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망의 슬픔들이 나를 에워싸고 지옥의 고통들이 내게 미쳤으니 내가 고난과 슬픔을 만났도다.
4 그때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를 “오 주여,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나의 혼을 구하소서.” 하였도다.
5 주께서는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니 정녕,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도다.
6 주께서는 우매한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아지게 되자 그가 나를 도우셨도다.
7 오 내 혼아, 너의 안식으로 돌아가라. 이는 주께서 너를 후대하셨음이라.
8 주께서는 사망에서 내 혼을, 눈물에서 내 눈을, 넘어짐에서 내 발을 구해 주셨나이다.
9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주 앞에 걸으리이다.
10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으니 내가 크게 고난을 당하였도다.
11 내가 서둘러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 나를 향한 주의 모든 베푸심을 내가 주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라.
14 내가 이제 주의 모든 백성의 면전에서 나의 서원들을 주께 갚으리라.
15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로다.
16 오 주여, 진실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나는 주의 종이며 주의 여종의 아들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결박들을 푸셨나이다.
17 내가 주께 감사의 희생제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내가 이제 그의 모든 백성의 면전에서 나의 서원들을 주께 갚으리니
19 오 예루살렘아, 주의 집의 뜰들 안, 곧 네 가운데서 갚으리라.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1절, 기도할 수 없는 사람,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급한 도움을 얻기 위해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간구할 수도 있고 사람의 인생에는 그래야 할 경우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때 먼저 손을 내미셨던 그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해서(요일 4:19) 그 사랑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2절, 누구든지 지혜와 현명함을 얻기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아낌없이 주신다. "내가 사는 날 동안", 기도는 육신으로 사는 순례자의 날들 동안 항상 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야 되고 기도가 끊어지면 영적 생명은 침체된 것이다. 기도는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지 확인하는 귀납적 증명 방법이다.
3절, "사망"과 "지옥" 두가지가 언급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곳의 문들을 열고 잠그는 열쇠를 가지신 분이 주님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계 1:18). 그분이 원래는 지옥 근처에도 가실 일이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셨음에도 어째서 그분이 허리띠에 그곳의 열쇠들이 채워져 있는가? 즉, 그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몸은 무덤에 안치되어 계셨고 그분의 혼은 "지옥"을 통과하고 계셨다(행 2:31). 그러나 여느 죄인들의 경우처럼 잃어버린 자가 되어 지옥에 남겨지는 대신 죄없으신 주님의 혼은 지옥을 통과하여 그 문들의 열쇠를 취하여 올라오셨다.
사망과 지옥은 둘 다 문들이 있으며(욥 38:17, 마 16:18) 그분은 열쇠들을 얻으시어 그 문들을 열고 나오신 것이다. 사망은 "육신의 죽음"이며 지옥은 "영적인 영원한 죽음을 겪는 장소"이다.
4절, 십자가 처형 직전의 기도들 중 하나며(시 6:4,5; 22:5,20; 27:12) 6-8절은 부활하신 이후의 말씀이다(사 53:10).
8절, 그리스도인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이며, 지옥에서 내 혼을 건져주심, 내가 가고 있던 죽음의 길을 돌이켜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신 것, 올바른 일들을 하게 하신 것(욥 8:13, 잠 2:20)이다. 시편 30:11-12가 영적으로 이 구절과 조화된다.
9절, 세 가지 방면으로 적용될 수 있는데 첫째로 시편 기록자 자신이 죽음의 위협들이 아주 가까이 있는 가운데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하 세계, 땅의 심장으로 내려가신 후에(마 12:40, 엡 4:8-10)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실 것을 미리 내다보신 기도이다. 셋째로 구속받은 죄인이 지금, 그리고 천년왕국에서 산 자들의 땅에 거할 것이라는 말이다. 산 자들의 땅은 이 세상의 삶을 말하는 것이며(욥 28:13; 33:30, 시 27:13; 52:5, 전 4:2), 죽은 자들, 더이상 산 자들 가운데 있지 않은 자들의 사후 세계와 대조된다.
10절, 바울은 고후 4:13에서 10절을 간략히 인용하는데 그 문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지금 살아계시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고후 4:10,11,14). 신약에서 바울은 그것을 믿었고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10절을 인용했다. 본 시편 기록자 역시 같은 이유로 그것을 말한다.
11절,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성경의 가장 위대한 교리적 진술 중의 하나이며 자연인들이 성경을 멀리하게 만드는 "부정적 진리"이다.
12-14절, "구원의 잔"(13절)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러가지를 떠오르게 한다. "축복의 잔"(고전 10:16), "비틀거리게 하는 잔"(사 51:17), "내 잔"(시 16:5; 23:5), "가득찬 잔"(시 73:10, 창 15:16), "금잔"(렘 51:7), "내 잔"(마 20:23), "잔"(마 26:27), "주의 잔과 마귀들의 잔"(고전 10:21), "주의 잔"(시 75:8, 사 51:17, 렘 25:15).
술제물은 율법이 있기 오래 전에 부어졌다(창 35:14). 본문에서 사람을 구원하고 깨끗이 씻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행 22:16). 율법 하에서 서원을 위한 술붓는 제물은 자원하는 제물이었다(민 15:3-5,8). 이 시편 기록자는 지금 서원들을 갚으려하고 시편 22:25에서처럼 천년왕국 성전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가 주님께 술붓는 제물을 바침으로써 그의 서원들을 갚는다. 그는 자기 손으로 그 잔을 들어 올린다.
15절, "주의 성도들의 죽음"이 갑자기 나타나는데 어떤 뚜렷한 이유없이 중간에 끼어든다. 그렇다면 14절에서 서원을 이행하는 성도는 대환란 때 순교했다가 부활한 순교자 성도인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천년왕국 주의 전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들의 "서원들"을 이행할 것이다.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다.
16절, "주의 종"은 다윗이 아니라 사 42:1.9에서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결박들"은 주님께서 사망에 결박되어 계시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행전 2:24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이 결박들은 죽음의 결박일 뿐 아니라(호 13:14, 행 2:24, 엡 4:7-10) 눈에 보이는 문자적 결박들이기도 하다(마 27:2, 막 15:1, 요 18:12,14).
17절은 13절과 내용이 다른데 13절은 환란 성도가 자기 구원을 감사드리는 데 반해 17절은 천년왕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감사의 희생제를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다. 그분의 형제들 가운데서(히 2:12)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신다. 또한 18절에서는 그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서원들을 갚으시는데 시 22:25에 먼저 언급된 사실이다.
19절, 예루살렘에 있을 천년왕국 성전을 말한다. 단수 "뜰"이 아니라 "뜰들"이라 되어 있다. 성전에는 복수의 "뜰들"이 있는데 원래 이방인들이 들어가는 뜰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교리적으로 신약 교회에 맞춰서 설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시편 117편>
1 오 너희 모든 민족들아, 주를 찬양하라.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양하라.
2 이는 우리에게 향하신 그의 인자하심이 크시며 주의 진리가 영원히 지속됨이라.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117편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인데 단 두 구절로 되어 있다. 본문은 천년왕국에 대한 내용이다.
"모든 민족들아"는 문자 그대로 모든 이방인들을 호칭한 것이며 모든 백성들도 그러하다. 2절에서 "우리"는 민족들과 대조되어 이스라엘을 말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영원한 언약을 체결하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 언약은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인자하심이 영속되는 만큼 영속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주의 진리"는 66권 성경 전체이며 이 책은 세 분류의 인종들(셈, 함, 야펫), 세계 주요 강대국의 흥망성쇠, 역사의 결말, 민족들의 위치와 운명에 대해서 예언된 미리 기록된 역사이다.
<시편 118편>
1 오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
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할지니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되도다.” 하라.
3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할지니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되도다.” 하라.
4 이제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말할지니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되도다.” 하라.
5 내가 고통 중에서 주를 불렀더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어 넓은 곳에 나를 세우셨도다.
6 주께서 내 편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
7 주께서는 나를 돕는 자들과 더불어 내 편이 되시니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는 자들 위에 임하는 나의 열망을 보리로다.
사람에게 신뢰를 두기보다 주를 신뢰하는 것이 나으며
8 통치자들에게 신뢰를 두기보다 주를 신뢰하는 것이 낫도다.
9 모든 민족들이 나를 에워쌌으나 주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10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정녕, 그들이 나를 에워쌌으나 주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11 그들이 벌떼와 같이 나를 에워쌌어도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나니 주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멸할 것임이라.
1-4절,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되도다"가 네 번 사용된다. "이제"(2절)는 대환란의 고통에서 구출된 이후이다. 대환란 중에 믿음을 지키며 고통 중에 주를 불렀더니(5절) 그는 응답을 받았고 "넓은 곳", 천년왕국 성전과 여호와 삼마 도성이 얼마나 광활한가, 그곳에 세워진다. 그들은 천년왕국 성전에 기둥처럼 자리잡을 것이다(계 3:12).
5-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으나 교리적으로 6절은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을 말한다. 7절도 마찬가지이며 반면 1-5절은 대환란이 지나간 천년왕국이다. 1-5절과 6-7절이 시간 순서가 역배열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성경 여기저기 있고(시 89:39) 이 때문에 주석가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본문을 엉뚱한 데 적용하곤 한다.
6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가르침이자 실행하라고 권하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환난, 곤경, 박해, 기근, 헐벗음이나 그와 같은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망, 환란 성도들의 열망이 결실을 맺는 장소, 이방을 짓이기는 진노의 큰 포도즙틀(아마겟돈)을 가리킨다.
8-9절, 주를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유치하고 세상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이 유치하다. 모든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은 8-9절에 역행하여 걸어간다. "통치자들"은 주께서 위임하신 권세들이기 때문에 그분이 거두어 가시면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통치자들보다 성경이 강하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거의 없다. 그래서 "라오디케아"인 것이다. 교회와 세상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인권 보장을 논하는 교회다.
10-11절, "모든 민족들"은 UN에 가입된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이며 그들이 에워싸는 것은 홀로 고립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고 주님께서 흰 말을 타고 내려오시면서 이스라엘에 힘을 주시고 싸워 이방을 물리치실 것이다.
너 벌레 야곱아, 두려워 말라.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를 도우리라. 주,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인 너의 구속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구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쭉정이같이 만들 것이라(사 41:14,15).
보라, 사람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에 내가 예루살렘을 주위의 모든 백성에게 떨리는 잔이 되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