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쓰기- 남겨진 여인들

[향기]

자유글쓰기
남겨진 여인들
2019. 9. 향기 이영란

10평 남짓한 텃밭에는 여남은 줄씩 심어진 파와 전구지, 어른 주먹만한 애호박이 두세덩이 앉아있었다. 깊이 갈아엎은 밭이 아니라 호미로 다듬은 검붉은 흙밭이었다. 빛을 잃은 수국과 아직 짙은 분홍빛 꽃잎을 달고 있는 봉숭아는 모진 농사일과 많은 아이들을 길러내면서도 잃고 싶지 않았던 아름다움의 표식이었을까. 조금씩 노란 빛이 퍼져가는 골 깊은 단감과 시원시원하게 큰 무화과가 도란도란 익어가고 있었다.

"아마 이 집이 맞을기다"
엄마가 가물거리며 작은 대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섰다. "윤희(고모의 큰 딸 이름)야 있나?"
"아이고 누고? 세이 아이가? 아이고 우짠 일이고? 미리 연락도 없이..... 집도 엉망이고 씩(씻지)도 안하고 있었는데"
"연락도 안하고 왔제. 난이(영란이)가 코스모스 축제 가자고 해 갖고 오는 김에 들렀다. 지난 번에 그리 왔다가 가서 나가 너무 걱정도 되고 우째 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코스모스 축제가 열리는 마을을 마주보고 있는 둔덕면 거림리에 사는 고모의 이름은 이무자이다. 내 이름도 흔하디 흔한 축에 속하지만 적당히 지은 이름이라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든다. 딸 다섯을 둔 어려운 살림집의 셋째딸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늙수그레한 청년 고모부와 일찌감치 결혼을 했다. 고모이긴 하지만 작은 할아버지의 딸인데 아버지가 결혼한 후 작은 할아버지의 양자로 들 들어갔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사촌고모여서 그리 가까운 촌수는 아니다.

엄마랑 한살 차이가 나는 고모는 선하고 싹싹했다. 무뚝뚝한 다른 고모들보다는 살갑고 말 붙이기가 수월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까지는 못 갚더라도 이렇게 불쑥이라도 찾아 갈수 있는 데에는 무자고모의 성품 때문이었다. 고모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흰머리가 많이 섞여있어 늙은 아저씨 태가 났다. 부부는 닮아 사람들에게 인정스러웠다. 목소리는 따뜻함과 서글함이 섞여 있었고 도무지 서운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딸 넷과 귀한 아들 하나를 얻어 남들처럼 길렀다.

"언니야, 나는 갈구지(우리 친정동네 갈곶마을을 사람들은 갈구지라 부른다)보다 여가 좋다. 그 동네에 숭악한 사건도 나고 왜 그렇노? 직인 사람도 죽은 사람도 다 객지사람이람서?"
"하아~~ 그래도 살기는 괜찮다. 그 사람들이 서로 원수로 지아서 쌈을 해서 안 그렇나. 우리하고는 상관도 업따."
"고모, 나도 여기가 좋더라. 내가 여기를 두세번 정도 와 본 것 같은데, 들판도 넓고 저기 앞엔 바다도 있고, 너무 양지가 바르고..... 난 여기가 항상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아."
"세이야, 나는 딸하고 그리 다니는 기 너무 보기 좋다. 우리 아~들은 여기 안 올라한다. 좋은 기억이 없다고. 저그 아부지가 맨날 뭐라 욕하고 저그 엄마는 일하러 댕긴다고 집안은 엉망이고 좋은 기억이 없다고 싫다한다. 그라고 내가 깜빡깜빡하면서 치매증상도 있고 하니까 더 싫어한다. 집을 좀 고쳐서 같이 살고 싶은데 아~들이 저리 질겁을 하니......"
"제서방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그라노? 아~들한테 따땃시리 안했나?"
"아아고 언니야 말도 하지마라. 술이나 묵고 윷놀이하러 댕기고 아~들한테는 소리치고...... 아~들이 그런 소리 할만도 하다"

밖에서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던 고모부는 13년 전 세상을 떠났다. 나는 밖에서 본 사람이었기에 고모부의 따뜻한 모습만 기억한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고모부는 월남전의 후유증을 깊게 앓았던 듯하다. 실은 고모부 자신도 그걸 의식하지 못했는지 돌아가기 얼마 전에 병원에서 검진을 했다고 한다. 고모부가 남긴 연금과 땅을 악착같이 사 모았던 고모의 생활력으로 고모의 살림은 어렵지 않다. 고향에서 좋은 기억을 갖지 못했던 고모의 아들 딸들이 실은 얼마나 풍요로운 땅에서 자랐는지를 아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고모는 엄마에게 가져가라며 동네에서 산 보리쌀을 보여준 걸 자꾸 보여주었다. 너무 많이 무쳤다며 파무침도 두세번 보여주었다. 샴푸를 사야하는 데 몇번이나 잊어먹고 못 사왔다며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갈아입은 속옷을 엉뚱한 곳에 놓았다. 치매약을 보여주며 자꾸 까먹고 안먹을 때가 많다며 수다스럽게 말했다.
"고모, 약 먹고 잘 관리하면 더 좋아질수 있대요. 잘 챙겨 먹어요."

쉰 두셋에 혼자된 고모를 안쓰럽게만 본다면 그건 오각기둥의 한쪽만 보는 일이다. 양지바른 거림동네에는 남편이 먼저 돌아간 집이 많았다. 아직 그 다부진 손끝으로 채소와 곡식을 길러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웃으며 걷고 청소를 하고 드라마를 보며 며느리를 괴롭히는 못된 시어머니를 욕할 수 있는 생의 에너지로 가득찬 여자들이 많다.
"언니야, 옆집에 복기엄마랑 요 앞 교회에 딸린 커피집에 가기로 했다. 언니도 가자. 참 좋다"
"고모, 우리 하둔에 가서 점심 한그릇 먹고 가요." "그럴까? 그라모 가자. 우리가 한번씩 가서 먹는 데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늦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작은 할아버지 제사 때 친척 중의 한사람으로만 봤지, 개인으로 만나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모는 남은 추어탕을 비닐에 싸서 담았다.

대금산 진달래가 핀 풍경, 갯벌에서 여자들이 일하는 모습, 노란 장미가 핀 유화들이 가득한 까페로 갔다. 그 곳에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생을 지켜가는 여자들이 있었다. 일흔 셋의 할머니도 예순여섯의 아주머니도 예순 일곱의 엄마도 가장 큰 상실을 겪은 동질감으로 금방 친구가 되었다. 고모는 별것도 없는 친정조카와 사위를 자랑하고 싶어 틈을 비집고 말을 쏟았다. 여자들은 미움과 원망으로 지지고 볶는 것도 그것이 생의 울타리 안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황량한 들판에 내버려진 고통을 극복해내기까지의 시간들은 말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말이 그 사랑의 총합을 나타내기에 택도 없는 것처럼.
여자들은 말한다. "그래도 남자들이 일찍 죽어야 해. 여자가 먼저 가 봐. 돈보고 온 여자들한테 재산 다 뺏기고 자식들하고도 사이가 파탄나 버린다이가" 남편이 있었다면 이것저것 눈치보였을 일들도 자유롭다.
"밥도 혼자 먹기 싫으면 반찬 하나 가지고 가서 같이 먹어. 밤에 맨날 같이 운동하고, 같이 장보고. 얼매나 좋아? 어디 서울 나들이라도 갈라치면 삼백만원짜리 비싼 가방 서로 빌려줘. 기죽고 다니지 말라고" 삼백만원짜리라는 말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촌아지매들이라고 무시하면 절대 안된다.
태풍 타파로 코스모스 축제가 취소되어 있었다. 해바라기는 바람에 시달리느라 지쳐 혀를 빼물고 있었고 가녀린 줄기를 가진 코스모스는 그나마 나았지만 축제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렁이양식논을 걷고, 달콤한 맛을 따라올 수 없는 둔덕면 포도 농장을 구경했다. 두터운 햇살이 건강한 삶을 응원하는 곳, 사람에게 얼마든지 내어주겠다는 논밭이 풍성한 곳, 청마기념관, 산방산비원, 고려유적지까지 품고 있는 그곳이 나는 좋다. 청마는 그래서 마지막 몸을 누일 곳으로 선택했을까? 그날 저녁 나는 둔덕면 부동산을 눈이 빨개지도록 검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