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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타노이아의 상부벽을 단독 등반 중인 제프 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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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Eiger·3,970m)는 스위스의 고산지대, 베르네 오버란트의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암봉이다. ‘사람 잡아 먹는 귀신’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아이거는 남서벽, 북동벽, 북서벽 3개 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서벽은 통상 북벽으로 통한다.
1921년 일본 클라이머 유코 마키가 3명의 가이드들을 대동하고 북동릉인 미텔레기능선으로 아이거를 등정했고, 1932년 스위스의 한스 라우퍼 일행이 북동벽으로 아이거를 등정했다. 아이거 북벽, 즉 아이거 반트는 인간의 생사가 순식간에 갈리는 무시무시한 드라마가 끊임없이 전개되어, ‘죽음의 벽’이란 뜻의 ‘모르트반트(Mordwand)’라고 불린다. 그 이름에 걸맞게 1990년대 말까지 이 벽을 등반하다가 목숨을 잃은 클라이머 수는 50명을 훨씬 능가한다.
아이거 북벽은 바위와 얼음과 눈으로 구성된 높이 1,800m인 거벽으로, 북벽의 중앙에는 거대하고 가파른 3개의 빙원(ice-fields)들이 있고, 제3빙원 위쪽에는 중앙 필라(Central Pillar)가 ‘화이트 스파이더(하얀 거미 형태의 제4빙원)’의 우측으로 우뚝 솟아 있으며, 아이거 북벽의 상부와 측면은 까마득하게 가파른 바위 절벽을 자랑한다.
아이거 북벽은 베르네 오버란트의 가장자리에 험준한 절벽의 형태로 서 있기 때문에, 갑자기 몰아닥치는 폭풍의 예봉(銳鋒)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받아, 폭우나 눈 녹은 물로 젖은 암벽이 순간적인 혹한에 의해 베르글라(살얼음층)로 뒤덮이며, 모든 홀드들(holds : 손잡이나 발판으로 이용되는 바위 조각들 또는 크랙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린다. 또한 원형극장 또는 사발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는 북벽으로 하강하는 기류가 푄(Fo˙˙hn) 현상을 일으키면서, 예고 없이 국지성(局地性) 폭풍이 발생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연출된다.
또한 햇볕이 북벽 상부에 닿자마자 아교 역할을 하던 얼음이 녹으면서 엄청난 양의 돌사태가 발생하고, 그 결과 낙석과 낙빙이 제2빙원과 제3빙원, ‘신들의 트래버스(전망이 좋아서 얻게 된 명칭)’, ‘화이트 스파이더’에 무차별적 돌 폭격을 퍼붓는다. 그리고 낙뢰, 가루 눈사태, 엄습(掩襲)하는 혹한이 부실한 장비를 착용한 클라이머들을 종종 사경(死境)에 몰아넣는다.
오늘날에 비하면 빈약한 등반 장비를 착용했던 개척자들, 즉 독일 산악인 헤크마이어 일행(1938년 초등대)도, 프랑스의 리오넬 테레이와 루이스 라슈날(1947년)도 아이거 북벽의 ‘화이트 스파이더’ 상부에서 폭풍설과 낙뢰에 시달리며 죽음의 일보 직전까지 다다른 적이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클라이머 가스통 레뷰파 일행과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클라이머 헤르만 불 일행이 합동으로 낙석의 포화 속에서 ‘신들의 트래버스’를 횡단할 때(1953년), 암벽 등반의 달인 레뷰파는 머리에 낙석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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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아이거 북벽에 개척된 존 할린 직등루트와 초등루트. / 폭우, 눈녹은 물, 가루 눈사태가 쏟아져내리는 아이거 북벽.
- 그들은 폭퐁설 속에서 ‘화이트 스파이더’와 ‘엑시트 크랙(Exit Crack : 탈출 루트 크랙)’을 등반하던 중에 수천 톤의 가루 눈사태에 휩쓸리며 생사의 기로에서 허덕였다. 가스통 레뷰파는 아이거 북벽에서 시달렸던 가루 눈사태의 양이 안나푸르나 북벽에서 겪었던(1950년) 눈사태의 양보다 엄청나게 더 많았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어떤 산의 등정도 인간의 생명만큼 귀중하지는 않다”
이탈리아의 유명 클라이머 보나티는 아이거 북벽 단독 등반 도중(1963년), 아이스호스(ice-horse : 제1빙원과 제2빙원 사이의 높이 30m의 바위절벽 상에 위치한 쿨와르. 눈 녹은 물이 흐르다가 얼어붙어 아이스호스라는 이름을 얻었음) 위쪽에서 졸지에 온산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양의 돌사태를 당했다. 그는 낙석에 맞아 갈비뼈 골절상을 입고 등반을 포기하며, “어떤 산의 등정도 인간의 생명만큼 귀중하지는 않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뛰어난 등반 기술을 익힌 수많은 산악인들이 아이거 북벽을 거쳐 갔지만, 모든 위대한 산악인들이 아이거 북벽을 등정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캐신 일행은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려고 출발했는데, 헤크마이어 일행의 초등 소식을 접하고 발길을 돌려 그랑드조라스 북벽의 워커 스퍼를 대신 초등했다.
에베레스트 초등자인 텐징 노르게이는 미국 클라이머와 아이거 북벽을 절반쯤 등반하고 나서, “아이거 북벽은 등반이 너무 힘들고 루트가 너무 위험하다”고 말하고 등반을 포기했다. ‘에베레스트의 인간 기관차’란 별명을 지닌 강인한 텐징 노르게이가 아이거 북벽의 등반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악천후 속에서 아이거 북벽의 루트가 얼마나 난코스인지 여실히 증명한다.
1990년대 말까지 아이거에 26개 이상의 루트가 개척되었는데, 그중에는 북벽을 관통하며 정상으로 이어지는 직등루트(Direttissima)가 4개나 된다. 그 직등루트들 중에는 미국 클라이머 제프 로우가 동계에 단독으로 개척한 ‘메타노이아(Metanoia)’가 최대 난코스로 평가된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산악인 리카르도 캐신이 일찍이 ‘디레티시마(Direttissima, 직등)’를 ‘산정에서 떨어뜨린 물방울이 산 밑까지 그리는 직선’이라고 정의(定議)한 바 있다.
최초의 직등루트는 추락사한 존 할린 대장 이름으로 명명
아이거 북벽에 최초로 개척된 직등루트는 1966년 동계에 독일 팀과 영미합동 팀이 협동으로 이룩했는데, 그들은 존 할린(John Harlin) 대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기리기 위해 이 루트를 ‘존 할린 직등루트’라고 명명했다. 처음에는 독일 팀과 영미합동 팀이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나중에 한 팀으로 재편되어 위업을 달성했다.
레네 대장이 이끄는 독일 팀은 슈트로벨, 보텔러, 후프파우어, 골리코브를 비롯한 8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퍼스트 필라’의 좌측, 경사 70~80도인 빙벽에 고정 로프를 설치하며 먼저 등반을 시작해, 북벽의 3분의 1 지점을 돌파하고 수직암벽인 제1밴드(band) 밑에 설동을 팠다.
미국 산악인 존 할린(1935년생)이 이끄는 영미합동대도 제1밴드 아래까지 진출했다. 존 할린은 알프스 등반 열정 때문에 독일 주둔 미공군에 지원 복무하며, 1962년 독일 클라이머 콘라트와 아이거 북벽의 헤크마이어 초등루트를 등정했다.
그는 미국 클라이머 톰 프로스트와 에귀뒤푸 남벽과 몽블랑 남벽의 프레니 벽의 네 개의 돌기둥 중에서 ‘히든 필라(hidden pillar)’를 초등했다. 그는 1965년 미국 유명 클라이머 로열 로빈스와 드류 서벽에 높이 900m의 미국 직등루트를 개척한 열성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군에서 제대한 후 스위스 레이진(Leysin) 소재의 국제등산학교 교장 직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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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반 중에 절명해 자일에 매달린 쿠르츠.
- 영미합동대는 미국 산악인 레이턴 코, 영국 산악인 듀걸 해스턴, 지원조 돈 윌란스와 크리스 보닝턴(1962년 8월 이안 클러프와 영국인 최초로 아이거 북벽 등정)으로 구성되었다. 할린 대장과 레이턴 대원이 난코스인 90m 높이의 제1밴드에 루트를 개척했다. 할린 대장과 해스턴은 제2밴드의 아래 오버행 밑에서 천연 설동을 발견하고 거기서 비박한 후, 눈이 들어찬 침니와 가파른 아아스걸리를 이용해 제2밴드를 돌파했다.
독일대도 제2밴드를 돌파한 후 벽에서 천연 동굴을 발견하고 거기서 비박했다.
영미합동대가 제2밴드 위쪽에 설동을 설치하는 사이에 독일대는 빙벽을 오르고 ‘플랫아이언’ 밑을 우측으로 트래버스하고, 우측의 제2빙원을 오른 다음 좌측의 ‘플랫아이언’ 마루 상부에 진출해 설동을 설치했다. ‘플랫아이언’이란 뱃머리 또는 구식 다리미 모양의 아레트(arete, 험준한 산등성이) 또는 스텝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미합동대도 ‘죽음의 비박지’에 도달하여 눈 처마에 설동을 팠다.
듀걸 해스턴은 제3빙원을 오르고, 높이 90여m의 ‘중앙 필라’ 밑으로 이어지는 아레트까지 진출했다. 보닝턴은 ‘중앙 필라’ 좌측의 가파른 아이스걸리로 등로를 개척하고 ‘중앙 필라’ 꼭대기에서 30m 아래 지점까지 진출했다. 독일대는 ‘중앙 필라’의 우측 침니를 등로로 선택했는데, 상부의 오버행 눈 처마가 등로를 가로 막는 바람에 루트 개척에 실패했다. 그때 독일대와 영미합동대는 함께 등반하기로 합의했다.
독일대의 칼 콜리코브 대원이 레이턴 대원의 확보를 받으며 ‘중앙 필라’의 좌측 아이스걸리로 전진해 ‘중앙 필라’ 상단의 미등 구간, 즉 경사도 70도인 좁은 걸리 30m를 브리지등반법으로 돌파하고, ‘중앙 필라’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들은 ‘화이트 스파이더’ 아래쪽의 높이 90여 m짜리 수직암벽의 크랙에 붙어, 레이턴 대원이 30m 위쪽의 오버행까지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독일대와 영미합동대는 협동하여 ‘화이트 스파이더’ 밑까지 등로를 개척했다. 독일대가 ‘하얀 거미’ 우측의 이스트밴드를 돌파하고 위쪽의 작은 빙원까지 등로를 개척하고, 그 작은 빙원을 ‘플라이(The Fly, 파리)’라고 명명했다. 할린 대장과 해스턴은 독일대원들과 ‘플라이’에서 비박하고 정상 공격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오버행 위의 슬랩 모서리를 지나가던 7mm 고정자일이 마모되어 절단되며, 맨 나중에 등반하던 할린 대장이 추락사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들은 존 할린의 죽음에 절망하지 않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등반을 계속했다. 독일대의 귄터와 외르크 대원은 ‘플라이’ 위쪽 100m 지점까지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다음날 듀걸 해스턴과 외르크 대원은 악천후 속에서 정상능선에서 10m 아래 지점까지 고정자일을 설치하고, 그 이튿날 듀걸 해스턴 일행은 아이스걸리를 이용해 또 하나의 필라를 오르고 고난도의 크랙과 침니를 돌파한 후, 정상 능선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경사도 60도의 빙벽길이 정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4명의 독일 대원들과 듀걸 해스턴은 수염에 고드름을 주렁주렁 매달고, 등반을 시작한 지 21일 만에 아이거 북벽 직등에 성공했다. 그들은 이 직등루트를 ‘존 할린 루트’라고 명명했는데, 난이도는 ED 3-4의 난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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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거 북벽 상단부. ① 화이트 스파이더(하얀 거미). ② 중앙 필라.
- 일본대 루트는 볼트 과다 사용으로 엄청난 비난 받아
1969년 일본의 미치코 이마이 부인, 다키오 코토, 야수오 카토, 수수무 쿠보, 아마노 히로푸미, 사토루 네기시가 7월 5일부터 아이거 북벽에서 등반을 시작해 8월 15일 제2의 직등루트 개척을 완성했다. 그들은 높이 305m의 오버행 ‘로트 플루(Rote Fluh, 붉은 낭떠러지)’를 직등하며 1,000kg의 장비(250개의 볼트, 200개의 피톤, 고정자일 2,400m 포함)를 자일로 끌어 올렸다. 일본대 루트는 ‘하계(夏季) 디레티시마’라고 불린다. 그들은 등정 후 등반에 볼트의 과다 사용으로 순수 알피니즘을 외면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1970년 1월 20일부터 25일까지 스위스의 산악인 알만, 되르플링거, 융겐, 뮐러, 트라흐젤이 볼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일본대 직등루트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해 찬사를 받았다.
1983년 3월 20일부터 4월 2일까지 슬로바키아 산악인 파벨 일행이 아이거 북벽의 세 번째 직등루트를 개척했는데, 이 루트는 ‘존 할린 직등루트’와 일본대 직등루트 사이를 통과한다. 이 루트를 이상적인 직등루트라는 뜻으로 ‘아이디얼 디레티시마’라고 부른다.
1991년 미국의 제프 로우(Jeff Lowe)는 아이거 북벽에 네 번째 직등루트를 동계에 단독으로 개척하는 ‘기적의 위업’을 달성했다. 제프 로우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이거 북벽 직등루트, ‘메타노이아’는 아이거 북벽 정상의 조금 우측에서 제2빙원까지 직선으로 내려 뻗었고 ‘세터드 필라’의 꼭대기에서 약간 좌측으로 등로를 벗어났다가 다시 산 밑까지 직선으로 이어진다.
이 루트를 산 밑에서 역으로 바라보면, 헤크마이어 초등루트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일본대 직등루트의 일부분을 통과하며 ‘새터드 필라’의 꼭대기에 이른다. 거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의 좌측을 지나 ‘아이스호스’의 일부 구간과 겹친다. 이 루트는 제2 빙원을 관통하고 아이거 북벽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상부 가파른 슬랩지대를 직등으로 지나 정상의 우측에 도달한다.
제프 로우는 당시 빙벽 등반의 달인이었고, 빙암벽 등반의 귀재(鬼才), 또는 주창자(主唱者)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아마 자신이 이와 같이 신비적인 존재로 부각되는 것을 꺼렸을지 모르지만, 그가 빙암벽 등반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 빙암벽 등반 기술을 개발했고, 또한 빙암벽 등반 장비, 허밍버드와 스나그 아이스 피톤(Snarg ice pitons)의 고안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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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이거 북벽에 개척된 26개의 루트. / ① 라우퍼 북동벽 루트 ② 헤크마이어 초등루트 ③ 존 할린 직등루트 ④~⑤ 노스 필라 직등루트 ⑥ 일본대 직등루트 ⑭ 아이디얼 직등루트 메타노이아 (제프 로우) 직등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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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일곱살 때 부친과 함께 미국 와이오밍주의 난코스인, 험한 바위벽 그랜드 티톤(Grand Teton)을 등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5세때부터 빙벽등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나중에 아이거 북벽의 ‘존 할린 직등루트’까지 등정하며 빙벽등반에 기염을 토했다. 그가 전 세계의 난코스에 개척한 수많은 빙벽 루트들 중 몇 개만 언급하면, 1970년 ‘브라이들 베일 폭포(면사포 폭포)’ 초등, 1982년 데비드 브리시어스와 이룩한 쿰부히말의 ‘콩데 북벽(6,187m)’의 높이 1,500m짜리 빙벽 등정, 1986년 네팔의 ‘캉테가(Kangtega·6,779m)’ 북동벽 등정, 1978년 네팔의 ‘라톡(Latok)’ 북릉 등정, 1990년 프랑스의 유명 여성 클라이머 카트린느 데스티벨레와 카라코룸 트랑고 타워에 있는 유고대 루트를 프리 클라이밍으로 등정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세계의 빙암벽 난이도 M8(빙암 혼합 등반 난이도)와 M9를 최초로 돌파한 클라이머이고, 세계의 최다 암벽과 빙벽 루트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제프 로우의 등반은 알프스 개척자들에 필적할 만한 업적
1991년 3월 제프 로우는 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계곡에 도착했는데, 그는 당시 커다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사업이 경영난을 겪고 있었고, 카트린느 데스티벨레와의 연인 관계로 인해 촉발된 그의 부인과의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괴로운 심적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오랜 숙원이었던 아이거 북벽의 직등루트 개척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위대한 산악인 보나티의 드류 서벽 등정을 모방할 작정이었다. 보나티는 K2 초등에 크게 기여하고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해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그 고통에서 탈피하기 위해 1955년 드류 남서벽 보나티 필라를 단독으로 등정했다.
제프 로우는 ‘공포의 벽’ 아이거 북벽 단독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니콜라스 오코넬과의 대담에서 말했다.
“나는 동계에 아이거 북벽을 단독으로 직등하는 것은 헤크마이어 일행의 초등 업적을 방불케 하는 위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아이거 북벽의 직등 등반에 볼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는 벽 하부의 잘 부서지는 암벽, 즉 1938년 초등루트의 일부인 ‘새터드 필라’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곳에서 그가 보통 난이도의 몇 피치를 오르자, 가파른 절벽 구간과 오버행(돌출 구간) 구간이 교대로 나타났다.
그가 이 난코스를 돌파하자 200m 위쪽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의 좌측 끝 구간이 보였다. 이 구간의 절벽에 살얼음이 유리판처럼 견고하게 얼어붙어 홀드들이 자취를 감추고 눈에 띄지 않았다. 암빙 혼합구간의 등반 달인인 제프 로우는 수많은 가느다란 크랙들을 이용하며 등반을 계속했다. A5(인공등반 난이도)의 난코스 30여 m가 등장했는데, 제프 로우는 이 구간을 돌파하기 위해 작은 금속 갈고리들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즉 그의 유일한 등반 수단은 바위 돌출부나 바위 구멍에 갈고리들을 걸고, 거기에 매달리며 위태로운 등반을 계속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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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풍이 몰아치는 아이거 북벽.
- 이때 클라이머가 추락하면 생존가능성은 제로0) 상태였다. 즉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즉시 죽음과 직결될 수 있는 추락으로 이어질 판이어서 경계 태세를 늦출 수 없었다. 추락하는 클라이머를 붙잡아줄 확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일은 아무 쓸모 없었다. 단독 등반이 더 난항을 겪는 이유는 등반 진행 상황에 따라 클라이머와 연결된 자일을 풀어 주거나, 또는 느즈러진 자일을 잡아 당겨 줄 후등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클라이머는 자동 빌레이 장치를 이용해 로프를 취급해야 했다. 선등자의 아래쪽에서 “친구야, 조금만 더 분발해!”라고 용기를 북돋우는 격려의 말을 해줄 사람도 없는 고독한 작업이었다. 등반 중에는 오직 벽을 스치며 지나가는 울부짖는 바람소리, 또는 클라이머 자신이 몰아쉬는 거친 호흡 소리와 고동치는 심장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30m의 난코스를 돌파하는 데 7시간을 허비했다. 벌써 그가 등반을 시작한 지 이틀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 구간과 인접한 작은 빙원에서 비박이 가능한 레지(Ledge, 바위 선반)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 지점에서 하산이 불가피해 그동안의 사투는 물거품처럼 헛수고가 될 처지였다. 그의 빙벽 장비가 계속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이 장비를 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산하여 빙벽 장비를 수리하고 나서, 30kg의 장비와 식량이 담긴 자루를 자일로 끌어올리며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첫 번째 록밴드를 돌파하고 나서, 짐을 나누어 20kg은 등에 짊어지고, 나머지 10kg는 자일 끝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것이 더 편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제2빙원을 돌파할 때까지 이 방식을 고수하고, 제2빙원 위쪽부터는 보나티의 드류 남서벽 등반 방식을 모방했다. 즉 먼저 짐을 짊어지지 않고 한 피치를 등반한 후 자일을 고정시키고 하강해 짐을 운반하며 등강기로 최고 도달 지점까지 다시 오르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 경우에 짐이 든 자루가 확보자 역할을 대행했다.
다음 등장한 구간은 난이도 M6의 빙암 혼합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잘 부서지는 암벽 위에 군데군데 단단한 얼음이 견고하게 얼어붙어 있었고, 또한 여기저기에 얼음이 가득 들어찬 크랙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제프 로우는 거기에 아이스 액스를 비틀어 박으며 등반할 수 있었다.
그는 등반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어려운 선택에 여러 번 봉착했다. 빙벽 구간이 갑자기 암벽 구간으로 전환되면 계속해서 크램폰을 신은 채로 등반해야 할지, 혹은 암벽구간이 갑자기 빙벽 등반구간으로 바뀌면 미끄러질 각오를 하고 크램폰을 착용하지 않은 채 빙벽 등반을 해야 할지의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그 선택은 잘못된 선택처럼 느껴지곤 했다. 크램폰을 벗고 암벽등반을 하면 곧 빙벽이 나타나 크램폰을 벗느라 헛되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았고, 크램폰을 착용한 채 암벽 등반을 할 때는 크램폰이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처럼 느껴졌고, 그가 크램폰을 착용하지 않고 빙벽을 계속 등반할 때는 크램폰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즉시 잘 부서지는 거대한 석회암 지대가 나타났다.
제프 로우는 등정 후에 말했다.
“나는 이 벽에서 하나의 확보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8개나 되는 앵커들을 한꺼번에 사용한 적도 있었다. 그곳에서 위쪽을 쳐다보며 ‘이곳에서 어느 방향으로 진행할까?’ 하고 루트의 방향 결정에 망설임을 반복했다. 석회암 모서리를 오르며 이리저리 방황을 계속했다. 나는 위로 오르기 위해 상황에 따라 프리클라이밍(자유등반)과 인공보조 등반을 가리지 않고 병행했다.”
그는 야간에 절벽에 매단 박쥐 텐트(소형 텐트) 속에서 비박을 했는데, 눈보라로 절벽 위에 쌓여 있던 눈이 계속 눈사태를 일으켜 그의 텐트를 강타했기 때문에, 제프 로우는 “이 텐트 속에서 잠을 자려고 시도하는 것은 콘크리트 믹서기 속에 들어가 잠을 자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눈가루가 계속 텐트 속으로 파고들어 잠을 설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루트의 마지막 구간에서는 프리클라이밍 구간이 자주 등장했다. 난이도는 5.10으로 동계에 알프스의 높은 고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난이도였다. 동계에 아이거 북벽에 상존하는 혹한이 클라이머의 에너지를 점차 약화시켰고, 또한 단독으로 등반하는 클라이머는 짐 운반 때문에 피치들을 오르내리는 고된 작업을 반복해 등반 열정이 식어지고 나중에는 고갈되었다.
제프 로우는 말했다.
“나는 아이거 북벽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며 등반했다. 나는 체력의 한계 속에서 등반하다가 체력이 소진되어 세 번씩이나 갑자기 추락하는 경험을 겪었다. 나는 다른 산에서는 추락을 겪은 적이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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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의 트래버스 초입을 등반 중인 등반가
- 제프 로우가 동계에 아이거 북벽에 직등루트인 ‘메타노이아’를 개척하는 데 9일이 소요되었다. ‘메타노이아’는 알프스에 개척된 모든 루트들 중에서 최고 난이도의 루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제프 로우가 동계에 단독으로 개척한 이 루트에는 유럽대륙에서 유일하게 인공보조 등반 난이도 A5의 구간이 포함되며, 자유등반 암벽 난이도 5.10, 빙암벽 혼합 등반 난이도 M6의 구간도 포함되어 있다. 이 루트의 개척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산악인 월터 보나티의 업적, 그리고 초기 알프스 개척자들의 등반 업적에 필적할 만한 대담한 업적에 속한다.
아이거 북벽의 초등, 등반이 정치와 결탁하는 오명 남겨
아이거 북벽의 최초 희생자들은 독일 청년 막스 제틀마이어(당시 24세)와 칼 메링거(당시 26세)였다. 그들은 1935년 아이거 북벽의 직등루트로 제2빙원 좌측의 ‘플랫아이언(Flatiron)’의 마루까지 진출했다. 두 사람은 ‘플랫아이언’ 마루의 상부에 위치한 오버행 바위 밑에 도달한 시점에 폭풍설을 만나 조난당했다. 비록 눈물겹게 조난당했지만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부실한 장비로 집념을 불태워 난코스 아이거 북벽의 3분의 2 지점을 돌파한 것이었다. 그들이 조난당한 장소는 후에 ‘죽음의 비박지’라고 알려졌다.
1936년 7월 아이거 북벽에서 알프스의 최대 비극이 발생했다. 오스트리아의 클라이머, 에디 라이너와 빌리 앙게러, 그리고 독일의 휴가병 토니 쿠르츠와 안델 힌터슈토이서가 합동으로 아이거 북벽에 도전했다. 그들은 높이 24m의 ‘힘든 크랙(Difficult Crack)’을 돌파하고, 높이 305m의 오버행 ‘로트 플루’ 밑에 도달했다. 이 절벽은 직등이 아예 불가능했고, 그 좌측의 경사도 80도의 바위 슬랩도 제1빙원으로의 접근을 차단했다.
힌터슈토이서 대원이 바위 슬랩 밑 좌측으로 40m를 대각선 방향으로 자일 하강하며 트래버스해 제1빙원에 도달하는 루트를 개척했다. 후에 이 피치는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라고 명명되었다. 그들은 너무 조급하게 등정을 낙관했기 때문에 이 트래버스 피치에서 자일을 회수했는데, 이 부주의한 조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자일 회수로 인해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것처럼, 퇴각로가 실제로 차단된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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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엑시트 크랙의 쿼츠 크랙을 등반 중인 카트린느 데스티벨레.
- 그들은 ‘죽음의 비박지’에 도달한 후, 선등조 쿠르츠와 힌터슈토이서가 경사도 65도의 제3빙원으로 90m쯤 트래버스했을 때, 후등조는 낙석에 맞아 부상 당한 환자 앙게러 때문에 등반을 포기했다. 선등조는 환자를 외면하고 등반을 계속할 수 없는 처지여서 즉시 하산을 강행했다. 그들은 폭우와 암흑 속에서 ‘로트 플루’의 오버행 좌측에서 세 번째 비박의 고통을 감수했다.
다음날 그들은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 통과에 사력(死力)을 다했지만, 밤새 내린 빗물이 얼어붙어 모든 홀드들이 살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바람에 도저히 이 피치를 통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절벽 아래로 수직 자일하강을 강행했다. 당시는 등반 장비 등강기가 개발되기 이전이어서 카라비너가 등강기 대용으로 이용되었다.
힌터슈토이서는 자일 하강 중에 추락사했고, 그 바람에 환자 앙게러는 늘어진 자일이 목에 감겨 질식사했으며, 라이너는 동사(凍死)하고 말았다. 구조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생존자 쿠르츠는, 그의 카라비너에 자일의 매듭이 걸리는 바람에 안전지대로부터 5m 거리까지 접근하고 안타깝게 절명했다.
1937년 또 한 명의 클라이머가, 그리고 1938년 6월 두 명의 클라이머들이 추락사해 아이거 북벽에서 모두 9명이 목숨을 잃은 후, 같은 해 7월 아이거 북벽이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팀에 의하여 어렵사리 초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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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거의 북동릉.
- 독일의 클라이머 안데를 헤크마이어와 그의 자일 파트너 루트피크 푀르크가 12발짜리 최신 크램폰을 장착하고, 경사 55도의 제2빙원을 등반 중에 아이스 해머로 스텝을 깎으며 느린 동작으로 등반 중인 오스트리아의 대학생 프리츠 카스파레크와 하인리히 하러를 따라 잡고, 두 팀은 합동 팀을 구성했다.
그들이 경사도 65도의 제3빙원을 트래버스한 후 경사도 45도의 람페를 180m가량 오르자, 눈 녹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 침니가 나타났다. 그들은 폭포 피치 아래의 좁은 레지에서 2개 조로 나누어 비박했다. 다음날 헤크마이어가 크램폰을 착용하고 폭포수가 얼어서 형성된 빙벽으로 선등했다. 그는 빙벽 상단의 높이 9m 오버행 빙벽을 어렵사리 돌파했다. 그들은 람페빙원을 지나서 우측의 높이 30m의 ‘잘 부서지는 바위 크랙’을 오르고, 오버행 암벽 밑으로 수평 트래버스를 시작했다. 이 트래버스는 전망이 탁 트여 지금은 ‘신들의 트래버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헤크마이어와 푀르크 조가 ‘신들의 트래버스’를 통과하고 난코스인 가파른 스텝을 내려서 제4빙원, 높이 150m의 ‘화이트 스파이더’ 밑에 도달했다. 두 사람이 크램폰과 아이스 액스를 이용하며 프런트포인팅으로 재빨리 ‘화이트 스파이더’를 절반쯤 기어올랐다. 카스파레크는 스텝을 깎으며 하러와 느린 동작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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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트 플루를 직등하는 스위스 산악인.
- 그 순간 낙뢰가 주변의 바위 능선과 절벽의 여기저기에서 부딪치며 찬란한 ‘빛의 향연’을 시작했고, 곧 뒤따라 천둥소리가 우당탕 쿵쾅 맞장구를 치며 아비규환을 연출했다. 그들이 ‘화이트 스파이더’의 상부에 도달할 때까지 이 공포의 ‘빛과 소리의 번개 쇼’는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그들의 고통도 가중되었다. 그때 갑자기 쉿 소리와 함께 낙석과 낙빙이 선발대로 쏟아져 내렸고, 곧 이어 눈사태가 뒤따르며 눈구름을 일으켜 사방이 눈가루 천지였다.
헤크마이어는 ‘화이트 스파이더’ 상부에 도달해 번개 같은 동작으로 빙벽에 아이스 액스를 깊이 박고, 자신을 확보한 후 바로 뒤쪽에 서있던 푀르크의 목덜미의 옷깃을 움켜잡아, 친구가 허리까지 차오르는 가루 눈사태에 휩쓸려 추락하는 것을 방지했다. 헤크마이어의 능란한 솜씨가 없었다면 아이거 북벽에서 또다시 참사가 되풀이 될 뻔했다.
잠시 후 두 번째 눈사태가 쏟아져 내렸고 얼음 조각들이 쏟아지며 눈사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뒤따르던 카스파레크는 손등에 낙석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그들은 그날 밤 요란한 가루 눈사태가 쏟아져 내리는 엑시트 크랙 속의 생지옥 같은 좁은 레지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이 엑시트 크랙의 난코스, 즉 가파른 침니 크랙인 ‘쿼츠 크랙(Quartz Crack, 석영 크랙)’을 등반할 때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 선등조는 폭풍설 속에서 어렵사리 침니 크랙을 돌파하고 가루 눈사태가 쏟아져 내리는 쿨와르로 등반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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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빙벽 등반 중인 제프 로우.
- 헤크마이어가 오버행을 등반 중에 그가 설치한 피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추락하며 확보자 푀르크를 덮쳤고, 이어서 선등조 두 사람이 함께 추락했다. 헤크마이어가 사력을 다해 번개 같은 동작으로 빙벽에 크램폰과 아이스 액스를 연달아 박아 드디어 추락을 저지시켰다. 그가 추락할 때 그의 크램폰 발이 푀르크의 엄지손가락을 꿰뚫어 심한 출혈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헤크마이어의 능란한 등반 솜씨가 재난의 가능성을 봉쇄(封鎖)한 셈이었다.
그들은 정상 설원을 지나 미텔레기능선으로 7월 24일 역사적인 아이거 북벽 초등에 성공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 주 전에 헤크마이어와 푀르크에게 아이거 북벽의 초등 업적을 찬양해 특별 메달을 수여했다. 그리하여 순수해야 할 스포츠 활동인 등반이 정치와 결탁하는 오명(汚名)을 남기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살라롤리, 72세 최고령 등정 기록
1947년 프랑스의 리오넬 테레이와 루이스 라슈날이 아이거 북벽 신들의 트래버스 초입에 도달했을 때 우박이 쏟아져 내리고 낙석의 포화가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비박한 다음날 화이트 스파이더 위쪽 엑시트 크랙에 들어섰을 때 뇌우가 그들을 강타했다. 주변 바위들이 전기 충천으로 윙윙거렸고, 그들이 휴대한 장비의 철물들은 전기유도체로 변모해 푸른 불꽃 투성이가 되어 번쩍거리고 탁탁 소리를 냈다.
그들은 천둥소리와 낙석소리로 공포에 떨며 빗물과 우박이 녹은 물이 얼어붙어 살얼음판이 된 절벽으로 등반을 계속해 진눈깨비를 맞으며 오후 3시에 아이거 북벽의 두 번째 등정에 성공했다.
1961년 3월 6일부터 12일까지 오스트리아 산악인 알름버거와 독일 산악인 킨쇼퍼, 만하르트, 히벨러(Hiebeler)가 아이거 북벽의 헤크마이어 초등루트를 최초로 동계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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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타노이아의 하부를 등반 중인 제프 로우.
- 1963년 8월 2일부터 3일까지 스위스 가이드 미셀 다르벨라이는 아이거 북벽의 헤크마이어 루트를 단독 등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968년 아이거 북벽의 ‘노스 필라(North Pillar)’에 두 개의 신 루트가 추가되었다. ‘노스 필라’는 북동벽과 북벽 사이의 경계선상에 위치한다. 치엘레츠키, 라우카이티스, 사피르스키, 지사크 대원들로 구성된 폴란드 대가 7월 28일부터 31일까지 ‘노스 필라’에 신 루트를 개척했고, 이탈리아의 남티롤 출신 라인홀트와 귄터 메스너 형제, 독일 산악인 토니 히벨러(Toni Hiebeler)와 프리츠 마슈케(Fritz Maschke)가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노스 필라에 또 하나의 신 루트를 개척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전에 헤크마이어 초등루트를 10시간 만에 등정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이거 북벽을 두 번 등정한 셈이 되었다.
1973년 9월 폴란드의 여성 클라이머 반다 루트키에비츠(Wanda Rutkiewicz), 다누타 바흐(Danuta Wach), 스테파니아 에기에르스도르프(Stefania Egierszdorff)가 아이거 북벽 ‘노스 버트레스(노스 필라)’의 메스너-히벨러 루트를 3일 만에 재등했다. 그들은 전혀 남성대원들의 도움 없이 여성들의 힘만으로 이 업적을 이룩했다.
1983년 오스트리아 산악인 토마스는 헤크마이어 초등루트를 4시간 50분 만에 돌파했다.
1992년 동계에 프랑스의 여성 클라이머 카트린느 데스티벨레는 17시간 만에 아이거 북벽의 노멀 루트를 단독으로 등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997년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살라롤리가 72세에 2명의 가이드와 헤크마이어 초등루트를 등정했는데, 그가 아이거 북벽의 최고령 등정자가 되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