 백마강은 부여지방, 정확하게는 천정대로부터 반조원까지 흐르는 강에 대해 500여 년간 불려 지던 명칭이었다.40)
37)『三國史記』,「百濟本紀」東城王23年/武寧王元年.
38)『新增東國輿地勝覽』券17林川郡建置沿革條.
39)『世宗實錄地理志』忠淸道公州牧扶餘縣條.
40)엄정용,앞의 책,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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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A-⓹에서는 대신들이 흥수의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믿을 수 없다며, 오히려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 흐름에 따라 배들이 서로 돌리지 못하도록 하게 한 후 공격하여야 한다고 한 기록에서 강폭이 좁은 곳임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지형 “2”, “3”, “4”가 해당 될 수 있다.
사료 A-⓺에서는 계백이 죽은 뒤에 군사를 모아 웅진구에서 당군과 싸웠다고 하고 있다. 내용상으로 보아 시간적으로 사비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사비도성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강은 부여근처를 흐르는 강일 것이며 백마강이다. 문제는 사료 A-⓺의 ‘又聞唐羅兵已白江· 炭峴’를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처럼 ‘당군이 이미(已)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로 해석하면 설명이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미 통과한 것으로 보면 부여근처에서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앞서 제기한 엄정용의 ‘곧(已) 지날 것’이 타당한 해석41)이라고 판단한다. 이상과 같이 사료 A-⓵~⓺을 모두 충족하는 장소는 지형 “3”이나 지형 “4”이다.
그런데 앞서 중요지형지물 선정 분석표와 대비시켜 보면 지형
“3”이 공통분모가 되며 기벌포라고 여겨진다. 즉, 백제인이 전하였을 『삼국사기』「백제본기」를 기본으로 하고, 장소의 본질에 맞는 방자 입장에서의 군사학적인 지형분석 결과 기벌포를 성동면 개척리와 우곤리 일대로 비정하고자 한다.
나. 소정방의 침공전략과 웅진구
성산을 출발한 당나라 소정방은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고, 6월 21일 태종 무열왕이 태자 법민에게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정방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방은 태자에게 ‘나는 수로로 가고
41)엄정용,앞의 책,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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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 백제 남쪽에서 신라군과 만나 도성을 치기로 한다’고 하였다. 이 후 정방은 7월 9일 웅진강구(웅진구, 기벌포)에 상륙하여 백제군을 대파하고 곧장 사비도성 남쪽 20여리가 못 미치는 지점에 도착하다.42) 소정방은 백제를 침략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침공 일정은 기록상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루트로 들어왔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상륙하여 백제군과 싸웠다는 지역이 사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상륙지점을 알아보기 위하여 소정방의 백제 침공전략을 알아보고 웅진강구(웅진구) 즉 기벌포의 위치를 비정해 보고자 한다. 다음은 소정방의 백제 침공 시 상륙전투와 기동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사료들이다.
B-⓵정방이 성산으로부터...웅진강 어귀에 이르자 적이 강에 의거하여 지키고 있었다. 정방이 동쪽지역으로 상륙하여 적과 대전을 벌였다...돛을 올린 범선이 바다를 덮고 잇따라 도착하였다...조수가 밀려들자...전선이 꼬리를 물고 강으로 들어갔다. 정방이 진을 지키다가 수륙양면으로 함께 진격하여 곧장 진도로 가 20리 못 미치는 지점에 나아갔다. 43) ⓶정방이 웅진구에 이르자 적이 강의 물가를 지키고 있었다. 정방이 왼쪽지역으로 상륙하여...정방이 기병과 보병을 좌우로 인솔하여 곧장 진도성으로 달려 나아갔다. ⓷백제가 웅진구를 지키고 있었다 정방이 공격하자 오랑캐는 대패하였다.
천자의 군대가 조류를 타고 돛을 올려 나아가서 진도성 30리 지점에 멈추었다.44)
⓸백제가 웅진의 강어귀에 의거하여 저항하였다...정방이 수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한꺼번에 진격하여 곧장 백제의 도성을 향해 나아갔다....20리 채 안 되는 곳에 이르렀다.45)
42)『三國史記』,「新羅本紀」太宗武烈王7年;列傳金庾信傳;『舊唐書』;『新唐書』;『資治通鑑』등.
43)『舊唐書』券83列傳第33蘇定方.
44)『新唐書』券111列傳第36蘇定方/券220列傳第145東夷百濟.
45)『資治通鑑』券200唐紀16顯慶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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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⓵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파하고자 한다....이날 정방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군을 만나 (혹은 역으로) 공격하여 대패시켰다. 유신 등이 당나라 진영에 이르자...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46)
⓶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해로로 가고 태자 등은 육로로 가서 7월 10일 백제왕도 사비성에서 만나자’...정방과 김인문 등이 바다로부터 기벌포로 들어섰는데 해안이 진흙이어서 빠져서 나아갈 수가 없으므로 버드나무 자리를 깔고 군사를 진군시켜 신라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멸하였다.47)
⓷당나라 군사를 인도하여 웅진구에 이르니 적군이 강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도성에 들어가 멸하였다.48)
사료 B-⓵~⓸는 소정방이 침공 시 백제군은 웅진강구에 상륙하여 백제군을 대파하고 조수를 타고 곧장 백제의 도성 남쪽에 도착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상으로 보아 소정방은 강가를 지키는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일 백제 도성남쪽에 도착하고 있다.
단지 B-⓶, ⓷에서는 웅진강구가 웅진구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 사료 C-⓵에서 이날(是日)은 계백장군이 김유신과 황산벌에서 전투를 벌인 날이다. 이날은 또한 사료 B-⓵~⓸와 같이 소정방이 상륙하여 백제군과 전투를 벌인 날이다. 이때 백제군의 선전으로 신라군은 약속기일에 늦었음을 사료 C-⓵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료 C-⓶, ⓷에서 소정방은 해로로 이동하였고 진흙 벌을 통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역으로 종합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소정방의 공격 전략을
설명할 수 있다. “공격목표는 의자의 도성이다. 목표에 대한 공격을 위해 7월 10일 사비도성 남쪽 20리 지점49)에 집결지를 선정한다.
46)『三國史記』,「新羅本紀」,太宗武烈王7年.
47)『三國史記』券42列傳第2金庾信中.
48)『三國史記』券44列傳第4金仁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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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지에서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만나 함께 공격한다. 집결지까지 기동은 전투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하여 하루 전인 7월 9일까지 해로로 이동한다. 7월 9일 상륙지점은 적의 예상 저항과 어떤 지체시간을 고려하여 최대한 가까운 곳에 선정 되어야 한다. 상륙 후에는 1일 밖에 시간이 없으므로 집결지50)까지 신속하게 기동하여야 한다. 따라서 신속한 기동을 위하여 승하선 없이 수군과 육군이 나란히 병행 진격하여 집결지에 도착한다.”
이러한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접근로51)를 판단해 보자. 우선 덕물도에서 부여로 접근하기 위한 접근로는 먼저 최단거리 접근로로는 아산만~송악~유구읍~신풍~정산~부여에 이르는 접근로 “1”을 고려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보령시 웅천읍~주산~미산면~홍산~부여에 이르는 접근로 “2”를 고려 할 수 있으며, 세 번째는 현재의 금강 수계를 따라 곧장 부여로 들어가는 접근로 “3”이 고려될 수 있다.
<요도 2> 예상 접근로
49)고대 도량형표를 이용 20리 안되는 지점은 8.5킬로 이내인 지점이어야 하는데 15만여의 군사가 들어가기에 가능한 장소는 석성면 정각리 일대로 추정된다.
50)부대가 차후 행동을 개시하기 위하여 집결하는 장소로 전투편성을 완료하고 명령을 하달하는 장소이다.(김광석 편저,앞의 책,p.618)
51)특정규모의 부대가 중요지형지물 또는 목표까지 이르는 진로(김광석 편저,앞의 책 p.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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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당연히 단거리 접근로인 “1”이나 “2”가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일일 육로 행군거리가 지극히 제한된 상태에서 해로나 강수로를 제쳐놓고 접근로 “1”, “2”를 택할리 없다. 또한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앞서 추정한 소정방의 백제공격전략에 따른다면 당군의 접근로는 금강을 따라 곧바로 부여로 들어가는 접근로 “3”이 될 수밖에 없다. 접근로 “3”을 택하여야 전투력을 보존하며 최대한 집결지 가까이까지 양호한 수로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접근로 “3”은 사료 C-⓶에서 소정방이 태자에게 말한 “吾由海路 太子等陸行(오유해로 태자등육행)”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그러면 접근로 “3”에서의 상륙지점인 웅진구는 어떻게 계산되어 나왔을까? 상륙지점은 일반적으로 적의 배비가 약하고 접안이 용이하여야 하며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엄호부대 등이 충분히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상륙 후 차후 작전인 집결지까지 기동을 위해 곧바로 진격할 수 있는 종격실 능선 등이 있어야 한다. 한편 소정방의 백제공격 전략대로 적의 저항을 고려한 어떤 지체시간이 반드시 소요 될 것이므로 고대 하루 진격거리52)보다도 훨씬 짧은 거리를 기동하도록 선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선정될 수 있는 지역으로 금강이 석성천과 만나는 지역의 봉정리나 석성리(“a”)나 논산천과 만나는 지역의 우곤리나 개척리(“b”) 등이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연구자들은 웅진강구라는 기록이나 기벌포의 음운학적 유사성에 집착하여 서천지역(“c”) 군산지역(“d”) 계화도지역(“e”) 등을 비정하였다.
52)주 26)에 의거 고대 군대의 일일 행군거리는 12.7㎞로 계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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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 3> 예상 상륙지역
이들 비정된 위치를 포함하여 당군 입장에서 장단점에 의한 분석 방법53)에 의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표 2> 상륙지점 선정 분석표
구 분 단점 장점 순위
상륙
“a”
엄호부대 공간 다소 협소, 집결지까지 약 8㎞의 양호한 기동로 형성, 장애물 없음
1
상륙
“b”
석성천을 도하 또는 우회해야 함. 실패 시 논산천 방향으로 상륙하여도 집결지 도착가능
2
상륙
“c”
금강을 도하해야 하며,부여까지 50㎞를 하루 만에 갈 수 없음.
―
상륙
“d”
논산천과 석성천,산북천을 도하해야 함.고대 군산은 지금과 달리 여러 개 섬이었음.
―
상륙
“e”
고대선박의 기동은 노에 의존하므로 원거리 선회는 전투력보존에 불합리.
덕물도 1차 기항지 외에 2차 기항지로 계화도까지 갔다 올 필요가 없음.
―
53)지형분석 시 시간이 충분하면 요소에 의한 비교분석을 하지만,시간이 없거나 비교가 명확히 구분이 되면 장단점에 의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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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볼 때 “c” “d” “e” 지점으로 7월 9일 상륙하여서는 하
선한 육군이 7월 10일에 부여 남쪽 20리 지점까지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어서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 상륙 “a” “b”가 집결지까지 정해진 시간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의 상륙장소가 될 것이다. 그런데 “b”는 석성천을 도하하거나 우회하여야 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상륙 “a”는 상륙 후 신라군과 만나기로 한 집결지까지 기동이 용이한 장점이 있다. 따라서 소정방의 상륙지점은 정확하게는 봉정리 석성리 일대가 소정방이 상륙한 웅진강구 내지는 웅진구라고 판단한다.
다음은 판단된 지점이 타당한지 여부를 사료의 기록내용을 통해서 검증해 보고자 한다. 사료 B-⓵, ⓶의 東岸(동안)이나 左岸(좌안)의 방향에서 중국은 조선을 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라 하여 海東(해동) 또는 海左(해좌)라고 부르며, 조선 시대에도 관념적으로 부산 동래 수영을 경상우수영으로, 여수에 있는 수영을 전라좌수영이라고 하였으므로 동쪽과 왼쪽은 표현상의 차이일 뿐54)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석성면 봉정리와 석성리의 지역은 종심이 약 4㎞ 폭이 2㎞의 포구 형태로 되어 있다. 만조 시에는 포구 역할을 하며 간조 시에는 벌이 형성되는 지역이다55). 당군 입장에서 보면 소강하면서 상륙하기 위하여 이 지역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상륙하면 사료 B-⓵, ⓶와 같이 동안으로 오른 것이며, 좌안으로 오른 것이 된다.
사료 B-⓵~⓸에서 수군과 육군이 곧장 진도로 달려갔다는 기록은 중간에 어떤 장애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할 일이다. 따라서 장항이나 군산에 상륙할 경우 중간에 금강을 도하해야 하므로 사비도성까지 하루 만에
54)김영관,앞의 논문,p.244.
55)1918년 조선 총독부 발행 1:5만 조선반도 전도에서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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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까지 하루 만에 갈 수도 없으며 곧장 진도로 갔다는 기록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금강이 논산천과 만나는 지점에 상륙 시에도 석성천을 도하 하여야 하는 다소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곧장 진도로 달려갔다는 사료내용에 부합되는 지점은 금강이 석성천과 만나는 봉정리 석성리 일대라고 판단된다.
문제는 사료 B-⓵, ⓸에 기록된 웅진강구는 현대적 의미로 보면 웅진강이 금강이라고 볼 때 웅진강구는 당연히 금강의 해구인 서천이나 군산이 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혼돈 하는 부분도 이 부분이다. 고대에 불렸던 웅진강의 범위가 명시되어 있다면 웅진강구는 쉽게 규명될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사료로는 웅진강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구를 오늘날 개념으로 바다에 닿은 곳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고대에 웅진강구라 불렀던 사료의 다른 내용을 분석해보자. “용삭원년(661년) 3월 도침이 부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하자 인궤가 신라군을 출동시켜 함께 싸우니 도침 등이 웅진강구에 두 개의 책을 세워 관군에게 저항하였다. 인궤가 사면으로 협격하니 책안으로 들어가려다 물이 막히고 다리가 좁아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이었다. 이에 도침이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났다”56)는 기록을 보면 양책을 세운 곳은 아마도 부여부성을 포위한 부흥군을 지휘하는 지휘부 내지는 부흥군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웅진강구의 위치는 부여에서 가까운 곳임에 틀림이 없다. 부흥군의 포위선이나 지휘부 또는 근거지가 부여부성으로부터 50㎞나 이격된 서천의 장항이나 군산에 위치할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물이 막고 다리는 좁다’라고 기록된 부분에서, 고대에 4~5㎞가 되는 장항과 군산에 다리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56)劉仁願留鎭於百濟府城道琛等引兵圍之...新羅兵合勢以救仁願...道琛等於熊津江口
兩柵以拒官軍仁軌與新羅兵四面夾擊之賊衆退走入柵阻水橋狹(『舊唐書』券199
列傳第149東夷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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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강의 범위를 알 수 있는 다른 기록을 보자.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웅주를 공주로 바꾸고 강의 명칭도 웅진강에서 공주강으로 바꿔 불렀다.57) 웅진강은 공주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백제시대 명칭으로 상류는 금강진으로 부터 웅진(곰나루)을 지나 탄천까지를 일컫는다고 한다.58) 웅진강의 범위가 탄천까지라고 볼 때 웅진강구는 서천 장항이나 군산이 아니라 당연히 부여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한편 사료 B-⓶, ⓷에서는 웅진강구가 웅진구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웅진강구나 웅진구가 동일한 장소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신당서』에서만 왜 웅진구로 표기 되었을까?『구당서』를 기본으로 하였을 『신당서』의 찬자가 ‘江(강)’字(자)를 누락시켰다고 보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웅진강구가 전부 웅진구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어떤 근거가 있어 웅진구로 바꾸었을 것이다. 웅진강구라고 보기 보다는 웅진구가 적합할 것으로 판단하여 바꿔 기록한것은 아닐까? 즉, 소정방이 상륙한 곳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강구인 서천이나 군산이 아닌 곳이어서 웅진구로 바꿔 기록한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강구의 개념이나 표현이 일반적으로 오늘날 생각하는 바다로 들어가는 위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추측 할 수 있다.
다음은 중국 측 사료가 아닌 신라 측 사료 C-⓵~⓷의 내용과
부합여부를 검토해 보겠다.
C-⓵에서 정방은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군을 만나 역으로 공격(逆擊)하여 대패시켰다고 하고 있다. 물론 逆擊(역격)에서 ‘逆(역)’字(자)의 뜻에 ‘마주하다’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였거나 마주하다 또는 맞서 싸웠다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 측 사료에서
57)八曰,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並趨背逆(『高麗史節要』第1券太祖26년(943) 訓要第8條)
58)엄정용,앞의 책,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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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서 역격이라는 표현은 쉽게 찾아지지가 않는다. 그러면 역으로 공격했다는 ‘逆擊(역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는 목표에 대한 공격방향에 거슬러 뒤에 있는 적을 공격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역격했다는 상황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앞에서 백제조정에서 판단한 기벌포를 금강과 논산천이 만나는 지역으로 판단한 바 있다. 백제군은 우곤리와 개척리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정작 소정방은 이로부터 4㎞를 더 거슬러 올라가 봉정리 석성리 일대로 상륙한 것이다. 상륙 후 당군은 봉정리 석성리 일대로부터 개척리 우곤리 일대로 공격한 것이다. 공격 방향으로 보면 사비도성 방향이 아닌 역방향이 되며 역격이 되는 것이다.
요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요도 4> 백제군의 배치와 당군의 상륙전투
그러면 어떻게 백제군이 배치된 지역을 쉽게 통과하였을까? 사료B-⓵~⓸에서 당군은 백제군을 격파하고 나서 조류를 타고 진격하였으므로 전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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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므로 전투가 끝나는 시간이나 사비도성으로의 진격을 개시한 시간은 만조가 시작되는 시간일 것이다. 따라서 상륙 및 전투시간은 아마도 간조 시간대인 오후 2시 전후한 시간이며, 집결지 도착 시간은 만조 시간인 저녁 8시경으로 추정된다.59) 간조시간에 논산천 일대에 형성되었을 벌로 인하여 백제군은 방어에 불리하였고 당군의 통과는 용이했을 것이다. 당군의 통과를 쉽게 허용한 백제군의 방어상 허점은 사료 A-⓺의 계백이 죽고 나서 병력을 모아 웅진구를 막았다는 기록에서 시간상으로도 병력배치가 불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군은 바로 간조시간대에 갯벌이 형성된 백제군 배치지역인 기벌포를 통과하였기에 백제군의 공격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석성천 일대에 형성된 갯벌에 버드나무 자리를 깔고 상륙했던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해안의 갯벌에 버드나무 자리를 깔고 상륙했다”는 C-⓶기록을 이유로 기벌포를 해안으로 비정하고 있다. 현지답사 간 만난 주민 유병학60) 씨는 옛날에는 강경포구는 물론 봉정리 일대도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논산천과 석성천이 금강과 만나는 지역 일대는 조선총독부의 1910년대 지도에는 泥濘(이녕)이 명확히 도식되어 있다. 한편 지금은 제방으로 물이 차지 않고 있지만 논산천과 금강이 만나는 강경포구 일대의 들판은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처음 이 지역을 지나는 사람들은 비닐하우스가 많은 이 지역을 바다로 착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제방이 없고 수량이 지금보다는 풍부했을 660년경의 환경은 바다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료 C-⓶의 ‘沿海入伎伐浦 海岸59) 2015년 음력 7월 9일 장항지역 조석예보가 01:44(212m)▼, 07:14(599m)▲, 14:01(182m)▼, 19:52(586m)▲이므로 1300년 전인 당시에도 같을 것이다.(국립해양조사원)
60)부여군 규암면에 거주하는 86세의 주민으로 현재도 간척지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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泥濘(연해입기벌포 해안이녕)’로 기록된 것은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당군의 접근로 및 상륙지점에 대한 군사학적인 지형분석과 사료 분석내용을 비교하여 금강과 석성천이 만나는 지역 일대가 중국 측 사료에 기록된 웅진강구 내지는 웅진구라고 판단한다.
즉, 소정방은 공격자의 입장에서 신라군과 만나기로 한 집결지까지의 도착시간을 역으로 계산하고, 상륙 후의 장애물이나 이동거리를 고려하여 상륙지점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 일대는 파진산에서 가까운 골짝이 있는데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쪽으로 갈수록 깊고 넓어 소정방이 1만 명의 군사를 숨겨 두었다는 군장동 전설이61) 전해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사료에 기록된 웅진강구 또는 웅진구를 석성면 봉정리와 석성리 일대로 비정하고자 한다.
4. 맺음말
백제는 7세기 동아시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한 백제의 도성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7월 13일 함락되고 의자왕은 18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7월 11일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 남쪽 20리가 못되는 정각리 일대에 집결한 후 왕성에 대하여 포위공격을 개시한지 3일만이었다.
신라와 신라가 끌어들인 당시 중국을 통일한 동아시아의 거대한 국가 당과의 전쟁으로 백제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 중에 백제가 13만의 소정방 당군과 어떻게 싸웠는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료의 제한으로 당시 전투상황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61)부여군 석석면 군장동에 관련된 전설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어 있다.
(황인덕,「‘백제패망’전설들로 본 백제사,백제사 의식」,『백제연구』24,1994. p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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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우선 전쟁지역을 먼저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즉, 전투 장소는 전쟁사 연구에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므로 기벌포의 위치와 소정방의 공격로에 대한 위치를 비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소정방의 백제 침공로 즉 상륙지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여 혼선을 주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연구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종전의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다른 방법이란 바로 비정하고자 하는 위치에서 행하여진 전투행위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즉, 본질에 접근하는 과정 속에서 답을 얻고자 하였다.
찾고자 하는 위치는 백제 측에서 보면 당군의 진입을 저지하고자 했던 백강의 기벌포이며, 당 측에서 보면 대군이 상륙하여 백제군을 격멸하고 백제의 도성을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적인 지역으로 웅진강구 또는 웅진구이다. 행위의 본질로 구분해 보면『삼국사기』가 전하는 기벌포는 방어하였던 곳이고, 중국 측 사료가 전하는 웅진강구 또는 웅진구는 상륙 또는 공격하였던 곳이다. 행위의 주체가 防者(방자)와 攻者(공자)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방자와 공자는 서로 상충되는 목표 달성을 위해 계획을 수립한
다. 방자의 계획수립에는 병력배치를 위한 중요지형지물을 어디로 할 것인가가 포함되며, 공자의 계획수립에는 접근로와 상륙지점 등을 어디로 할 것인가가 포함된다. 이러한 위치를 선정하기 위하여 공자와 방자는 여러 장소를 고려하되, 고려된 여러 지역에 대하여 War game을 통하여 최적의 장소를 선정하게 된다. 이 과정은 계획수립을 위한 지형분석 과정이다. 지형분석을 통하여 최적의 장소로 선정된 지역에 방자는 병력을 배치하고, 고려되었으나 제외된 지역에는 장애물 등 최소한의 배비를 한다. 공자는 지형분석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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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여 선정된 접근로와 상륙지점 등에 대하여 정해진 시간까지 어김없이 도달하거나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러한 과정이 고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양자 모두 명운을 건 싸움에서 이 정도의 사고는 오늘날과 같이 공통되게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지형분석을 통한 계획수립 과정을 통해 위치를 비정하고자 하였다. 먼저 백제의 방어 전략을 알아보고, 병력배치를 위한 중요지형지물 분석을 실시함은 물론 사료와의 부합여부를 통해 검증하고자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唐(당)에 대해서도 전쟁결과를 통해 그들의 침공전략을 도출해 내고, 목표에 이르기 위한 접근로 및 상륙지점에 대한 지형분석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정되거나 고려된 지역에 대하여 사료의 내용을 가지고 검증하고자 하였다.
검토결과 백제는 금강과 논산천이 만나는 개척리와 우곤리 일대의 백강(기벌포)에 병력을 배치하여 당군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소정방은 금강을 주접근로로 하여 백제의 허를 찌르며 병력이 배치된 기벌포를 지나 백제군의 4㎞ 후방인 금강과 석성천이 만나는 봉정리와 석성리 일대의 웅진강구(웅진구)에 상륙하여 백제군을 후방에서 공격한 셈이 되었다.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전쟁성패의 원인은 추후에 다루어야 하겠으나 개략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전쟁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병력동원을 다하지 못하였다. 또한 기벌포에 병력배치 시기를 상실한 점과, 수군의 존재여부는 알 수 없지만 수군으로 하여금 지금의 장항이나 군산 등 원거리에서 저지를 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소정방은 사전 철저한 준비와 신라와의 연합 및 양공작전 그리고 대군의 성세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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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백제와 당과의 전쟁에 대한 일면을 검토하면서 전쟁사에서 중요한 전투지역에 대하여 군사학적인 측면에서 계획수립을 위한 지형분석 방법을 통하여 그 위치를 비정하고자 하였다.
결국 전투위치에 대한 위치비정은 역사지리학적 방법이나 음운학적 방법 등, 어느 한 분야의 연구로는 완성될 수 없고 사료에 바탕을 둔 군사학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하며, 비정하고자 하는 위치가 갖는 본질에 접근함으로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제언하고 싶다.
[원고투고일: 2015.12.30, 심사수정일: 2016.2.16, 게재확정일: 2016.2.19.]
주제어 :소정방,防者(방자),攻者(공자),웅진강구(웅진구),백강,기벌포,
중요지형지물,접근로,상륙지역,逆擊(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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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Geographical Study on Su Dingfang’s Path of
Attack on to Baekje in AD 660.
Lee, Jae-joon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search for locating the landing spots and defensive positions of Baekje while Su Dingfang of Tang Dynasty invaded into the country in AD 660. While Chinese historical sources show that Su Dingfang entered into Baekje through Ungjin Gang Gu or Ungjin Gu which means ‘Ungjin River mouth’, Korean historical sources such as ‘Samguk Sagi’,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indicates it was Gibulpo or Baek River.
In this case of Su Dingfang’s attack on Baekje, Gibulpo or Baek River in Samguk Sagi was area where Baekje forces tried to defend.
On the other hand, Ungjin Gang Gu or Ungjin Gu recorded in Chinese sources was Tang forces’ landing area to attack Baekje. In this context, this paper examines each place reflected by different points of view – the defense and the offense.
The defense carries out terrain analysis(war game) to develop strategy to defend against its enemy, which entails identifying key terrains, and deploying combat forces. Baekje must have done the same tactics in its own time. This study concludes that Baekje forces were sent out to an area around Gaechuk-ri and Ugon-ri, where Geum River and Nonsan Stream met – as stated Baek River or Gibulpo written in the historical source.
The offense also is conducted by terrain analysis(war game) to formulate attack strategy, which involves selecting avenues of approach, landing and assembly area. This study finds that T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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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ces cruised along Geum River to enter Baekje. They landed on area around Bongjeong-ri and Seoksung-ri, where Geum River and Seoksung Stream met – indicated as Ungjin Gang Gu or Ungjin Gu according to the historical source – and struck down the opponent from the back. The avenues of approach and landing area were the most efficient path to their assembly point.
To conclude, Baek River or Gibulpo in which Baekje formed a defense line, and Ungjin Gang Gu or Ungjin Gu where Su Dingfang touched down are two different locations. These areas are close to each other, but in fact, Su Dingfang passed Baekje’s disposition, landed on Ungjin Gang Gu or Ungjin Gu, and launched an attack from the back.
Today, locations of Su Dingfang’s avenues of approach and landing areas differ among researchers because most studies overlook the terrain analysis based on military point of view, if not adopt improper research methods. therefore, it is only possible to accurately locate battle fields by conducting military geographical analysis(war game) which takes into account nature of battles.
KeyWords:SuDingfang,theDefense,theOffense,UngjinGangGu, BaekRiver,Gibulpo,KeyTerrains,AvenuesofApproach,
LandingArea,Strikefrom theBack
첫댓글 소정방이 이끈 13만의 당군을 태우고 수백척의 배가 금강을 거슬러 올랐을지는 의문이지만,
정설로 굳어가는 부안 우금산성의 주류성설을 반박할 수 있는 설명에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