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갑자사화(甲子士禍)
무오사화를 지난 후 6년 곧 연산 10년 갑자(甲子)에 또 무서운 사화가 있었다. 처음 연산의 생모 윤씨의 사변은 연산이 전연 알지 못하고 자랐다. 윤씨가 자기 생모인 줄도 모르고 숙의 윤씨가 자기 어머닌 줄 알고 철모를 때는 강판서 희맹의 집에서 자라고 그 후에는 동궁에서 자라 환경이 이를 숨기고 휘하는 고로 왕대비의 사랑과 윤씨의 자애에 무휵을 받았다. 한번은 부왕 성종께서 궁밖에 유행을 허락하사 찬선과 보덕의 보호로 궁문을 나아가 돌아다녔다 돌아옴에 성종께서 물어 보셨다. 오늘 무었을 보았느뇨. 대답하대 한 곳에 가니 송아지가 어미 소를 찾느라고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종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사실을 숨겨왔던 일이 천기 자동으로 어린아이가 저런 말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하셨다.
및 왕이 돌아가시고 세자 위에 오르니 신왕의 마음을 엿보는 무리들이 전후좌우에 버려있었다. 폐비의 생모는 피 묻은 수건을 감추어 두고 기회만 기다리더니 마침 어느 날 지밀상궁의 편을 얻어 이 피 묻은 수건을 드리고 피 묻은 수건의 이면 이야기를 세세히 여쭈어 드렸다.
왕은 깜짝 놀라며 곧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등을 불러 그 내용을 자세히 묻고 기시 은밀한 사정을 잘 아는 상궁들을 불러 물어보고 감추고 숨었던 원통한 사실을 알게 되고 아첨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없는 것도 더 첨부하여 말함으로 왕의 분노가 발하여 10연 4월에 폐비윤씨를 다시 높여 왕후로 봉하여 성종의 사당 배사(配祠)케 할 새 그때 신하들은 다 찬성하고 별로 이의가 없되 다만 응교(應敎) 권달수(權達手)와 이행(李荇)이 불가를 주장하는지라 연산이 대노하여 권달수를 죽이고 이행은 유배 보내고 그때 윤씨 폐사를 주장한 자를 일일이 조사하여 죽이기도 하고 유배도 보내고 당시 사람 중 명성이 있는 자는 다 탄압하고 배척하여 용납지 못하게 하고 불영(不逞)의 무리들은 이 기회를 타서 무고와 참소가 날로 더하여 조정이 크게 소동하였다.
폐사 시 의논을 피하기 위하여 허종(許琮) 허침(許琛) 같은 사람은 일부러 다리에 떨어져 병이 발하여 참예치 않았더니 이때 화를 면하였다. 그리하여 종침다리란 이름이 오늘까지 있다. 또 궁중에서 이 일에 참섭한 자를 조사하여 성종의 후궁 엄정(嚴鄭) 두 숙의가 왕의 생모를 죽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왕은 대노하여 내정에서 두 숙의를 박살하고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安陽君) 행(烆) 봉양군(鳳陽君) 봉(㦀) 두 왕자를 참살하고 궁정 안과 궁정 밖에 있는 자 모조리 잡아 죽이니 이것이 갑자사화라 한다. 왕은 생모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무죄한 자를 남살하며 따라서 글 읽는 선배들은 의례히 그 일에 참섭하였다 하여 함부로 죽이니 그 참혹한 형상은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