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성경본문 : 잠언 28: 1-5
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5.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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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신과 전문의가 요즘 유행하는 현대인의 정신질환을 가리켜 불안 심리를 바탕으로 한 후천적 “의존 장애” 라 정의 했습니다. 특히 IMF 이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법칙은 그 앞에 강요당한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범죄와 사건들을 통해 사회병리 현상을 악 순환시키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책임은 없고 권리만 주장하는 이 “의존장애” 증상은 정상적인 노력과 능력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차이를 오히려 차별로 간주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무조건 획일적으로 똑같이 사는 것이 이상적 사회라는 ‘하향 평준화 증후군’ 을 만들어 냈다고 진단했습니다.
누군가가 성공하면 그 사람의 장점과 비결을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투서와 모함을 통해 인신공격과 흠집내기에 혈안이 되어 창의적인 인재들을 죽이는 것은 정상적인 노력을 게으르게 만들뿐 아니라 무한의 국가 경쟁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하는 ‘척’하고, 국민은 국가를 위하는 ‘척’만 하는 상호연기는 또 하나의 폴란드 사태를 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합니다. 정부가 국민을 대상으로 임상실험해서 여러 번 불협화음을 냈기 때문에, 이제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정상적인 신뢰를 얻기에 한계수위를 넘은 것 같습니다.
의약분업, 항공사 노조들의 출근 거부, 그리고 수하물 운영체제 불안 등 많은 문제점 지적에도 불구하고 조기 개항하는 인천 국제 공항, 의료보험료 인상, 무절제하게 북한 돕기에 퍼부은 결과로 야기된 무리한 공적 자금 투입, 한국이 싫어 떠나는 신 교육 엑소더스 이민 등. 이미 이땅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떠나는 사람이 증가하는 오늘의 한국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입니다.
똑똑한 사람도 많고 추진할만한 아이디어나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왜 Made in Korea 는 국제 시장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걸까요? 하나의 사건이 터지면 관심도 많고 견해나 아이디어, 수많은 방법론들이 제기되어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헌신을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도력과 구심점 부재 때문입니다. 정당한 가치와 권위에 대한 존경과 서로간의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헌신에 대한 적절한 보상 및 가치 인정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한국은 어느 새 눈치 잘 보는 복지부동, 요지부동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창의적으로 튀어버리면 ‘왕따’ 시키고, 꾸준하게 인정 받으면 ‘은따’ 로 죽여버리는 우리의 관료적 조직(직장, 교육)문화, 이런 정신구조의 부패와 타락이 정상적인 노력을 게을리하고 환멸을 느끼게 하여 한국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식자들이 진심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것은 너무 자주 개선의 노력이 묵살되고 좌절되기 때문입니다. 체념을 넘어서 포기 상태로 접어든 느낌입니다. 차제에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나라 현실의 명암을 조명해 보고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너무 정부만 탓한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국민이나 우리 개개인도 각성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도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구나,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이(spurn:추방/일축/냉대하다/물리치다)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3-4)
성경은 지도자와 백성 그리고 개개인 모두가 하나같이 죄인이라고 증언합니다. 이땅에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때문에 너무 많은 목소리들이 난무해 합법적인 권위마저도 부정되고 무시되는 질서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육계에도 경제계에도 심지어 종교계에서도 질서의 혼란이 이 사회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잠28:2 은 말씀합니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지지만 명철과 지식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너무 똑똑한 사람이 많아 한국호는 바다가 아니라 산으로 가는 듯합니다. 이 잠언28장은 의인과 악인의 특성과 그들의 결말을 대조하는 언급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악인에 대한 묘사는 오늘 우리의 주변 현실이고 반대로 의인의 삶은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의와 경건의 삶을 보여줍니다.
4절은 말씀합니다.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분명 우리나라가 법치 민주국가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있지만 그것을 지키는 rule 이나 규칙이 없기 때문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법을 세워도 기득권자나 법을 초월하는 권력이 등장해서 유권해석을 마음대로 해버리면 자발적인 준법정신은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6절은 부정한 부자보다는 성실한 가난이 낫다고 엄중히 경고하지만 결국 물질 만능주의의 영향 아래 사는 사람들은 바로 현실적인 축복과 물신을 숭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스또옢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물건을 훔치고 죽인 것을 반성하지만 결국 철저하게 상황윤리에 젖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인간의 행위가 용납되고 이해될 수 있다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서야 할 땅은 어디가 되는 것입니까?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그리고 남이 보기에 그럴듯한 정직을 위해 진정한 내면의 솔직함을 은폐시키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깊은 이중성을 만들었습니다.
21절은 공의와 질서가 사사로운 인정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안면 때문에 원칙이 깨지고 한 두 번의 식사 대접과 돈 몇 푼의 촌지 때문에 범법을 눈감아 주는 한 건강한 보통 시민의 잘 사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책하는 것이 아첨하는 혀보다 낫다고 하건만 우리는 듣기 싫은 말을 꺼려하고 혹은 악역을 하는 것이 싫어서 덮어두는 침묵이 결국에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습관으로 굳어지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타협하고 사는 것입니다.
증오할 정도로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보다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관대하게 기준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소망은 하늘에 두고 살면서도 여전히 육체는 이땅에 문화와 씨름하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큰 갈등과 시련이 있겠습니까?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리의 현실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 않기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세월이 너무나도 멀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우리의 기도와 탄식을 들어 줄 수 있는 주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시 땅바닥에 풀석 주저앉아 방성대곡하며 이유없이 하늘을 원망하며 허송 세월로 시간을 죽일 지도 모릅니다.
프로스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름답고 어둡고 아늑한 숲 속.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네.
아직도 자기 전에 가야 할 수 마일 이 더 남아있네.
이 시 한 구절처럼 아직도 달려야 할 수 마일 이 더 있기에 우리는 소망하며 동시에 긴장하며 사는 것입니다. 잠 28장의 끝 절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정직과 신뢰가 그리고 정당한 가치인정과 보상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복지부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회사는 어찌 되던 나만 욕 안 먹고 처세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부패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곳곳에서 상한 영의 탄식 소리가 들려 오건만 산기가 임박해도 구로하며 출산하지 못하는 이 세대의 안타까움 앞에 누가 과연 무슨 말로 희망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마라나타!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외치는 편이 훨씬 쉽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도 주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있기에 그의 긍휼 안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땅은 천국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가질 것 다 가지고, 할 것 다 해 보지만 바닥이 안 보이는 영혼의 허전함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기에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이땅에서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면 이는 곧 저 하늘에 더 깊은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연약한 자의 현실 도피가 아니라 간절한 기대와 믿음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마틴 루터도 그렇게 고백했을 까요?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탑니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으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습니다.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비록 속세의 욕심은 초월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하늘에 속하진 않았기에 이땅의 기준과 그것이 만들어 낸 인간적 문화와 잣대로 영혼의 공백을 채우려 합니다. 그 짓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우리는 무지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왠만큼 분리되었어도 여전히 하늘에는 속하지 못하였기에 미련 반, 소망 반을 품고서 밤을 새우는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땅에 살면서 탄식과 절망, 위로와 소망을 반복 경험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다가도 다소 형통한다 싶으면 이땅의 누림이 너무 좋아 우리 영혼의 알람 시계는 어느새 또 잠이 들고 맙니다. 너무 지쳐 기도할 수 조차 없어 넋 나간 사람처럼 잠들어 버린 한낮의 오수에도 천국의 소망을 보여주실 수 있는 주를 갈망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은 너무 어둡습니다. 칠흙 같은 밤의 작은 별 하나가 유난히 밝아 보이듯 이 세대를 헤쳐나갈 영적 혜안의 지혜를 기다립니다. 그것을 깨우쳐 주는 곳이 바로 우리 교회이면 좋겠습니다.
옮겨 쓴 설교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