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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사는 사람
창세기 49: 28~33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자기 열두 아들에게 축복과 훈계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지 않고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필한 후에는 이 강한 사람도 결국 힘이 떨어졌으며 인생의 머나먼 길을 지치지 않고 여행하던 그의 발도 침상에 거두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3절에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파란곡절이 많았지만 끝내 우리 모든 인류에게 고통적으로 임하는 최후의 사건이 그에게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눈먼 아버지를 속여 왔던 그였지만 자기의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도 이 무덤으로 가는 길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난 형으로부터 무사히 탈출해 갈 수 있었던 야곱이었지만 더 빠르고 정확한 발이 그를 뒤쫓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발걸음이 그를 뒤쫓아 왔던 것입니다.
돌로 베개를 삼고 누워 자며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을 구경하던 그였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야 하는 문턱에 서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승리를 얻었던 야곱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사자와 씨름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가나안에서 천막 생활할 때는 수많은 대적이 그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었으나 주께서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수만의 적들 가운데서도 보호를 받았지만 이제는 마지막 적의 손에 떨어져서 최후의 복수의 칼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표현에 의하면 야곱은 이 거역할 수 없는 선언에 항거하지 않았고 그의 영혼이 이에 대해 조금도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자기의 일생이 고난이 심하고 극히 짧은 생애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끝날 즈음 즐거움으로 이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는 주저함이나 당황함,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자의적인 순종으로 자기 발을 거두고 머리를 수그러뜨리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같은 일을 겪을 것이므로 이 능력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명상함으로 우리의 여생을 바로 마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전도서 7장 4절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혹은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죽은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리” 했습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 이 말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우리의 관념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 기뻐하고, 좋아하고, 축하하며 잔치를 합니다. 왜냐 하면 퍽 희망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게 되면 슬퍼하며 웁니다.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로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깊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역설적인 것이 종종 말씀되어집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고 납득이 잘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잘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7장 16-17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환난과 질고, 근심과 걱정, 실패와 좌절 속에 사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져 겉 사람은 후패하나 이 육신의 장막집 벗는 순간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세상 것은 꿈에 본듯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마련하신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때 그 기쁨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후렴)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아멘
2. 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정녕히 내가 알기는 주 예비하신 집 있네
3. 후일에 석양 가까워 서산에 해가 질 때에
주께서 쉬라 하실 때 영원한 안식 얻겠네
4. 그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켰다가
주께서 문을 여실 때 이 영혼 들어가겠네
거기는 다시 굶주리는 슬픔도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52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그 절반 이상이 먹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아직도 먹는 것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눈물나는 일이 많이 있지만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주릴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는 목마를 필요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목마른 세상입니다. 만족이 없는 세상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대로 목이 말라 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권세를 누리면서 목이 말라 합니다. 지식 많은 사람은 지식이 있어도 목이 말라 합니다. 이 세상은 한 마디로 목이 마른 세상입니다. 만족이 없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부족한 세상입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마음에 만족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흘린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른 성경 번역을 보면 눈물의 방울방울을 씻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흘린 여러 가지 경우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사업의 실패로 흘린 눈물로 닦아주십니다.
아들 대학 시험에 실패해서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억울하게 중상모략 당해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남편 진급되지 않아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돈 없다고 업신여기고 천대받아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부모 잃고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남편 속 썩여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사랑하는 남편 먼저 보내고 가슴 아프게 흘린 눈물도 닦아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한마디로 괴로운 세상입니다. 하늘나라 가기 전에 이 괴로움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서 저 하늘나라에 가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 감사와 감격만이 있는 곳에서 영광을 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들려 주신 말씀도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느 세상 문헌에서 이런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죽는 것이 복되다고 하신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세상에서는 죽음이 인생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절망입니다. 왜요? 그 다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모두가 벌벌 떱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주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영생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의 비자를 받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저 ‘죽음’이란 것은 말하자면 이 세상 나라에서의 출국 신고인데 이 수속만 끝마치면 하늘나라 시민으로 세상에서는 듣기만 하던 그 나라에 직접 가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지금은 모두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가게 되면 너무 감격스러운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좋았는데 그때에는 직접 뵙게 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엘리야, 다니엘 여러 믿음의 대선배들을 성경에서만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눈으로 직접 뵙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울까요?
며칠 전 어느 성도님이 성지순례단에 참례하여 다녀오신 이야기를 하시면서 성경에 기록된 여러 지역을 직접 가서 눈으로 보니까 실감이 나고 감격스러웠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저 듣기만 하던 것을 눈으로 뵙는다는 것은 정말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전에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사실 모세와 엘리야와는 말 한마디 건네 본 적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누구의 소개도 없이 알아보게 되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장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서, 다른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계시도록 하십시다.”고 제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런 제의를 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사도 요한이 신령한 눈으로 하늘나라를 어느 정도 구경을 하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만 사실과 비교하면 그 기록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 이상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뿐입니다.
하늘나라! 그곳은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 나라에 가게 되니 축복이 아닙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도 시편 116편 15절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죽는 것이 복되다는 말하고는 다릅니다. 주 밖에서 믿음 없이 죽는 것을 복되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신다고 했지, 믿지 않는 사람이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이 결국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으니”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가는 길이 다 달라 보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 길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방 통행입니다. 죽음이라는 그 문을 향해서 쉬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에는 아무리 냉정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예외라는 것이 있는데 이 죽음의 길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어 보이는 세상이지만 이것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권세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법까지도 편리하게 뜯어고치는 세상이지만 이것만은 안 됩니다. 이 길은 다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하루 살았으면 그만큼 그 문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처럼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때가 되면 그것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내년이면 제가 목사가 된지 30년이 됩니다. 세월이 빠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베인 바 되어 마르나이다”(시편 90:3-6)
시편 39편 5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은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편 39:4)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사실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하면서 사는 삶의 자세가 지혜 있는 사람의 생활 자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야고보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더구나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는 사람과 세상 중심해서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따라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세속적인 향락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전에 헬라의 문화가 극성할 때 그 사상을 지배하던 것 가운데 소위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최고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지적한 것처럼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루살이 인생입니다. 그저 내 귀로 듣는 대로, 내 눈으로 보는 대로, 내 코로 맡는 대로, 내 입으로 맛보는 대로, 내 발로 걷는 대로, 내 손으로 만지는 대로, 내 몸으로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마음껏 즐기자고 했습니다. 세속주의, 쾌락주의, 현세주의입니다.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가 되는 사람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토익학파입니다. 소위 염세주의적인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잠깐이고 허무하니 결국 의미가 없어. 결국 인간의 생활이란 절망의 식은 재로 화하고 말 것이야.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 뿐이야. 그러니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 생을 구하지 말자. 생을 부정하라. 생을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이 헛된 생에 대해서 속지 않게 될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성경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성경도 인간의 허무함, 인간의 무상함, 인간의 순간성을 의미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보이는 면만을 가르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면을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람으로 말해도 보이는 육신의 면이 있고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의 사람은 시간이 감에 따라 늙어가고 후패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늙어지고 후패하는 것은 겉 사람, 육신이고 주 안에서 믿음으로 속 사람이 새로워진 사람은 겉 사람이 늙어갈수록 속 사람은 새로워집니다.
고린도 후서 4장 16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처럼 보이는 우리의 육체는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은 영원 불멸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 육신이 비록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잠깐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기대하시는 뜻이 각각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경륜이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 사는 동안 이 세상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네 사는 날이 많지 못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열심히 네 맡은 사명을 다하라.” 성 엘몬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일하고, 사는 것은 내일 죽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의미 깊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겠습니까?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님께 미처 회개하지 못한 것 다 깨끗이 회개하고 완전히 용서받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 막힌 것도 다 헐어야 합니다. 옛말에 “인지장사에 기언야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합니다. “죽음에는 원수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서로 시기하고 미워합니까? 아직도 세상에 오래오래 살 것 같아서 그럽니다. 내가 이 세상을 이제 곧 떠난다면 미운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남은 시간에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부르시면 그대로 갈 것입니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죽을 날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련한 사람입니까? 죽을 날을 생각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바로 사십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것은 순서대로 가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힘써 일해 언제 주님 앞에 선다 해도 “잘했다.”고 칭찬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