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14-18)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계속해서 고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을 묵상하고 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인 육시에 대하여 묵상해 보고자 한다. 육시에 대한 글은 이미 쓴바 있지만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다시 묵상해 보고자 한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27:45-50)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15:33-38)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23:44-47)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말씀을 모두 표기해 드렸다. 보시는 바와 같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시에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한 복음에서는 육시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요한 복음이 거짓인 것 같다. 왜냐하면 마태, 마가,누가는 같게 쓰고 있는데 요한만 다르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왜 다르게 쓴 것일까? 아니 성경의 저자이신 그리스도(성령)께서는 요한으로 하여금 왜 다르게 쓰게 하셨을까? 저의 이러한 반문에 어떤 사람은 마태 마가 누가는 히브리 시간으로, 요한은 헬라 시간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성령)께서는 왜 같은 시대에 같은 이야기를 히브리와 헬라 시간으로 다르게 쓰게 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육시”(여섯)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의 하늘과 땅의 창조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영의 세계를 창조하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해와 달과 별을 넷째 날에 만드는데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녁과 아침은 해와 달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해와 달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이야기는 우주 만물을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안에 영의 세계를 창조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첫째 날부터 창조를 시작하여 여섯째 날에 창조되는 짐승과 시람……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지 못한 짐승이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의 창조 과정의 결과이다. 이런 영적인 날(때)을 성경은 여섯째 날이라고 하고 “육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영적인 시간(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인 그리스도(성령)께서는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영의 시간을 육시라고 한 것이고 요한은 부인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시간인 육시를 다르게 기록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를 묵상하게 하여 깨닫게 하려는 배려인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육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육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육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로마 병사들과 마리아(여자)들……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육시……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39)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의 백부장이 한 말이다. 그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27:55-56)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백부장과 로마의 병사 외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와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기만 한다. 마태, 마가,누가 복음은 그들의 영적인(믿음의) 육시(열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육시
요한 복음 19장에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고발하는 제사장과 백성들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육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마태, 마가 누가와는 다르게 요한이 “육시”를 다르게 쓴 이유이다. 히브리 시간이나 헬라 시간으로 쓰게 하여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라는 것과 내가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
누가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들인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를 부인하면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일곱째 날의 사람을 말하는 말씀이다.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죽이던 자가 이제는 내가 자기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리스도가 살고 나도 산 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13:18)지헤있는 자는 깨달으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를 육백육십육이라고 한다는 것을……그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함께 죽은자가 이제는 자기를 부인함으로 내가 죽음으로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부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자가 백사십 사천이라는 사실을……이를 묵상하여 깨닫게 하기 위하여 요한으로 하여금 “육시”를 다르게 쓰게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