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졸본(卒本) 건국(建國)
북으로 들어간 우리 겨레는 세 덩저리로 되어 북부에 동부여 남부여 곧 졸본부여 이렇게 갈라져 솟밭처럼 서로 대립하였더니 및 이민족의 등쌀에 쪼들려 살므로 자연 나라에 대한 사상이 조수처럼 밀려 반항 사상과 아울러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몽이라는 위인이 일어나 백족을 대표하여 큰 나라를 세웠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이라.
주몽의 역사는 이러하다. 북부여 왕 해모수(解慕漱)가 일찍이 사냥을 나아갔다가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만나니 이름은 유화(柳花)라 데리고 나라에 돌아와 같이 거하였다. 부여 국법에 국왕이 그녀를 취하지 못하는 법이라. 신하들이 그 불가를 말하여 부득이 유화부인을 동부여에 보내었더니 유화는 그때 이미 임신 중이다. 동부여에 있으며 아이를 낳으니 나면서 아이의 골격이 웅장하고 및 자람에 활쏘기를 좋아하고 또 능한지라. 이름은 주몽(朱蒙)이라 하니 활 잘 쏜다는 뜻이다.
동부여 왕 금와(金蛙)의 아들 7인이 있는데 항상 주몽을 시기하고 미워하니 활을 비교하여 금와의 아들은 짐승을 잡지 못하고 주몽은 많이 잡으니 7인이 더욱 시기하는지라. 한번은 금와가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더니 주몽이 말을 시험하여 좋은 말을 적게 먹여 파리하게 하고 좋지 못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니 금와가 살찐 말은 가져가고 파리한 말은 주몽에게 주니 주몽이 파리한 말을 타고 달려 봄에 나는 듯 한지라. 금와가 또 사냥할 제 주몽에게 화살을 적게 주고 아들은 많이 주었다. 그러나 주몽은 짐승을 많이 잡되 금와의 아들들은 짐승을 잡지 못하였으니 금와의 아들 대소(帶素)가 아비 금와에게 말하되 주몽이 재주가 우리보다 우월하니 제하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있으리이다.
금와 듣지 않으나 아들들이 기어이 주몽을 죽이려 하거늘 주몽의 모가 이것을 알고 주몽을 불러 말하되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하려 하니 너 같은 재주도 어디 가서 성공치 못하리오. 네가 이곳에서 욕을 보는 이보다 차라리 먼 곳으로 가서 잘되기를 바란다. 주몽이 부득이 어머님을 배별하고 도망할 새 친구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挾扶) 등 3인을 데리고 떠나갈 새 엄체수(淹搋水)에 이르니 물은 깊고 다리가 없어 건널 수 없었다. 뒤에 따라오는 군사가 점점 가까이 오거늘 주몽이 물을 향하여 가로되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물을 건너지 못하고 추병이 가까웠으니 어찌 할꼬 함에 조금 있다 어별(魚鱉)이 나아와 다리를 이루니 주몽이 이에 건너가다.
주몽이 물을 건너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니 이상한 사람 3인을 만나니 첫 번째 사람은 마의(麻衣)를 입었고, 두 번째 사람은 남의(襤衣)를 입었고, 세 번째 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었더라. 주몽이 묻되 그대들은 성명이 무엇이뇨. 마의자는 이사(耳思)라하고 납의자는 무골(武骨)이라 하고 수조의자는 묵거(默居)라 하고 성는 말하지 않거늘 주몽이 그들에게 성을 주어 마의자로 극(克)이라 하고 납의자는 중실(仲室)이라 하고 수조의자는 소실(少室)이라 하다.
그 3인을 데리고 졸본(卒本)에 이르니 졸본왕이 주몽을 보고 그의 비범함을 알고 딸 소서로를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 소서로가 주몽을 도와 창업의 공로가 많았다. 그 후에 졸본 왕이 죽음에 주몽이 이어 임금이 되니 나라 이름을 고쳐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졸본에 도읍을 정하니 때는 기원 2259년이라. 사방이 다 두려워 와 붙이니 이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