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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0장 40-42절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말씀과 그가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 자신을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유대인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의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근원적으로 보자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다. 외적으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듣습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처럼(롬10:17) 듣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이 있는 곳으로만 따르게 됩니다. 물론 그 시기에 있어서는 듣는 즉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듣고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를 수 있고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이라면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양을 훔쳐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와 하나 된 분으로서 성부는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성부가 만물보다 크시다는 것은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만물보다 크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으로부터 양을 빼앗아 오는 것이 가능한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반응은 돌을 들어 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돌을 들어 치려고 하는가? 저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선한 일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신성모독 때문입니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인 것처럼 말하는 그것 때문에 돌을 들어 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있다고 할 때 예수님은 성부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라는 말 때문에 우리처럼 나지 않은 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아들이십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와 함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자기 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인성을 취하신 겉모습만 볼 뿐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예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신성모독이 될 수 있는가로 반박하십니다. 더불어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한다면 믿지 않아도 되지만, 역으로 행한다면 행하는 그 일만큼은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을 믿는다면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알 것이고, 나 또한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조차 믿지 않는 자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선한 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일에 대하여 믿지 않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고자 하는 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었던 곳으로 가십니다. 오늘 본문 40절입니다.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그동안은 예루살렘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말씀도 전하시고,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도 뜨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유대인들의 적대감 때문에 자신의 몸을 피하셨는데,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부터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8절에 의하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라는 곳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잡혀야 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해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장소로 가셨는가? 오늘 본문 42절에 근거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 떼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이라고 말함으로 좀 더 주목하도록 하는 일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아마도 그곳에서 세례 요한을 통해 증거 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장 28절에 보면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고 하면서 세례 요한의 증거를 기록하는데, 29절 이하에 보시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36)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지금 예수님께서 요단강 저편 베다니로 오시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10절에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셨습니다. 명절 중간이 되어서는 성전에서 가르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대하여 놀랍게 여겼습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글을 아는 것으로 인해 놀랍게 여겼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다고 하셨습니다. 명절 끝 날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사역과 함께 요한복음 9장에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쳐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에서 요한복음 10장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시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이적을 베풀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역에 있어 당시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피해 다시금 요단 강 건너 편 베다니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 그리고 그곳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는데, 그 증거를 다시 한 번 상기하도록 할 목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 사회에 있어 예루살렘은 수도입니다. 단순히 한 나라의 수도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수도입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종교지도자들도 많았고,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나타내신 모든 놀라운 일들의 결과는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세례 요한이 증거 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요1:29). 태어난 날이나 사역은 세례 요한보다 늦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신 분이십니다(요1:30). 세례 요한의 경우는 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십니다(요1:33).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요1:34). 그러니까 저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될 수 있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소위 다수결의 원리라고 해서 많은 사람이 의사가 바람직한 것처럼 인식될 수 있지만, 진리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진리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진리는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사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2편의 기록처럼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실 뿐입니다(시2:4). 때문에 우리는 다수라는 의견에 발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만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이 명하고 있다면 명한 대로만 가야 하고, 성경이 금하고 있다면 금한 것에는 가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12월이면 성탄절을 지킵니다. 4월이면 부활절을 지킵니다. 부활절에 앞서 고난주간으로 지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 날들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지키지 말라고 명하지도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날들을 기념하는 것이 어떻게 나쁜가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특히 구약의 절기들은 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절기들조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폐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도덕법으로서의 제4계명 외에 다른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제4계명에는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도 있지만, 그것까지 폐지하여 주의 날, 다시 말해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점으로 안식 후 첫날로 변경하여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부활이 있다는 것은 죽음이 전제되고 있고, 죽음이 전제되고 있다는 것은 죽음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함의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주의 날에는 주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것이 함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날을 주의 날로 지키도록 제4계명은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정확한 것도 아닌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4월 달에는 부활절도 지킵니다. 물론 기념하여 지킨다는 의도는 압니다. 의미를 되새기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혹 이것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는 말씀을 듣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지켜지게 된 것이라면 내 의도와 상관없이 멈추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다른 어떤 날보다 주의 날을 좀 더 주의 날답게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부활절, 성탄절이라는 날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다 이방신들을 기념하여 지키던 날을 기독교의 날로 대체한 것입니다. 김영규 교수님의 17세기 개혁신학이란 책에 의하면 부활절은 Eostre[에오스테레]라는 이방여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대체한 것이고, 성탄절은 로마의 신 Saturn[새턴]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을 축제로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 장로교인은 주일 이외에 부활절, 성탄절 등의 절기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날이 그만큼 중요하다면 성경이 명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침묵합니다. 침묵한다는 것은 침묵하기에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된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장로교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 날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다수가 아니라 진리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 권력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의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만 머물길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을 피해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인 베다니로 가셔서 거기 거하셨는데, 얼마나 거기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41절과 42절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그리고 이 말씀은 앞선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인 반응임을 보여줍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로 하자면 예루살렘의 유대인의 경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이 아닌 반면, 지금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양이기에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다. 단지 외적인 음성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듣고 믿습니다. 믿고 따르게 됩니다. 바로 이 대조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말하느냐? 세례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지만,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고백합니다. 즉 지금 저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그 말한 바가 참되다는 사실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 사역을 행하셨을 것이지만, 지금 드러내고 있는 바는 세례 요한의 말씀 사역으로 인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비교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은 아무 표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표적을 행하는 자로 있었다는 비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요한이 말한 것이 참되다는 것인데, 그의 증거가 참될 뿐 아니라 증거의 대상인 그리스도 역시 참되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증거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빛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가 빛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시간적으로는 세례 요한보다 뒤에 계신 분처럼 오셨지만 본래는 그가 앞선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의 사역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으로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크신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례 요한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며 그만을 드러내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친히 말한 것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나타낸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요3:30). 무엇으로 그것을 나타냈는가? 표적이 아니라 말하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표적, 기사, 이적이 아니라 말씀 사역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표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에 따라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할 때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확증을 표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를 듣기도 하고, 또한 표적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는 비난도 하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복음의 내용을 보면 어떠합니까?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나면서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맹인과 바리새인들이 일의 자초지정을 묻고 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맹인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도록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1-33)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믿음으로 화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것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합니까? 세례 요한의 경우 표적을 행하는 자는 아닙니다. 사도들의 경우 표적을 행하기도 했지만, 세례 요한은 그런 자가 아닙니다. 아무런 표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오로지 말씀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믿음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 사역자는 바로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참된 교회의 표지로 벨직 신앙고백서가 순수한 복음 설교의 선포라고 말할 때(제29장)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일단 우리는 교회의 표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투하는 교회의 외적 표지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선포와 그리스도의 성례의 대한 바른 시행 그리고 권징의 합당한 실행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례의 대한 바른 시행이나 권징의 합당한 실행은 다 무엇에 근거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선포에 근거합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선포는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을 본문은 무엇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는가 하면 표적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표적과 같은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표적과 기적과 이적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강조하는 자들은 정적인데 반해, 표적을 강조하는 자들은 동적이다, 역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적인 것보다 동적인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증거는 이 모든 생각을 뒤집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아무런 표적도 행하지 않고 오로지 말씀만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설명합니다. 본문에 앞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런 표적으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이셨다면, 그와 대조적으로 표적 없이 말씀 사역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표적이 있어야지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표적 없이 말씀만 있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더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든 표적과 기적과 이적은 성경 계시의 완성과 함께 종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믿음과 말씀과 이적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말씀 드렸지만, 이적 자체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표적과 기적과 이적과 같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주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칩니다(행14:3). 표적과 기적과 이적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주목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믿음으로 이끌도록 하기 위해 표적과 기적과 이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향이 아니라면, 오히려 표적과 기적과 이적을 통해 말씀을 빼앗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표적과 기적과 이적은 사단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 10절입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그러나 모든 표적과 기적과 이적의 핵심은 어디 있는가? 마태복음 12장 38절과 39절입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표적을 구하는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표적을 구하는 모든 내용을 거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모두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표적을 구하는가 할 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 사흘 만에 물고기 배 속에서 나온 내용을 의미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 외에 다른 표적을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은 모든 표적의 핵심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표적, 오병이어 그리고 나면서부터 눈 먼 자를 고치신 사건 등 다양한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 모든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표적 앞에서는 감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표적 앞에서는 다 사라져야 할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표적 중의 표적, 다른 표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성취가 되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의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표적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성경계시가 완성되지 않았고, 또 그런 시대 속에서 비상직분에 해당하는 자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교회의 터이시지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가르침이 아니라 일치되는 가르침으로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에 성경은 그렇게까지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상직분에 속하는 자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의 표로 표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입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러나 이들이 맡은 직분 역시 계시의 완성과 함께 종결되었습니다. 종결되었기 때문에 사도의 표인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도 종결되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치는 바가 이러한데, 오늘날 여전히 표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떤 기적과 이적을 구하고 찾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계시의 종결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표적 중의 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아닌 다른 곳을 보게 만들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외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만이 표적 중의 표적이요, 그의 죽음과 부활만이 모든 표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표적 중의 표적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시대에서 이미 성취가 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표적은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이 말씀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표적이 있는 시대에 세례 요한을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아무런 표적을 행하지 않고 오직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참되심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 나아가 많은 성도들이 받는 유혹 가운데 하나는 능력 있는 종이 되는 것이요, 그런 사람이 목자로 있길 원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이 능력 있는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자세만 임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러한 자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말씀만을 가르쳤습니다. 말씀만을 가르치되 그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자 세례 요한이 말한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모든 말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능력은 오직 말씀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그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한 내용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 안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표적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 들린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쫓아낸 일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과 15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말씀하시고, 마가복음 6장 12절과 13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그러나 마가복음 9장에서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9:28)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에게 구한다는 것이고, 그 말은 모든 능력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능력 있는 목사, 능력 있는 성도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나와야 할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여기는 것으로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이 표적을 말하기 때문에 표적을 주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교훈이 그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먹고 마시는 데 있었습니다.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바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과 관련된 말씀도 하셨는데,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까지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10:41-42) 달리 표현하면 세례 요한은 자신을 나타내기보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되게 전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한 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말을 제대로 실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 그렇게 살아가야 할 내용이 아니라,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나타나도록 해야 할 바입니다. 때문에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드러나고, 하나님만 주목될 수 있도록,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도록 간절히 소망하고 그렇게 살도록 자신을 살펴가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목적이고,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