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안나 카레니나가 말하는 결혼의 비밀
2026. 9. 19. 00:30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
고대에서부터 연애와 결혼은 삶의 가장 찬란한 축복이자 거래였다.
수천 년 전 수메르의 점토판에 새겨진 정교한 결혼 계약서부터 21세기 데이팅 앱까지 결혼에서
사랑과 물질적 조건은 치열하게 승부를 겨뤄왔다.
결혼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부 경매(bridal Auction)’ 풍습을 소개한다.
해마다 혼기를 맞은 여성들이 한곳에 모였다.
경매인은 가장 뛰어난 미모의 여성부터 단상에 올리고 더 많은 돈을 부르는 남자가 그녀를 차지했다.
이는 야만적 풍습으로 보이지만, 반전은 그 직후의 ‘역경매’ 메커니즘에 있다.
아름다운 여성들의 경매를 통해 쌓인 막대한 입찰금은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곧바로 외모가 덜 매력적이거나 신체장애가 있는 여성들이 단상에 올랐다.
이번에는 이런 여성과의 결혼 대가로 가장 적은 돈을 받겠다고 한 남자가 낙찰되었다.
미인과 결혼하기 위해 부자들이 낸 돈이, 결혼 시장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지참금으로 재분배된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제도를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도 짝을 찾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가장 지혜로운
사회적 안전망”이라 했다. 이 풍습은 사랑을 배제하고 여성을 상품화한 ‘물질주의의 극단’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물질주의 시스템에는 모든 성년 남녀를 결혼시켜 공동체 전체의 생존과 포용을 고민한
‘고대식 사회 복지’의 논리가 숨어 있었다.
인류 역사에서 낭만적 사랑이 결혼의 핵심 조건이 된 것은 수천 년의 결혼 역사 전체로 볼 때
불과 수백 년밖에 되지 않은 현대적 발명품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맺어지면 무조건 행복하고, 조건에 맞춰 결혼하면 불행해질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해 레프 톨스토이는 그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묵직한 해답을 건네준다.
안나가 안정된 고위관료 카레닌과 결혼한 것은 엄격한 조건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의무뿐인 결혼 생활에서 삶의 생기를 잃어버린 귀족 부인 안나가 맹목적이고 강력한 열정을 가진
미남 총각인 브론스키 백작을 만난 후 그녀의 결혼 생활은 무너졌다.
사랑은 모든 사회적 규범을 내던지고, 오직 서로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등을 돌리면서, 이들은 둘만의 세계에 갇힌다.
브론스키와 결혼 후 안나는 변함없는 사랑을 기대하며 극심한 집착과 의심에 시달렸고,
브론스키는 사회적 낙인과 피로감으로 지쳐갔다.
안나의 두 결혼은 조건(카레닌)과 사랑(브론스키)이라는 양극단에 기초했으나, 결과는 모두 파국으로 끝났다.
톨스토이에게 안나와 브론스키는 나쁜 사랑, 나쁜 결혼이었다.
그가 본 이상적인 결혼의 모델은 레빈과 키티 커플이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처음엔 완벽해 보였으나,
소유와 독점이라는 욕망이 커지면서 사랑은 집착과 불안으로 바뀐다.
반면 레빈과 키티는 처음부터 완벽한 커플이 아니었다.
키티는 결혼 전 브론스키에게 마음을 빼앗겨 레빈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후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싸우고, 오해하고, 질투했다.
레빈은 결혼 전에 가졌던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방황했고,
키티 역시 남편의 내면적 결함과 질투 속에서 깊이 실망했다.
톨스토이는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았기에, 처음부터 완벽한 결혼이란 허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레빈과 키티가 이상적인 결혼 모델이 된 비밀은 다름 아닌 ‘성장’에 있었다.
이 커플은 결혼을 모든 문제의 종착점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 풀어야 할 미완의 숙제로 받아들였다.
상대방을 탓하는 대신 상대가 결점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며 성숙한 동반자로 성장해 나갔다.
결국 결혼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조건으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다.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 철학이 여기에 있다.
사랑이든 물질적 조건이든 그것은 출발선에 불과하다. 진짜 삶은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행복한 결혼이란 끊임없는 시행착오 속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는 두 영혼의 눈물겨운 연대에 있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는 삶을 고민할 때, 조건이나 사랑만 보지 않고,
인생의 풍파 속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정신적 넉넉함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
그것이 바로 톨스토이가 남긴 가장 지혜로운 결혼의 지침이다.
<출처>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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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유명한 소설들의 첫 구절에서 빠지지 않는 명언,
안나 카레리나의 첫 구절이 떠오른다.
톨스토이가 말하기를,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의 이유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