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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리얼리즘과 ‘새로움’의 의미
임현준
―고재종, 「동짓날에 동지죽도 못 쑤고」, 애지, 2025년 겨울호.
―손월언, 「금오도3」, 창작과비평, 2025년 겨울호.
―이소호, 「로시냐의 딸들」, 대산문화, 2025년 겨울호.
―김기택, 「바다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낭비했을까」, 문학과사회, 2025년 겨울호.
―백지, 「누가 내게 여름에 대해 물으면」, 애지, 2025년 겨울호.
문학에서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대개의 문예사적 개념처럼 모호하면서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된다. 어쩌면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사조들의 지향점이거나 반면교사로서 창작 태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문화·예술적 경향들도 리얼리즘적 요소의 농도와 깊이를 전제하고 풀어내면 어느 정도 변별적 설명이 가능할 정도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개념은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정치·사회적 입장에 따라 혹은 상이한 문학적 관점에 따라 얼마간씩 달리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의 문학사에서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에 얼룩진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려내는 것으로서 자연주의적 사실주의로 이해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와 같은 광의 또는 변질된 의미의 협소한 리얼리즘에 대한 이론적 양식이나 역사적 흐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이 글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삶이 스스로 이끌어 가는 현실을 기본 전제로 다룬다는 점, 그러니까 인간은 실체적인 현실 위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의미 차원에서 시적 리얼리즘을 밑자락에 깔고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알타미라동굴 벽화에 그려진 동물과 사냥의 재현이 자연주의적 모사론과 관련 있다면 리얼리즘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술의 본질 또는 문학과 시의 본질이 현실 관찰과 현실 참여에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시는 현실의 참여이고 관찰이다. 이 말은 시가 사회운동 같은 물리적 참여가 아니라, 현실과 괴리될 수 없는 총체적인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적 리얼리즘은 시인의 세계관이 현실 속에서 부단히 변화되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발현될 수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시의 진정성이 생기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감의 장이 열린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현실은 우리 시인들에게 어떤 시적 리얼리즘을 제공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우리 시인들은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노래하고 있는지도 따져볼 수밖에 없다. 소위 IT에 기반을 둔 혁신적인 기술이 우리의 생활양식 지형에 커다란 변화를 불어 넣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제미나이와 챗지피티 같은 인공지능, ‘제2의 인터넷’이라 불리는 블록체인 기술, 피지컬 AI, 사물인터넷, 드론, 메타버스 등이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산업에 도전하며 변혁을 주도하고 있다. 유통과 금융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변화는 입고 먹고 잠자는 생활의 형태 또한 변화시킨다. 일론 머스크가 예견했듯이 기술의 목적지는 인간의 육체와 노동의 완전한 분리에 있을지 모르겠다. 일하지 않아도 생명 유지를 위한 물자가 생산되는 사회, 단순한 생명 유지가 아니라 안락과 윤택의 혜택을 누리는 사회, 나아가 질병과 노화를 극복하고 수명을 오래오래 늘리는 사회, 지구 바깥까지 개개인의 욕망과 욕구를 우주적으로 확장하는 사회 같은 희망적인 목표가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혁신적인 기술 현실의 지향점일 터이다.
문제는 수명을 연장하면서 일하지 않아도 안락과 윤택을 우주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사회가 자본주의 세계관 위에서 기획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론적 입장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과 경쟁을 위시한 자본주의사회가 우리의 현실을 작동시키는 원리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 첨단 과학기술의 혜택을 만민이 공평하게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시점에서의 현실이 직면한 엄혹한 문제이다. 부조리하게도 주류와 비주류, 빈곤과 가난, 중심과 주변, 소수와 다수 같은 이분법적 현실 국면이 효율과 경쟁이라는 명목하에 용인을 넘어 당연시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효율 앞에서 모든 개개인은 상대적으로 분절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 IT를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기술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진짜 문제는 ‘개별적인 존재’의 소외와 도태이다.
이러한 혹독한 현실은 시에도 영향을 미친다. 수많은 언론 매체가 변혁하는 새로운 세계의 미래를 희망차게 점치는 가운데 시인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세상은 변해도 먹고사는 냉혹한 현실은 변하지 않음을 체감하는 가운데 시는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가. 어떤 상상력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참여해야 시적 리얼리즘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우매하면서도 명확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리얼리즘은 태도이다. 특히 시의 리얼리즘은 현상과 사물과 인간을 표현하는 예술적 방법이면서 세계에 대한 태도이다.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가려지고 잊힌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태도, 그 진지한 태도가 시적 리얼리즘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 시인들에게는 그게 필요하다.
호박만 해진 당숙모가 전동차를 몰고
세월아 네월아,
모퉁이를 돌아 노인당에 가지요
호미등처럼 굽은 할매는 유모차를 밀고
정자나무 밑을 지나다 쉬엄쉬엄,
먼 산 바래기하고요
동지섣달 들어
비깜도 안 하난 망백노인을 찾아보니
보건소가 설치해준 지니하고나 종일 다투고
감나무집 구들더께 옹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다시는 못 돌아올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간 오늘,
마을에 놀 사람이 별로 없어 시들해진 태양도
오후 서너 시쯤에
일찌감치 까치봉 너머로 퇴근하자
강둑에 곧추 곧추 늘어선 미루나무
그 긴 고독들만
바람에 웅웅거리며 동계 훈련하는 동지네요
―고재종, 「동짓날에 동지죽도 못 쑤고」, 애지, 2025년 겨울호.
근래 우리 시단의 몇몇 유행을 푸념 섞인 말로 힐난해 보자면, 공허한 자기 내면에 매몰되어 있거나 낯선 외래어를 남발하거나 이미지 없는 감정 덩어리를 환상으로 착각하여 배설하거나 비시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 된다는 정언을 곡해하여 아무것이나 시적 대상으로 삼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시에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겠으나 그렇다고 시에 올바른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야 할 우리 문단의 미학적 흥취가 독자의 수용 영역 너머를 지향하는 것 같아 내심(개인적으로!) 불만이다. 시의 미학은 생활언어와 보편적 사유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독특함과 이질성이라는 낯선 것에서만 시적 미학을 찾아내는 일은 밀레니엄 시대 초반의 이벤트였다. 이벤트는 이벤트일 뿐이다. ‘새로운 서정’은 ‘전통적 서정’의 영역을 넓히거나 환기시키거나 편입되는 수순을 겪을 수밖에 없다. 융화되지 못하고 유령처럼 유영하는 ‘새로운 서정’은 도통 적응될 수 없는 것으로서 낭패감을 느끼게 한다. 그 낭패감조차 시적 우월성으로 착각하면 시는 점점 어려워지고 무의미한 말로 수다스러워지고 종내에는 현실로부터 멀어져 간다. 서정시의 본령은 ‘서정’에 있을 것이다. ‘서정’의 영역은 인간적 보편성 위에서 책정되어야 옳다. 인간 보편성 바깥의 특수한 정서를 가진 시인의 시가 아무리 의미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시적 이벤트일 뿐이지 새로운 시적 표본이 될 수는 없다.
이러나저러나 이런 푸념은 편협한 소양과 관점이면서 인상비평에도 못 미치는 수준 낮은 주장일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긁어 부스럼하는 이유는 자기 내면에 매몰되지 않는 시, 낯선 외래어를 남발하지 않는 시, 정제된 이미지와 정서로 비시적인 것을 시적으로 다루는 시가 버젓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에서 충분히 미학적 새로움을 얻을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고재종의 「동짓날에 동지죽도 못 쑤고」는 요즘 유행하는 시들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작품이다. 현대사회의 모호한 내면 표출도 없고 낯선 외래어도 없다. 이질적인 정서가 인식을 환기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고재종 시인 특유의 따스하고 친화적인 서정이 사실적이면서도 무겁지 않게 내재되어 있다. 번뜩이는 시적 포착은 아니지만 외면했거나 잊어버린 현실을 상기시키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 또한 「동짓날에 동지죽도 못 쑤고」는 사회적·경제적 현실의 효율과 경쟁으로부터 방치되거나 밀려난 또 다른 현실 문제를 반영하는 리얼리즘을 담고 있다. “세월아 네월아,/ 모퉁이를 돌아 노인당에 가”는 “호박만 해진 당숙모”와 “정자나무 밑을 지나다 쉬엄쉬엄,/ 먼 산 바래기하”는 “보미등처럼 굽은 할매”, 기척에도 문밖을 내다보지 않는 “망백노인”, “가슴을 쥐어뜯으며/ 다시는 못 돌아올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간” “구들더께 옹”은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한 개인들이 도래한 첨단 기술 시대에 철저히 밀려나고 고립되어 있는 현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현실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오래된 현실은 “요양원” 같은 시공간으로 더욱 깊숙이 묻혀버릴 운명에 놓여 있다. 현실 너머로 밀려난 이러한 인물들의 “고독”은 첨단 과학기술 시대가 제공하는 부산물로 채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전동차”, “유모차”, “보건소가 설치해준 지니”, “요양원”은 컴퓨터와 네트워크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정보기술 시대가 제공해준 자잘한 편리일 뿐 “마을에 놀 사람이 별로 없어 시들해진” 이들의 삶을 위로할 수 없다.
이 시는 주류의 현실로부터 밀려나 있거나 잊혀 가는 주변부의 객관적 현실을 들춰낸다. 그렇다고 “호박만 해진 당숙모”와 “호미등처럼 굽은 할매”와 “비깜도 안 하는 망백노인”과 “감나무집 구들더께 옹”의 삶을 부정하거나 현실적 해결 방안을 고심하는 것이 이 시의 본질은 아니다. 고재종 시의 리얼리즘은 세계에 대한 태도이다. 사회와 경제와 역사 같은 현실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반영한 것으로서의 이 시는 엄청나게 빠르고 어마어마하게 격변하는 현실에서 밀려난 “바람만 웅웅거리며 동계 훈련하는” 또 다른 현실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적 태도의 산물이다.
시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현실은 시의 근본이 된다. 현실은 한 가지로 된 완성체가 아니어서 중심도 있고 변방도 있다. 부각되는 현실이 있고 잊힌 현실도 있다. “강둑에 곧추 곧추 늘어선 미루나무/ 그 긴 고독들만/ 바람에 웅웅거리”는 변방 또는 잊힌 현실을 들춰내고 다시 언급하는 것이 이 시의 리얼리즘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진실, 생로병사의 보편적 현실에 대한 경각심이면서 우리가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할 시적 대상을 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을에 놀 사람이 별로 없어 시들해진” 지난 시대의 구성원들은 곧 현재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그 긴 고독”은 변하지 않는 인간사의 영원한 주제인 것이다. 따라서 시에서의 ‘새로움’은 없었던 현상의 발현이 아니라, 매 순간 갱신되는 ‘오래된 현실의 재인식’에 있다.
가겟집이 내놓은 모노륨 깔린 평상에는, 고양이도, 새도, 중늙은이도 쉬어가지만, 점심때가 지나면 대여섯 집 건너, 양달 집 노파(老婆)가 지팡이도 없이,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고 슬로우비디오로 걸어나와서 평상에 앉는다. 초점을 버린 지 오래된 눈을 하늘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하늘로 천천히 왕복시키다가 졸음에 겨워 눕는다. 평상에 쓰러졌다거나 던져졌다는 표정으로 짐짝이 돌아눕는다. 짐짝이 부풀었다 쪼그라졌다를 반복하며 잠들어 있는 동안, 길에는 꿈도 사람도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 짐짝은 육지로 날아간 새끼들도 모두 잊었다. 이미 다 깎고 파내어 바다에 내어준 껍질뿐인 몸통 위로, 풍화에 맡겨진 남은 숨이 가루로 날리고 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동백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손월언, 「금오도3」, 창작과비평, 2025년 겨울호.
「금오도3」을 읽는 독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양달 집 노파”를 “슬로우비디오”처럼 본 유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로 날아간 새끼들도 모두 잊”은 인간사의 전형성을 예감하며 “길에는 꿈도 사람도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음과 대비되는 원색의 “동백”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쓰러졌다거나 던져졌다는 표정”의 독자들은 화들짝 놀라게 된다. 알고는 있으나 또는 인지는 하고 있으나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잊힌 현실이 “금오도”를 위시한 인식 너머의 공간들에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충격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손월언의 「금오도3」은 고재종의 시보다 더 무게감 있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같이 보인다. 시에 등장하는 “짐짝” 같은 “양달 집 노파”가 애써 외면한 우리 주변의 현실을 들춰내는 전형적 인물상으로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팡이도 없이,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고 슬로우비디오로 걸아나와서 평상에 앉는” “양달 집 노파”는 “짐짝”처럼 “부풀었다 쪼그라졌다를 반복하며 잠들어 있는” 인물이다. “양달 집 노파”는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람일 수도 있고, 생동성을 잃어버린 인간 유형의 그럴싸한 상상력의 산물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모노륨 깔린 평상”에 “슬로우비디오로 걸어나와” 앉는 “짐짝” 같은 “노파”는 “껍질뿐인 몸통 위로, 풍화에 맡겨진 남은 숨이 가루로 날리”는 실체적 인물로서 보편성을 띠는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시의 리얼리즘은 사물이나 현실 자체의 모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아내는 생동감의 환영에서 비롯된다. 리얼리즘의 생동감은 전형적 상황에서의 전형적 인물의 진실한 재현에 있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밀려나고 잊힌 현실 밖의 현실에도 ‘우리 같은 사람’이 산다는 인식의 충격, 이는 변하지 않는 현실이자 진실을 고발하는 측면에서 리얼리즘 시의 좋은 예시가 된다.
리얼리즘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레알리슴(Réalisme)에서 뒤랑티는 “현시대와 사회 환경에 대한 적확하고 완전하고 진지한 재현”을 추구하는 것으로 리얼리즘을 정의한다. 뒤랑티의 모사론은 소박한 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점이 많은 창작 태도이기는 하다. 또한 예술가의 목적이 사회적으로 공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성을 내포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구닥다리 사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시대에 대한 적확하고 진지한 재현”이라는 시적 태도 측면에서는 리얼리즘의 본질이 추구하는 바를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가 시인들의 전유된 예술이 아니라면, 시를 읽는 이와 소통을 전제로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시의 한 기능이라면, 나아가 한 편의 시를 통해 현실을 인식 또는 재인식해서 실체적 사유의 장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시의 목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확하고 진지한 재현”을 통해 시인은 기성화된 상투적 인식과 허위의식을 부단히 폭로하고 파괴하여 객관적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 시단에 횡행하는 ‘리얼리즘 없는 리얼리즘 시’들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 생각케 한다.
부인이 말한다 루시아 오늘 친구들이 와 집을 깨끗하게 해줘 루시아는 대답한다 Sim senhora 네 부인 루시아는 부인의 이름을 모른다 부인은 루시아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부인은 루시아를 모른다 루시아는 부인의 집을 안다 부인의 침실을 안다 부인의 속옷을 안다 부인의 비밀을 안다 하지만 부인은 루시아의 집을 모른다 루시아의 아이들을 모른다 루시아의 꿈을 모른다 루시아는 부엌에서 밥을 한다 스테이크를 굽는다 와인을 따른다 루시아는 배가 고프다 하지만 루시아는 먹을 수 없다 루시아는 부엌 구석에서 허겁지겁 빵 한 조각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루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먹먹한 도둑이 된다 부인의 친구들은 말한다 Que empregada bonita 예쁜 하녀네 걸레가 된 루시아는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파벨라 언덕으로 올라가면 페드로가 묻는다 엄마 오늘 뭐 먹어 카를라가 묻는다 엄마 언제 학교 가 미겔이 운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안는다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내일은 더 좋을 거야 하지만 루시아는 안다 내일도 똑같을 것이라는 걸 안다 루시아는 밤에 주린 배를 쥐고 미겔을 안고 잔다 미겔의 몸은 뜨겁다 열이 난다 루시아는 미겔의 이마에 손을 댄다 부인의 아들 이마에 손을 대듯이 손을 댄다 하지만 미겔은 부인의 아들이 아니다 미겔은 병원에 갈 수 없다 미겔은 약을 살 수 없다 미겔은 그냥 죽을 수도 있다 카를라가 루시아에게 말한다 엄마 저도 일하러 갈래요 저도 청소하러 갈래요 다섯 살 카를라가 말한다 루시아는 카를라를 때린다 처음으로 카를라를 때린다 루시아는 울면서 카를라를 때린다 카를라는 왜 맞는지 모른다 루시아도 왜 때리는지 모른다 루시아는 창문을 연다 파벨라의 불빛이 보인다 수만개의 불빛이 보인다 모든 불빛마다 루시아가 있다 모든 불빛마다 페드로가 있다 모든 불빛마다 미겔이 있다 루시아는 그 불빛들을 센다 하나 둘 셋 포기한다 너무 많다 아랫집 루시아는 하인이다 옆집의 루시아는 심부름꾼이다 저기 저 루시아는 청소기다 세탁기다 루시아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새벽 4시가 오자 루시아는 알람을 끄고 일어난다 루시아들은 죽을 때까지 똑같이 일어날 것이다 루시아는 부인의 집에서 몰래 가져온 빵 조각을 입속에 욱여넣는다 한 조각의 루시아를 루시아는 언덕을 내려간다 한 조각에서 몇백 개의 가루가 된 루시아가 내려간다
―이소호, 「로시냐의 딸들*」, 대산문화, 2025년 겨울호.
*루시아는 리우데자네이루 로시냐 파벨라에 사는 가정부다. 브라질 전체 가정부의 90% 이상이 흑인이나 혼혈 여성이며, 이들 대부분은 파벨라에서 부촌으로 통근한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국가 중 하나다. 상위 1%가 전체 부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격차는 인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학에 있어서 ‘있을 법한 허구’라는 전제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일 때만 효과를 발휘한다. ‘허구’의 기능은 문학이라는 간접 체험의 예술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작가로 하여금 보다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무기를 제공한다. 쉽게 말해 누구나 거짓말인 것을 알지만 그 거짓말을 통해 현실과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있을 법한 허구’의 문학적 용도이다. 그럼에도 시에서 ‘허구’는 소설이나 희곡보다 엄격한 현실성을 요구받는다. 거짓말인 것은 똑같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있어야 할 현실이 아니면 안 된다. 시에서 서사와 사건, 배경보다 서정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의 서정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서정은 허구가 아닌 것이다. 서정은 보편적이고 실체적이다. 서사는 꾸며도 되지만 서정은 꾸미는 순간 가식적인 것이 된다. 문예창작의 방법과 실제에서 송하섭이 “‘감정’은 대지요, ‘정서’는 나무며, ‘서정’은 꽃이나 잎”이라고 비유한 대목은 시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 ‘감정-정서-서정’의 엄격한 과정이 노정되어 있음을 함의한다. 서정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에 관한 것이지만 그 정제되는 과정은 합법칙적이고 역사적으로 제약된 보편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어떤 개별적인 사건과 물질에서 얻어지는 감정이 순화되어 정서가 되고 또 다시 정제되어 서정이 되는 일련의 시적 과정은 ‘있을 법한 허구’가 ‘누구나 겪었을 현실에서의 서정’ 위에서 가능하다는 전제를 밑자락에 깔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소호의 「로시냐의 딸들」은 이국적인 소재인 브라질의 빈민가 “리우데자네이루 로시냐 파벨라”에서 벌어지는 ‘있을 법한 허구’를 담아낸 시이다. ‘있을 법한 허구’라는 의미가 시인이 직접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를 읽는 이에게 빈민가 “파벨라”에서의 “로시냐”의 개별적인 현실은 간접 체험으로서 ‘허구’일 수밖에 없다.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은 결국 ‘허구’이다. 중요한 것은 ‘있을 법한 허구’를 통해 독자가 느낄 서정이 보편적이라는 데 있다. “미겔의 몸은 뜨겁다 열이 난다 루시아는 미겔의 이마에 손을 댄다 부인의 아들 이마에 손을 대듯이 손을 댄다 하지만 미겔은 부인의 아들이 아니다 미겔은 병원에 갈 수 없다 미겔은 약을 살 수 없다 미겔은 그냥 죽을 수도 있다”처럼 가난한 현실의 부조리함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공시적으로나 통시적으로 인류 보편적인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때문에 “파벨라”의 “수만 개의 불빛”마다 “루시아가” 있고 그녀의 자식인 “카를라”와 “페드로”와 “미겔”이 있다는 시적인 리얼리즘은 설득력이 있다.
「로시냐의 딸들」은 건조한 문장으로 순화된 정서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죽을 때까지 똑같이”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는 가난의 고통과 대물림되는 빈곤한 슬픔을 적확하게 재현하면서 의도되고 정제된 서정을 전형적으로 형상화해 뉴스에서도 보도되지 않은 실체적인 현실을 고발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서정은 그대로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바가 된다. 좋은 시는 그것이 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살고 있는 사회 현실 자체에 나온다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잊히거나 묻힌 현실을 적확하게 들춰낸다. 독자들은 가본 적 없는 지구 반대편 저 멀리 브라질의 어느 빈민가를 체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코인이나 주식 같은 첨단의 숫자놀이가 물질을 압도하는 사회에 속한 우리에게 우리의 가난하고 빈곤했던 역사 현실을 떠올리게끔 한다. 어쩌면 길 건너 골목에 사는 우리의 이웃 “루시아”를 인식하게 만든다. 나아가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세계 정세 속에서 도태될지도 모를 우리의 암울한 미래를 예감하게 만든다. 시는 역사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사회의 예언적 징후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참된 리얼리즘의 시는 시적 허구나 예언적 비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몇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쓰지 않는데도 뭔가 계속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등은 손 닿지 않은 가려움을 쓰고
아홉 구멍은 가려운 줄 모르는 가려움을 쓰고 있었다
창문은 햇빛과 비와 어둠을 쓰고
감자와 양파는 창고 안에서 싹을 쓰고 있었다
안 쓰면서도 쓰는 시간이
정수리 머리카락을 잡아 뽑고
수염과 비듬과 주름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길은 그동안 쓴 발자국을 하나도 지우지 않은 채
그 위에다 또 발자국을 쓰고 있었다
햇살은 거실에서 반짝이는 먼지를 쓰고
구석과 틈새는 이름 모를 벌레들을 쓰고 있었다
쓰지 않는 동안 무진장 흘려보낸 것들이
다 시가 될 것 같았다
쓰자마자 사라지는 휘발성은
하늘에다 푸른 가지를 흔들며 바람을 쓰고 있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눈을
해서는 안 될 말을 담아 무덤까지 지고 갔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아파트 공사 하는 바람에 거리로 풀려나와
바람에 부푸는 현수막과 찢긴 포스트를 쓰고 있었다
거리에 나뒹구는 전단지를 쓰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을 악착같이 이어 붙이는 테이프를 쓰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 보느라 꺾인 목을 쓰고 있었다
몸 구석구석 간지럽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시는 사라지기 위해 계속 나아갔다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를 쓰고는 지우고
더 격렬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쓰고는 다시 지웠다
구름과 밤과 여명과 노을을 공들여 쓰고 나서
하늘은 새파랗게 비어 있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며 무진장 시를 낭비하고서
갈봄 여름 없이 꽃과 잎을 낭비하고서
한겨울이 되자 땅은 또 엄살 떨었다
몇 달 동안 풀 한 포기도 쓰지 못했다고
―김기택, 「바다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낭비했을까」, 문학과사회, 2025년 겨울호.
앞서 근래 우리 시단의 시적 풍토에 대해 어설픈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이는 결국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시각의 비판일 수밖에 없음을 시인한다. 모든 시가 모든 이의 마음에 흡족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러면서도 시에 있어서 보편적 근본과 기본적인 시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맹신은 버릴 수 없다.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할 문장이 어떻게 시가 될 것이며, 몇몇 수준 있는 독자만 이해하는 시가 어떻게 존속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대중성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돈 되는 시가 최고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쓰는 사람이 있으면 읽는 사람도 그에 걸맞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단순한 문제 제기이다. 생산과 수요는 중요한 개념이면서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쓰는 사람만 넘치는 우리 서정시의 기형적인 모습을 왜 우스갯소리로 자화자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기형적인 것은 분명 기형적인 것이다. 작품의 미학성도 중요하지만 소통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읽는 사람도 많아져야 한다. 고귀한(?) 시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어쨌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시단이 추구하는 ‘새로움’의 시적 정의가 ‘새로운 서정·새로운 형식·새로운 언어’에만 있다고 여기는 편견에 국한된 것은 아닌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시에서의 ‘새로움’은 중요한 가치이면서 방향성이다. ‘새로움’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일견 동의를 표하나 ‘새로움’의 정의나 암묵적 규율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시에서 ‘새로움’은 ‘좋은 시는 좋은 시’라는 정의 하나면 족하다. 좋은 시는 ‘곳곳에 언제나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지키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발아한다. 시적 새로움은 예전부터 이미 와 있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새 신발을 사야 잘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신발의 용도에 따라 잘 쓰면 산에서도 모래사장에서도 눈밭에서도 잘 달릴 수 있다. 시의 ‘새로움’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의 창조가 아니라, ‘있던 것’을 살피고 관찰하고 관조해서 적확한 사유와 이미지로 언어화하는 것일 터이다. 여기서의 ‘있던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 그 자체이다.
김기택의 「바다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낭비했을까」는 “몇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다”라는 부정의 문장을 툭 던지며 시작한다. 작가나 시인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한 줄도 쓰지 못했다”라는 문장 앞에 덜컥 겁부터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이쿠식으로 제시된 첫 행의 절망적인 현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가능성을 연과 연을 나누는 한 줄의 빈 여백만으로 열어젖힌다. “쓰지 않는데도 뭔가 계속 쓰고 있는 것 같았다”라는 불현듯 한 깨달음은 세상의 모든 “구멍”과 “구석과 틈새” 같은 데에서 “쓰고” 있는 시적인 “것들”을 목도하게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다. “창문은 햇빛과 비와 어둠을 쓰고/ 감자와 양파는 창고 안에서 싹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안 쓰면서도 쓰는 시간이” “쓰지 않는 동안 무진장 흘려보낸 것들이/ 다 시가 될 것 같았다”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현실에 대한 발견은 시 창작의 고통을 함의하면서도 그러한 인고의 시간과 공간 자체가 “시”가 된다는 긍정을 “바다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낭비했을까”와 같은 반어적 문장으로 유쾌하게 드러낸다. 또한 “갈봄 여름 없이 꽃과 잎을 낭비하고서/ 한겨울이 되자 땅은 또 엄살떨었다” 이후에 또 하나 여백의 연갈이는 “몇 달 동안 풀 한 포기도 쓰지 못했다고”라는 “엄살” 같은 시적 위트를 시인 스스로와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위안과 응원으로 승화시킨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며 무진장 시를 낭비하고서”야 “시는 사라지기 위해 계속 나아”간다는 모순적인 시 쓰기 앞에 문장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풀 한 포기”를 ‘쓰는 일’이다. 시에 있어서 ‘쓰는 일’은 창작이 아니라 현상의 발견이고 의미 부여의 해석이고 순간순간의 감탄이다. “풀 한 포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에 도사리고 있지만 어떤 징후로서 또 세상만사의 당연지사처럼 의연하게 표출되어 있는 시적인 것이다. 「바다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낭비했을까」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이가 아니라, 보지 못한 세상의 본질을 찾아내고 탐색하는 존재임을 밝히는 ‘새로운’ 시이다. 그것도 낯설거나 어색한 ‘새로움’이 아니라, 친근하고 익숙한 것을 ‘새로이’ 인식하는 것으로서의 ‘새로운 리얼리즘’ 시이다.
금요일의 나를 데리고 간 건
밤의 해안선이었어
새빨간 여름을 삼키고도
흰 기억을 토해 내는 파도가 있고
첫사랑의 취기를 이기지 못해
달빛에 흔들리는 등대가 있고
낚이지 않은 허공에
미끼를 던지는 사람이 있고
9시 이후 폭죽 금지 푯말에
소리치지 못하는 폭죽이 있고
더 이상 둥글어지는 건 그만두고 싶다고
연대하며 구르는 몽돌이 있고
월화수목금토일 연인들의 밀어를
침묵하는 금빛 모래가 있고
여름밤은
잃어버리기 좋은 온도를 가지고 있어서
집을 등진 사람들이 하얗게 웃는데
대왕 해파리 사체가 떠밀려오는 해안선을 촘촘히 걸으며
상상해
누가 내게 여름에 대해 물으면
빈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여줄 거라고
―백지, 「누가 내게 여름에 대해 물으면」, 애지, 2025년 겨울호.
시의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바는 현상과 본질을 동일선상에서의 객관적 현실로 보는 것이다. 객관적 현실은 수치적이거나 데이터 중심의 과학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비과학적인 경험과 인간 중심적인 감각의 공유에서 객관적 현실의 시적 진실성을 목도할 수 있다. 좋은 시로서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부피와 진실의 깊이를 아울러 지향한다. 이를 통해 시를 쓰는 시인이나 시를 읽는 독자들이 삶의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러한 리얼리즘적 시의 개념은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괴테는 철학에서나 예술에서의 아름다움(美)은 ‘우연한 것·순간적인 것·특수한 것·개성적인 것·감각적인 것’에서 도출되어 ‘보편적인 것·필연적인 것·당연한 것·영원한 것’에 가닿을 때 드러난다고 했다. 일관된 관점에서 특수와 보편의 종합이 시의 리얼리즘을 완성한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 자체로 시의 ‘새로움’이 보장될 수도 있겠다.
백지의 「누가 내게 여름에 대해 물으면」은 지극히 건조하고 심플한 시이다. 인간의 내면이나 무의식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다만 “밤의 해안선”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조망할 뿐이다. 유일하게 사실적이지 않은 대목은 “금요일의 나를 데리고 간 건/ 밤의 해안선이었어”와 같은 서정의 어떤 가능성뿐이다. 그러면서도 “흰 기억을 토해 내는 파도가 있고” “달빛에 흔들리는 등대가 있고” “미끼를 던지는 사람이 있”는 “여름밤”의 현실 속에서 그 순간성과 우연성을 포착한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포착된 사실들은 독자로 하여금 “해안선을 촘촘히 걸으며// 상상”하게 하는 제각각의 경험을 소환케 한다. “상상해”와 “빈 호주머니” 두 단어만으로도 이 시는 무한한 보편적 상상력을 선사해주는 것이다. “빈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여줄 거라고”라는 마지막 시행은 시적 화자의 마음 정리나 다짐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구체적 사연이나 개별적 사건이 아니어도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읽히기도 한다. “빈 호주머니”에 담길 개개인의 사연은 결국 특수하면서 보편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 “빈 호주머니”를 채울 때마다 그것은 매 순간 새로운 서정이 된다라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누가 내게 여름에 대해 물으면」의 리얼리즘은 눈에 보이는 사물과 풍경을 전형화하는 절제된 시어와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상상력의 빈 여백에 있다. 어쩌면 시에 있어서 완성형에 가까운 리얼리즘은 시를 읽는 이의 개별적인 현실이 반영되는 상상력의 “빈 호주머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두에서 모두가 물질적·정신적 혜택을 누리는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자본주의에서는 효율과 경쟁이 작동 원리이듯 부조리와 폭압도 기본적인 디폴트값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태어나보니 ‘돈’의 흐름에 따라 휩쓸리는 환경에 놓여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세계는 이분법적인 사고체계까지도 상품으로 팔아치우는 비정한 시장통이다. 오로지 공평한 것은 효율과 경쟁 그 자체뿐이다. 필연적으로 비주류, 주변부, 빈곤과 가난, 도태, 소외 같은 것들이 분절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시인들에게 ‘새로운 시적 리얼리즘’을 요구한다. 여기서의 ‘새로움’은 「동짓날에 동지죽도 못 쑤고」, 「금오도3」, 「로시냐의 딸들」같이 혁신적인 과학기술로 윤택해진 현실이 외면한 또 다른 현실을 들춰보라는 의미이다. 또한 ‘새로움’은 「바다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낭비했을까」에서처럼 곳곳에 실체적으로 펼쳐져 있는 평범한 현실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새로움’을 위한 시의 ‘상상력’은 「누가 내게 여름에 대해 물으면」처럼 독자의 경험을 이입할 수 있는 “빈 호주머니”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 말고도 ‘새로운 시’의 필요충분조건은 많을 것이다. 전부 언급할 수는 없지만 명백한 것은, 현실과 괴리되거나 현실성 없는 공허한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시들, 자기 내면에 매몰되어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난사하는 시들은 절대 ‘새로움’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시에서 리얼리즘이 왜 필요한지, 어찌하여 시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지, 무슨 까닭으로 공감과 소통이 특별함이 아닌 일상적인 보편에서 발아되는지, 리얼리즘이 왜 창작의 태도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아무려나 해도 좋은 시는 좋은 시인 보편타당한 이유가 있음도 잊지 말고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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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준
약력
2018년 애지 등단. 2025년 애지 문학상 비평 부문 수상.
애지 편집위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