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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로 접속하는 만물인터넷>의 줄거리: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과 사물 인터넷으로 인해 진행될 것입니다. 전자화할 수 있는 사물 일체를 인터넷에 연결하자는 것이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지요. 그런데 혹시 '만물 인터넷'(Internet of all Things)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전자 사물 뿐 아니라 자연까지도 포함하여 만물을 연결하는 인터넷 망이지요. 태초부터 있었고요. 인간의 타락과 그로 인한 악함은 바로 이 만물 인터넷에 구멍을 내는 파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중입니다.
십자가로 접속하는 만물인터넷
(시편 58:1~11)
1.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2.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로 접속하는 만물 인터넷>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로 접속하는 만물 인터넷’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과 사물 인터넷을 통해서 성취되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사물 인터넷을 영어로 ‘Internet of Things’라고 합니다. 오늘 제목에 있는 만물인터넷은 ‘Internet of all Things’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물인터넷과 만물인터넷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만물인터넷이라는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사물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을 인터넷에 연결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물은 곧 전자화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물과 사물이 인터넷에 연결이 되어 정보를 받아들이고 보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센서가 필요하기에, 전자화되지 않는 것들은 무슨 수를 써도 사물인터넷에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상황을 상상해 봅니다. 예를 들면 자고 있는 사람이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새벽에 출근길 도로에 사고가 나서 교통체증이 예상됩니다. 그러면 교통방송 뉴스에서 나온 정보를 받은 스마트폰이 스스로 판단하여 30분 앞당겨서 알람을 울려주게 됩니다. 또한 그 알람소리를 센서로 포착한 전등이 스스로 켜집니다. 이처럼 정보를 받아들여서 작동하는 기기들을 사물인터넷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전등이 켜져서 밝아지면 커피포트가 센서를 감지해서 물을 끓입니다. 사용자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면 저절로 집안의 모든 기기가 꺼지고 가스도 차단됩니다. 주인은 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만물인터넷이란 무엇일까요? 만물 인터넷은 전자화될 수 있는 사물들을 연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계에 있는 모든 만물까지도 다 포함합니다. 이러한 만물인터넷에 연결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타락의 저주 상태를 말씀하셨습니다. 타락 이후에 인간은 온 세상을 덮고 있는 만물인터넷 그물망을 찢는 행위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만물인터넷과는 연결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땀을 흘리며 어렵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물인터넷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6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도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4장 11절을 보아도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라고 만물인터넷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세 살 된 아이가 있는 가정이 새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혼자 방을 쓸 수 없는 아이를 위해 새 방을 마련합니다. 이 방에 들어있는 것은 아이의 것인데 모든 것은 부모가 준비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은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쓰는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몸의 사지백체와 손톱발톱머리카락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장육부에까지 이어지기에 몸에 병이 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은 임하고 대화하는 공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임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살면서 온 몸으로 물과 접촉하고, 물을 마셔서 아가미로 물을 내보내는 중에 물속에 있는 산소를 호흡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의 바다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연결되어 있는 만물인터넷의 그물망을 찢으면서 자신의 뜻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물인터넷 그물망을 찢고 내 뜻의 공간을 만들려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이루어지지 않고 어렵고 힘이 듭니다. 또한 만물인터넷과는 다른 움직임에 의해서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고 학대하고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만물인터넷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 시의 저작 배경을 살펴보려면 조금 생각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역을 일으키기 전이라고 여겨집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재판관이 됩니다. 왕이 세운 재판관들이 재판하는 현장에 억울한 사정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백성들의 인심을 샀습니다. 이를 사무엘하 15장 6절에서는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을 다윗이 알게 된 때에 본 시가 지어지게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1절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직역해보면 앞서 말한 배경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원문을 충실하게 직역하고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본다면 이것이 바로 만물인터넷을 훼손하는 악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고, 동시에 만물인터넷 안에서 우리의 삶을 재생시키고자 하는 교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접속해서 만물인터넷으로 살면 사물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사물이 저절로 움직이듯이 얼굴에 땀 흘리며 살 필요가 없어집니다.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물 인터넷은 가능이나 불가능의 토론의 단계를 넘어서 이미 생활에 접목되기 시작했습니다. TV광고를 보니 냉장고가 인터넷과 연결되어서 사람이 말하면 그대로 수행합니다.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나 알려달라고 하면 남은 식재료를 보여주고, 칼국수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면 조리법을 알려줍니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만물인터넷에 연결된다면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윗은 이러한 만물인터넷을 찢으면서 살아가는 악인들에 대해서 통렬하게 분개합니다. 자신의 뜻을 펼치겠다고 하나님 뜻의 그물망을 찢고 사는 자들을 독사와 같다고 욕하고 있습니다.
1절에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라는 내용을 직역해봅니다. 원문에는 통치자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너희들은 정의를 말하지 않은 채로 어찌 잠잠하느냐 너희들은 올바르게 판결하느냐 오! 사람의 아들들아’라는 내용이 됩니다.
이것은 꼭 통치자나 재판관에게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정의와 판단은 모든 사람의 몫입니다. 심지어 다윗처럼 사울 왕에게 쫓기고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 핍박당한다고 할지라도 무조건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와 판단은 나 자신의 또 다른 과제이고 또 다른 몫입니다. 핍박당함이 나를 정의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에게 핍박당하는 이들을 무조건 정의의 편으로 생각합니다. 정의나 공의 혹은 올바른 판결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좀 더 무겁게 요청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과제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직역해보면 ‘마음 안에서 악한 생각을 하면서 땅에서 너희 손은 폭력을 저울에 달고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기꾼들은 무게를 속이기 위해서 저울의 밑바닥에 몰래 추를 달아 놓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법과 이치에 따라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고 폭력과 강압과 조작과 도둑질과 사기를 보탭니다. 정상적으로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도 폭력을 조금만 가미하고, 사기를 조금만 보태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여 진땀을 흘리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만물인터넷을 찢으며 사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남편의 이름으로 생명보험을 든 사람이 있습니다. 이 보험금은 남편이 죽어야만 탈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남편이 빨리 죽어서 보험금을 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험금보다 남편의 생명을 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자기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자는 다른 판단을 합니다. 그 돈을 가지기 위해 현실을 조작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남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합니다. 대한민국 땅에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자녀를 유학 보낸 부모들에 대해서 현지인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하려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미국의 법으로는 안 되는 일을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돈 쓰고 애원해서 되게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잘못된 판단으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인생을 자꾸만 어렵게 만듭니다. 안 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단계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들을 되게 만들기 위해 조작하고 끼워 맞추면서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3절의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는 말씀은 이러한 기질이 태어나면서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하나님 뜻에 연결되어 있기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아모스 5장 24절의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정의를 위해 몸부림치며 살지 않아도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은 의로우십니다. 그런데 그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인간 세상에 나타나시면 정의가 됩니다. 정의는 대단한 사람들의 학문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로울 때에 제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의로울 때에 인생을 가장 쉽게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생이 쉽고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 정의입니다. 인생이 어렵고 고난을 견디며 이루어내는 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물 흐르듯이 하나님의 뜻을 통과시키면 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만물인터넷을 찢는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옆에 있는 나무에도 하나님의 뜻은 흐르는데 내게는 하나님의 뜻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뜻이 흐른다면 내가 만나는 가족들이나 직장 동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전달될 것입니다. 한편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맞는 섭리를 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통과시키고 그 뜻의 바다 안에서 살면 내가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지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에는 건강문제 돈 문제 등의 어떠한 문제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형통을 거듭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찢는 기질이 문제입니다. 나무에도 바위에도 구름에도 강물에도 하나님의 만물인터넷은 연결되어 있는데 인간만은 그것을 찢는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저절로 이루어질 삶을 스스로 엉망으로 만들고 혼란을 야기하며 살아갑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만물인터넷을 찢으며 자신의 판단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저주합니다.
6~10절에서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이토록 심한 저주를 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살 수 있는 만물인터넷의 삶을 포기하고, 애써 하나님의 뜻의 그물망을 찢으면서 살아갑니다. 되지도 않는 것들을 이루겠다고 폭력을 가하고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살아가니 통탄할 노릇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를 타고 정의의 물결에서 뱃놀이 하듯 살아갈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는 질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위해 성전을 만드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약에서는 성전을 생활화함으로서 이러한 기질을 억제하도록 하셨습니다. 성전 건물 마당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성전을 두고 성전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모태로부터 태어난 악한 기질은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무리수를 둡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작동시켜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막혀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내가 어린양과 함께 죽는다는 고백을 통하여 만물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뜻의 흐름을 타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성전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돈 문제가 생길 때에 이미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있습니다. 문제는 돈 달라고 기도해서 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판단입니다. 그 돈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흐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의로우시기에 그 생각이 나를 통해 나타나면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반면 내가 생각한 자녀 문제의 해결법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강요하니 하나님의 의와 정의는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불의를 하나님께 들이대며 이루어 달라고 하니 삶은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해서든 돈 문제에 대해서든 스스로 생각하려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서 하나님 뜻의 만물인터넷에 접속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의 흐름을 따라서 물놀이하듯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의로우십니다. 의로움은 행복이고 형통의 첩경입니다. 그 의로움이 나를 통해 나타날 때에 정의가 됩니다. 정의로울 때에 행복하고 정의로울 때에 기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채로 기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늘에서 웃음 지으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양지에서 웃음 지을 때에 그 행복의 효과가 타인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저주의 말을 퍼붓는 삭막한 언어들의 이면에는 부디 하나님의 뜻으로 연결되어 있는 만물인터넷에 접속하여 삶을 살아가라는 사랑의 권면이 들어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 너무나 컸기에 참혹한 저주의 표현까지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만물인터넷에 연결되어서 우리의 망가진 삶을 재생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연결된 만물인터넷에서 나의 삶이 진행됨으로 행동하는 모든 것이 정의가 되게 하시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놀라운 복지의 삶이 가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