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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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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낙금헌 이정백
혜명 추천 0 조회 14 13.06.26 05: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명 : 이정백(李庭柏) , 1553년 ~ 1600년
본관 : 진성(眞城)
: 여직(汝直)
: 낙금헌(樂琴軒)
출생지 : 안동(安東) 주촌리(周村里)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안동(安東) 가후동(家後洞)
입사경로 : 1588년(선조 21) 생원시(生員試) 합격, 유성룡(柳成龍)의 추천
증직및기타 :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사임
남다른 충효관
이정백이 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 때 퇴계 이황이 증조부인 이정의 제사 때문에 종가에 왔었다. 이정백이 나가서 인사를 드리자 이황이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이처럼 신중하니 장차 큰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글자를 써보라고 하였다. 이에 ‘충효’ 두 글자를 썼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충효가 갖는 의미를 가장 크게 생각할 정도로 남다른 충효관을 갖고 있었다. 11살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3년간의 여묘 생활 동안 밤낮으로 형인 이정회와 동거하면서 호곡하고 배전하는 것이 성인과 다름없었다.
생사를 뛰어넘는 우애
친우인 권우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자녀가 모두 어렸다. 그러자 노비들이 환난을 꾸미려고 하였다. 이를 알아챈 이정백이 본가와 의논하여 모의를 꾀한 노비들의 우두머리를 죽였다. 이로 인해 권우의 집안은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김해(金垓)가 군 중에서 병사하자 정성을 다해 시신을 염습하여 본가에 보내주었다.
나라를 위해 일어서다-의병장 이정백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과는 함께 살 수 없다면서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동지를 규합하고 의병을 모집하면서 여러 읍에 글을 띄우자 모두 응하였다.

안동 기사리에서 회의하여 의병 대장에 추대되었고, 용궁에서 여러 군의 의병들과 합한 뒤에는 배용길과 함께 좌우부장에 추대되었다. 군진에 설 때마다 항상 눈물을 흩뿌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오늘 왜적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나 군세가 약해 성패를 알 수 없지만, 서생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예천으로 군대를 옮겨 일본군과 대적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명나라 장수 오유충은, “이정백은 한 서생으로 일에 임해 대의를 결단하매, 도끼로 내려친다고 하더라도 그 기백을 꺾을 수 없다.”고 평가하였고, 유성룡은 “이정백의 강직함은 송나라 때 여진과 결사항쟁을 주장했던 호담암과 견줄만 하다.”고 평가하였다. 어려서부터 충효 2자를 썼던 그는 의병장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나고 서생으로서 무장을 감동시킬 기백을 보였던 것이다.
관직에 초탈하고 거문고를 즐기다
류성룡이 그의 행동거지를 높이 사 조정에 추천하여,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 구차하게 살아남고 또 관직까지 제수받으니, 이는 신하로서 수치다. 내가 죽은 뒤에도 관직명을 쓰지 말아라.”하고, 산에 들어가 음풍농월하면서 독서와 거문고로 소일하였다. 그리고 집 앞에 작은 헌(軒)을 짓고 낙금헌이라 이름짓고 거처하였다.

가족이야기

: 이연(李演)
생부 : 이희안(李希顔)
양부 : 이희옹(李希雍)
: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예범(金禮範)의 딸
형제 : 이정회(李庭會)
가난한 여동생을 위해 여종을 주다
이정회와 이정백, 그리고 여동생과의 우애는 남달랐다. 여동생 하나가 집은 가난하고 자식이 많은 것을 항상 불쌍히 여겨, 자기의 여종을 그녀에게 주어 살림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학문이야기

사숙 : 이황(李滉)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김성일(金誠一), 남치리(南致利), 권우(權宇), 신지제(申之悌), 백현룡(白見龍), 최현(崔晛)
이황을 사숙하다
김성일과 내외종간으로 그와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깊은 뜻을 깨우쳐, 선배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늘, “퇴계 선생이 우리 집안 사람인데도, 내가 늦게 태어나서 직접 선생으로부터 우리 집안의 학문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탄하였다. 남치리, 권우 등과 함께 이황의 유문(遺文)과 이학통록(理學通錄) 같은 책을 강론하였다.

저작이야기

공동저작
『역동서원지』
문집명
『낙금헌집(樂琴軒集)』
역동서원지 교감
남치리, 권우와 함께 역동서원지를 증보하는 일에 참여하여 교감을 하였다. 교감을 마친 후 정서본을 만들 때 남치리와 권우가, 친우 중에 이정백이 글씨를 가장 잘쓰기 때문에 그가 옮겨 적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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