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밴드 송골매는 80년대를 록의 전성시대로 이끈 주역이었다. 이들은 항공대 런웨이(활주로)와 홍익대 블랙 테트라(열대어)의 합체를 통해 정상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대중적 인기가 만만치 않은 캠퍼스 밴드의 쌍두마차였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0여 년 동안 9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공중파TV를 장악했던 이들의 행보는 한국 록 음악사상 록밴드가 아이돌의 지위까지 넘보았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우리 대중음악계는 대중적 성공을 거뒀거나 금지의 흔적이 없는 뮤지션에 대한 음악적 평가가 인색한 측면이 있다. 조동진과 송골매는 그 같은 이유로 음악 업적이나 공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아왔던 대표적 뮤지션들이다. 사실 송골매의 리드보컬 배철수의 현재 이미지는 아쉬운 대목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탁월한 뮤지션이었던 그의 정체성은 공중파 TV프로그램 7080콘서트와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더 친숙하다. 세련된 가창력으로 인기가 높았던 구창모의 이름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록밴드 송골매의 전설적 행보는 그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로만 치부될 뿐이다. 이는 대중문화의 전통과 뿌리가 보존되지 못해 과거의 전설적 뮤지션에 대한 존경심이 희박한 우리 대중문화의 서글픈 환경에 대한 재확인일 것이다.
1977년 MBC대학가요제의 성공에 자극받아 생겨난 1978년 해변가요제는 이들에게 중요한 모멘트다. 당시 본선무대에 오른 항공대의 활주로(Runway) 10기가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로 인기상을 수상했고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 2기가 '구름과 나'로 우수상을 수상하며 나란히 자신들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렸다.
같은 해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활주로가 '탈춤'으로 연거푸 은상을 수상하며 스타 캠퍼스 밴드로 확실하게 자리를 굳혔다. 활주로의 드러머이자 리드보컬이었던 배철수는 블랙 테트라의 리드보컬 구창모를 해변가요제 2차 예선에서 처음 보았다. 그때 거칠고 투박하게 음악을 선보인 자신들과는 달리 블랙 테트라의 깔끔한 음악과 뛰어난 보컬에 단박에 반했다고 한다.
1979년 두 밴드는 캠퍼스밴드의 관례에 따라 후배들에게 팀을 물려주면서 <고별공연>을 함께 하며 형제의 우애를 다졌다. 이때 합체를 통한 프로밴드 결성의 꿈을 품었지만 멤버 구성에 대한 이견으로 활주로 멤버들로만 송골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배철수, 지덕엽, 이봉환, 이응수의 4인조로 결성된 송골매 1기는 1979년 1집을 발표한 후 수록곡 '세상만사'를 중심으로 제법 활발한 행보를 시작했다.
반면 '열대어'란 이름으로 거듭난 블랙 테트라 2기는 3장의 독집에 수록된 '내 마음의 꿈', '젊은 태양', '창을 열어라', '강나루 건너'등을 통해 히트퍼레이드를 벌이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음악적 이유로 내홍을 겪으며 리드보컬 구창모가 빠지면서 '열대어'는 김정선, 권오승, 임호붕, 오승동의 4인조 밴드 '4막5장'으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독집을 통해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에 필적할 만한 펑키한 연주를 구사했지만 대중적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반면 송골매 1기는 1집 발표 후 군 리드기타 지덕엽이 군 입대로 빠지고 베이스 이응수까지 탈퇴해 라인업의 재정비가 시급했다. 합체의 가능성은 무르익었다. 송골매의 배철수와 이봉환은 자신들보다 반응이 못했고 제작사와 계약이 깨지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있던 '4막 5장'의 김정선과 블랙 테트라의 구창모를 만나러 설악산 오색약수터에 있는 암자로 찾아가 팀 결성을 제의했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이들은 송골매 2기를 결성해 4인조로 2집 녹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함이 느껴진 사운드를 채우기 위해 당시 군복무 중이던 드럼 오승동과 그의 친구였던 베이스 김상복까지 가세시켰다. 이들이 바로 활주로와 블랙 테트라 그리고 4막5장의 연합군으로 결성된 우리가 기억하는 6인조 록밴드 송골매 2기 라인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