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 경건과 오묘 / 디모데전서 3:16, 고린도전서 12:7
믿음의 길은 너무 신비로워서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년 동안 믿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지만, 다른 이들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도 기도를 잘하고 성경을 잘 깨닫습니다.
그 차이는 경건함과 경건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신비보다 경건의 신비를 찬양했습니다. 그렇다면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경건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오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용서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교만했던 바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죄인 중의 가장 큰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그를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철저히 깨닫고 간증한 끝에 그는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큰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경건의 다음 단계는 충성입니다. 충성은 주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집에서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셨듯이, 바울도 하나님의 집에서 죽기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나 직원이나 교역자 모두가 믿으려면 경건해야 합니다.
한번은 우리 집에 부흥 목사와 일반 목사가 함께 찾아왔는데,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싸움이 일어나려 했습니다. 어떤 목사들도 경건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했더니, 두 분 모두 저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래서 각 교회에 불평이 많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경건했지만, 혹시 교만해질까 봐 가시가 찔리게 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믿다가 고통이나 환란을 만나면, 이것이 우리를 찌르는 가시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로 올라가 이상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에게 이 가시를 주셨습니다.
요즘에는 교만한 신교가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쇠퇴시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고, 어떤 교파는 신사참배자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떠들어대는데, 이런 목사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이 일본 치하에 어디 있었는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신교는 일반적인 교만보다 더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만을 주장하고 주님을 섬기는 신앙의 참된 신비를 깨달아, 주님의 확실한 구원에 참여합시다. 우리 종교 내의 신비로운 교리를 잘 모르겠지만, 이만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주님,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