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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우 목사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오늘 청년에 대한 설교를 하는데, 사실 젊어도 노인 같은 청년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젊은이 같은 노인이 있습니다. 이것은 청년들에게만 해당되는 설교가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설교입니다. 오늘 제목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청년은 오늘을 잘 살아야 미래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오늘 우리가 잘 살아야겠다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유태인 거지가 아침6시에 한 가정집 대문을 쾅쾅 두들겼습니다. 아침 6시면 아직 잠자고 있을 시간인데, 문을 두드리니 주인이 막 일어나 문을 엽니다. 그때 거지가 자비로운 적선을 바랍니다.
주인이 말하길 “거지라도 염치가 없소? 이른 아침에 남의 집 대문을 두들기면 어쩌란 말이오?” 하는 것입니다. 거지도 자존심이 있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이 사업가인 것을 알지만, 사업하는 방법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지인 나도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내 사업의 방법에 대해서 당신도 비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무엇이라 하던지 우리의 자존감 말입니다. 청년이 무엇입니까? 발달심리학에 보면 18-35세가 청년이라고 합니다. 청년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솝우화가 생각났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던 개구리가 있습니다. 개구리가 하늘을 난다는 것은 대단한 야망이 아닙니까?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다고,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비둘기에게 부탁해서 비둘기의 다리를 잡고 하늘을 날게 된 것입니다. 다른 개구리들이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아래에 있던 개구리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 개구리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하늘을 날게 되서 좋겠다. 그런데, 누구 아이디어니?” 그 순간, 개구리가 하는 말이 “내가”라고 자랑하는 순간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된지는 모르는데, 아직까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 청년들의 특징
첫째, 가능성 - 미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만한 사람입니다.
둘째, 변화-기성세대와는 다르게 변화를 좋아합니다. 비판도 좋아합니다. 소속감입니다. 청년은 가능성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조급한 판단을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알렉산더는 못할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세계를 정복한 사람입니다. 세계를 정복하다가 정복할 대상이 없어서 울었다고도 합니다. 그가 임금이 되었을 때에 스승이 물었다고 합니다.
스승 : 임금이 된 후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알렉산더 : 헬라통일입니다.
스승 :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알렉산더 : 그 다음은 소아시아를 점령할 것입니다.
스승 :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알렉산더 :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점령할 것입니다.
스승 :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알렉산더 : 인도까지 점령할 것입니다.
스승 :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 여러 번의 질문을 되풀이한 후 세계까지 정복한 후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알렉산더 : 그때가 되면 죽겠지요.
스승 : 그러면 그렇게 고생만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땅을 점령할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알렉산더는 33살에 바벨론 원정길에서 열병으로 죽습니다.
그가 죽을 때 일화가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관에 양쪽으로 구멍을 내서 양손을 내밀게 해달라”,
‘알렉산더는 세계정복을 꿈꾸었지만, 죽을 때는 빈손으로 죽더라.’ 무슨 뜻입니까? 후회하는 마음이 아닙니까? 의미없이 가능성만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 전11:9-10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심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성공하는 미래, 현존하는 미래를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12:1에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은 부족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는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부족한 존재입니다.
옛날 페르시아의 나그네가 여행을 하다가 사막에서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북쪽으로 2km만 더 가면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오아시스에 물과 함께 자갈이 있는데, 될 수 있으면 많은 자갈을 몸에 넣고 자거라. 그러면 아침이 되었을 때, 한가지 기쁜 일과 한가지 슬픈 일이 있을 것이다.”
길을 더 가니, 오아시스에 물과 자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말대로 자갈들을 많이 집어넣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돌을 넣고 자려니, 불편해서 하나 둘 꺼내다 조금만 넣고 잤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주머니에 넣었던 돌들이 금이 되었습니다. 기뻣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그럴줄 알았으면 좀 더 넣을걸 하는 마음이 들자 슬펐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한탄했습니다.
우리 인생엔 기쁨과 슬픔이 있지만, 슬픔이 더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어느 동네 땅값이 오를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샀을 것이 아닙니까? 내일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 알면 창조주입니다. 부족함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아는 척 합니다. 산수는 ‘1+1=2’ 가 맞습니다. 어제도 결혼식이 있었는데, ‘신랑+신부=두사람, 세사람, 네사람’ 이 됩니다.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사는 것이 더 잘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1+1=2 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은 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짜 삶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 식당에 갔는데, 어떤 분이 tv에 소개된 노인부부 이야기를 해 줍니다. 한 노인부부가 동남아 시골을 다니면서 옷도 주고, 학용품도 주고, 병도 고쳐준답니다. 이분들을 보니 의사 같지는 않고, 농사짓는 분들입니다. 자식들 다 키운 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겠다고, 그 곳에 가서 정글을 헤치며 도와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도와주는 사람이 멋있는 것입니다.
소위 리더십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리더입니까?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1. 나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지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낡은 경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함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민수기14장에 보면 12명의 정탐군이 있습니다. 여러분, 10명의 정탐군 때문에 2명의 정탐군이 어려움을 겪으니까, 우리는 그 10명을 나쁘다고 이야기합니다. 진짜 나쁩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처럼 합리적인 사람들이 없습니다. 정탐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갔습니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진짜 젖과 꿀이 좋은 땅이다. 우리가 그 땅에 살면 좋겠으나, 힘센 사람들이 이 땅을 뺏으려 할 것이다. 그곳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못 살게 될지 모른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바른 판단이며 사실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그러나 합리적인 판단을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했고, 사막에 오는 동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마실 것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다 아시는데, 너무 인간을 앞세우다 보니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맞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그것을 안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 청년이 영생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부족하다는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가복음 10:29-30에 있는대로 ‘나를 위하여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친척이나 재산을 다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서도 100배나 받을 것이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질주의적인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의 가진 낡은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곳에 살 길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십일조 생활 잘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활의 전부는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 봉급은 하나님께 다 바치고, 두 번째 봉급은 부모님께 다 바치고, 세 번째 봉급은 자기 마음대로 쓰고, 십일조 하고 자기 마음대로 쓰고, 청년들이 장년들보다 액수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남을 구제하고 도와주는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은 인간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나를 보호하시는 주님, 주님 곁에 더 가까이 가리라,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창조주를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부족을 아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존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의해 창조된 우리 아닙니까?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발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코미디 계의 대부라고 하는 김경태 장로님, 우리 이웃에 있는 마포교회 장로님이십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 라고 하는 프로를 만드신 분입니다. 이분이 처음부터 유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송국에 입사했는데, 프로그램 진행 피디가 아니라 방영피디를 맡았습니다. 다른 피디들이 일하는 낮시간에는 빈둥빈둥 놀다가 다른 피디들이 퇴근하고 난 후 만들어 놓은 테잎을 트는 것이 이분이 하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프로그램을 안 만드니 실력이 쌓이지 않습니다. 방송시간 끝날때까지 퇴근도 못하니 힘들고 짜증이 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뇌물을 써서 1~2년 안에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데, 예수믿는 사람이 그럴 수도 없고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무런 애도 안 쓰면 평생 빛도 못 볼 것 같아 답답할 것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해야겠다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유머를 좋아해서 코미디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읽다 보니 웃음코드가 보였습니다. 몇 년 후 프로그램 제작을 맡겼는데, 그것이 코미디 프로였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쌓아놓은 감각과 실력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것이 ‘웃으면 복이 와요’, 대 히트를 쳤습니다.
꿈을 가져야 합니다.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는 것이, 그런 사람들이 정신적인 거인입니다. 정신적인 난쟁이가 되서는 안됩니다. 나는 배경이 안 좋다든지, 부모를 잘못 만났다던지, 이런 사람이 정신적인 난쟁이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상처받은 사람은 평생 교회 욕 하는데, 정신적인 불구자입니다.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의미를 생각하고 잘 받아들일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그 상황을 잘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다니엘이고, 그런 사람이 요셉이고, 그런 사람이 느헤미야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달란트 받아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신적인 거인의 존재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상처받고 살지 말고 그것이 내게 약이 되고 은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보험 설계사가 돌아다니면서 늘 10.6.3.25 숫자를 중얼거렸답니다.
오늘 10명의 고객에게 전화를 해서, 그 중에 6명을 만나서, 그 중에 3건을 성사시키고, 매일 그렇게 해서 일년에 2억5천만원을 벌겠다. 그것이 10, 6, 3, 25 였는데 그렇게 되었답니다.
어느 학생은 5, 3, 20, 5를 외치며 다녔습니다.
하루 5시간 공부하고, 3명의 친구와 전화하고, 20분간 땀흘려 운동하고, 5분동안 이 다음에 나이 40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 될지를 생각했답니다. 그것이 5, 3, 20, 5 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의 현장 속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나는 우리가 이러한 꿈을 이루어 가는 그런 꿈의 장소, 터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광동 오산학교에서 100주년 개교행사를 준비하며 저에게 자문위원을 하라며 축사를 써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강 이승훈 선생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중 오산의 교가가 멋있습니다.
백두산에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
범중의 범으로 불리우니라
너희들은 오산에서 자랐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참 멋있습니다. 호랑이는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고 깊은 백두산에 사는 호랑이만이 범중의 범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좋은 것 많이 있어 복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두산 호랑이입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인 백두산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 원망, 시험에 들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다 우리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우리 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기 바랍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가운데 ‘너 자신을 알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는 말이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무튼 결혼은 하는 것이 좋다 양처를 만나면 행복해 질 것이요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성직자가 될 수는 없어도 우리는 성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갖는 것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유태인 포로 수용소에서, 독일군의 고도의 심리전은 사람을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은 죽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장실도 제한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변의 고통 속에서 아무 곳이나 배변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은 짐승이었습니다.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컵의 물 때문입니다. 그 것을 다 먹어도 부족한데, 그 중의 반은 마시고, 반을 남겨서 이 닦고, 얼굴 씻고, 면도하고, 심지어 목욕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늘 사람이기를 원했던 사람만이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자존감은 십자가에 죽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우리의 상황이, 어떻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말씀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존재의 목적과 창조의 의미를 알고 방황하지 말고 최선 다해 충성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로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