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62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물은 그저 흐르고
(流水下山非有意)
차암 수정(此菴守淨) 선사
유수하산비유의
(流水下山非有意)
편운귀동본무심
(片雲歸洞本無心)
인생약득여운수
(人生若得如雲水)
철수화개편계춘
(鐵樹花開遍界春)
산 아래로 흐르는 물은
의미를 두지않고 그저 흐르고
골짜기 되돌아서 모여드는
조각 구름은 무심할 뿐이다.
인생에 잃고 얻는 것이
만약 물과 구름 같아진다면
무쇠 나무에 꽃이 피어나서
두루 널리 온 누리가 봄이리
"
자연(大自然)의
이치(理致)와 섭리(攝理)는
언제나
지극한 도(道, 도리)에
순응(順應)하여
일어난다.
물이 흐르고(水流)
꽃이 피어나는(花開)
이치(理致)
바로 여기에
깨달음(無上正等覺, 진여)의
소식(消息)이 있다는
것이다.
차암 수정(此菴守淨)
선사 스님(禪師, 僧, 沙門)의
이 시(詩, 게송, 禪詩)는
자연의
섭리(自然攝理)를 통해
깨달음(正等覺)이
익어가고 열리는(開眼)
득지(受持得持)의
심경(心境)이 담담하게
묘사(描寫)되어 있다.
이 세상
우주만물(宇宙萬物,
無常諸法)을 깨달아 느끼고
달관(達觀)하고
바라보는 자(修行者)에게는
일체의
모든 것(一切諸法)이
그저 그대로 담담하게
느껴질 뿐이다.
탐(貪)
진(嗔)
치(痴)
삼독심(三毒心)의
울분(분노, 성냄, 화냄)도
욕망(욕심, 欲望)도
모두 벗어나
대자연(大自然) 속에
동화(同化)되고 묻혀
스스로
자신(自己自身, 나)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시비분별(是非分別)
유무존재(有無存在, 차별)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진정한
무아無我)의 경지(境地)에
들어갈 때
비로소
모든 우주만물(諸法)
물질공색(物質空色)을
존재(存在)의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관(主觀)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생성소멸)
망상(妄想 잡념)이 들어서
사물(事物)의
본래 참모습(본래면목, 眞如)을
왜곡(歪曲)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아직도 깨닫지 못한 범부(凡夫)
중생(衆生)은
항상(恒常心)
언제나 진리(眞理)에 대한
오해(誤解, 잘못된 판단 해석)로
일관(一貫)하면서
일생(一平生)을
무의미하게 허비(虛費, 낭비)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人間, 중생)에게
가장 시급(時急, 급박)한 것은
이렇듯
잘못 판단(判彖)하고
잘못 이해(理解)하고
해석(解釋)하며
잘못 보는
오해(誤解)의 눈(眼目)을
옳고 바르게 고쳐야 한다는
점(要點)이다.
잘못 이해(理解)하고
잘못 판단(判彖)하고
오해(誤解)하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無知) 것만도
못한 것이다.
순리(順理)에 의해
세상을 무심히 받아드리면
거기서
초월(超越)된
절대의 세계가
나타나고
모든 격(格式)을
뛰어넘는 격외(格外)의 소식을
체험(體驗)하고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라는 것을
말해주는
시(詩, 게송, 禪詩)이다.
무쇠나무에 꽃이 피어
두루 온 누리가 봄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이 시(詩, 게송, 禪詩)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적으로
살려 놓았다.
차암 수정(此菴守淨)
선사(禪師)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별로 없다.
생몰연대(生沒年代)도
알 수없는 미상(未嘗)이다.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에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가
전해 질 뿐이다.
"
차암 수정(此菴守淨)
선사(禪師) 대중법문
서선사(西禪寺)의
차암 수정(此菴守淨) 선사는
묘희스님
회하에서 공부하여
크게 깨친 이로
종안(宗眼)이 밝았는데
일찍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
싸움을 잘하는 자는
자신의 목을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공을 이룬다.
공을 이루면
편히 앉아 태평을 이루고
태평을 이루면
베개를 높이 베고
아무런 근심이 없다.
석 자(麻三尺)의
칼을 뽑아들지 않고
한 벌의 활을
어루만지지도 않고
말은 화산(華山)
남녘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桃林)
들녘에 방목하니
때맞은 비바람에
어부는 노래하고
나무꾼은 춤을 춘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시대에
요순 같은 성군도
오히려
교화의 찌꺼기 있어
천지를 수용할 수 없음을
어찌하랴 !
요순이 이름을 모르고
온 나라가 흥망의 일을
관여치 않아도
구름과 함께
동정호를 차지할 줄
알았으니
"
"
입을 꼭 닫아도
때때로 말을 하며
혓바닥을 잘라버려도
쉴새없이 재잘댄다.
가장 절묘한 것은
눈 속의 티끌이니
이미 절묘하다 해 놓고
어찌하여 눈 속의 티끌이라
하는가 ?
깨달았다
깨달았다 할 때
그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고
현묘하다
현묘하다 하는 곳도
역시 꾸짖어야 한다.
"
일갈(一渴)하시었다.
※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은
당송(唐宋)
선종사(禪宗史)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꼽히는
강독(講讀)으로
13세기 편찬된 선어록이며
청원행사 계열의 선사와
남악 회향 계열 선사 등(等)
총 37명 선사들의
언행과 게송 등을 48권으로
편집한 책이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언제든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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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