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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헝그리 정신, 죄악의 핵심>의 줄거리:
한강의 기적의 중심엔 의식주 해결조차 어려운 상황에 근거하여 모든 일에 배수진을 치는 헝그리 정신이 있었고, 그 결과 '무에서 유'의 각오로 오늘날의 풍요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를 '상속의 정신'의 세대라고 합니다. 물려받은 것을 기반으로 좀 더 창의적인 발전을 이루는 삶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과연 배고픔의 힘으로 삶을 영위하는 헝그리 정신이 끝난 것일까요? 헝그리 정신은 그 뿌리가 죄악이라서 아담 이후 역사에서 끝나본 적이 없습니다.
헝그리 정신, 죄악의 핵심
(이사야 55:1~13)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헝그리 정신, 죄악의 핵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헝그리 정신, 죄악의 핵심’
영화 넘버3에서 송강호씨의 대사입니다. “야, 니들 한국 복싱이 잘 나가다가 요즘 왜 빌빌 대는지 아냐? 다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이야. 헝그리 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헝그리 정신은 기특하기도 하고 당차기도 합니다. 없는 집에 태어나서 출세하기 위해 갖추어야 될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무기가 아닐까싶습니다.
미국의 흑인 농구 선수들은 헝그리 정신의 대표적 예입니다. 뉴욕의 할렘가에서 태어난 이들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도 없고 오히려 흑인이라는 차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헝그리 정신으로 뒷골목을 벗어나 NBA의 진출에 성공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헝그리 정신이 있습니다. 끼니조차 힘들었던 상황에서 배수진을 치고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무슨 일이 주어지든지 해내지 못하면 죽는다는 정신으로 한강의 기적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 되어서 일까요? 헝그리 정신은 홀대받고 상속의 정신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재산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정신을 물려받았으니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더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요즘 젊은이들이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에 매사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젊은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우리는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쉽게도 우리는 여전히 헝그리 정신으로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재벌들이 2세 경영이나 3세 경영을 한다고 합니다. 재벌의 자손들은 부모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헝그리 정신을 모릅니다. 반대로 부모에게는 없었던 귀족적인 의식과 창의적인 경영 철학을 가지고 회사를 더 키워나갈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재벌 2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상속의 정신이 아닌 헝그리 정신일 뿐입니다. 헝그리 정신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지구상에서 끝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민가에서도 왕궁에서도 모든 삶은 헝그리 정신으로 이루어집니다. 오직 예수님과 성령으로 살았던 사람들만 헝그리 정신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금식을 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3절을 보면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금식은 집이나 기도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고통은 극심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기록된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헝그리 정신을 발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헝그리 정신이 죄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것을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향하려는 것이 헝그리 정신입니다. 상속의 시대가 되어서 많은 것을 유산으로 받고 좀 더 높은 차원의 창조적 삶을 살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헝그리 정신입니다. 추구하는 목적은 바뀌었을지라도 내면의 상태가 똑같습니다. 이게 죄악입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삶은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배부르지 않으면 참된 삶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얼핏 현실적이지 않고 문제적 발언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돈 없이 사라고 하시니 공짜 쿠폰이라도 나눠주신다는 것일까요? 3~4절에서 드러나듯이 이 공짜 쿠폰의 정체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포도주와 젖을 돈 없이 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니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1절과 마찬가지로 목마름과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유대 땅에서 목마름을 해결하는 대표적 음료로써 물과 포도주와 젖을 예로 들었고, 2절에서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써 양식과 배부르게 하는 것들과 먹기에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라는 말씀대로 수고는 했는데 배부르게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헝그리 정신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한테 한 달에 천만 원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300~400만원은 영어를 할 줄 아는 보모에게 지급되는 돈입니다. 또 300만원은 영어 유치원에 보내기 위한 돈입니다. 또 300만원은 추가로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는데 들어가는 돈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말이 안 되는 모습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분이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얼마나 헝그리 정신에 쫓겼으면 아이에게 천만 원씩 들여야 마음이 놓이는 것일까요?
이는 할렘가에서 태어난 흑인이 가지는 헝그리 정신과는 비교도 못할 강력한 헝그리 정신입니다. 돈을 엄청나게 벌었지만 그것으로 조금도 만족하지 못하자 돈이 없을 때보다도 더 두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한 달에 천만 원을 투자하게 됩니다. 돈으로 채울 수 없는 만족을 자녀들이 채워주기만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차이는 있지만 그 바닥에는 똑같은 헝그리 정신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마음이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투입되는 마음만큼 만족함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결국 마음의 만족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처럼 마음이 만족해있다면 사십 일 금식을 하시고도 떡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시며 지금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붙잡고 계십니다. 호흡을 주관하시며 생명을 유지시키시고 계십니다. 몸보다도 가까운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야만 헝그리 정신은 끝나게 됩니다.
7절을 보면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방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동안은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당을 불러다 굿도 했고 점을 보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전도를 받아서 이제 예배당에 나가게 되었고 사업이 안 되어도 절대로 굿을 하지 않습니다. 불상에게 절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열심히 새벽기도를 다닙니다. 사십 일 작정기도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업으로 기뻐하는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자녀가 문제인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이제는 자녀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해야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을 오해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갈증과 배고픔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는가가 여호와께로 돌아왔는지 않았는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6절의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가 죽으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작 몸이 없어지면 가까이 계시던 하나님이 없어져버립니다. 몸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마음에 하나님을 담은 상태가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이 있는 동안에 우리의 몸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 증거는 갈증과 배고픔이 사라집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육체가 죽으면 그 영혼은 하늘나라에 가게 됩니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마음에 모실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육체가 죽는다면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헝그리 정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돈 많이 벌고, 자녀가 엘리트로 살아가고, 몸이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기뻐하며 사느라 하나님으로 기뻐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결코 헝그리 정신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7절에서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만족을 향하여 갑니다. 그런데 이 길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결코 세상에서의 기쁨과 만족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곧 헝그리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만족이 없는 삶으로부터 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고,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악인의 길로 표현된 죄악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바라는 것이 없을 정도로 먼저 하나님으로 마음이 배불러야만 합니다. 10~11절을 보면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른 자가 살아가게 되는 인생길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말씀이 나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나의 삶에서 이와 같은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먹고 나면 자녀를 봐도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가득찬 배를 함포고복하면서 감사할 뿐입니다. 배우자에게도 바라지 않고 사업에도 바라지 않고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되기에 1절에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정말로 배부른 것이 무엇이고 목마름이 없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심을 통해 하나님을 얻기 위한 공짜 쿠폰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이제 이 쿠폰을 사용해서 악인의 길을 떠나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기쁨을 향해 달려가는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배우자는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업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악인의 길에서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사업으로 기뻐하려는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위해서 사업에 대해서는 바라는 게 없는 상태가 됩니다. 자녀를 키우는 엄마는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기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자녀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고 사업을 보면서 바라는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여호와의 길이 시작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업장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들을 향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배우자를 향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만지는 모든 일을 향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들은 열매를 맺지 않고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헝그리 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내 마음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세상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사업을 하든지 자녀를 키우든지 결혼을 하든지 삶의 모든 행동이 배고픔으로 인한 헝그리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만족이 없으니 만족을 향해가고, 기쁨이 없으니 기쁨을 향해 갔습니다. 이것이 죄악입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헝그리 정신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가 걸어온 헝그리 정신의 삶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면 또 다시 헝그리 정신이 발동하여 세상을 향해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게 되는 악인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길은 열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40장에서 66장까지는 구약속의 신약으로 불립니다.
그 내용이 너무나 복음적이기 때문입니다. 포로귀환 사건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루어진 이 예언은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펼쳤던 것 같은 신앙적 내용들을 풍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사십 일 금식은 배고픔의 가장 극단적인 환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이 그립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으로 만족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만족할 수 있도록 언약을 받았습니다. 이 언약을 사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헝그리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삶은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 것을 붙잡고 기쁨과 만족을 달라고 닦달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그 닦달을 견뎌낼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돈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돈이 나를 피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을 충족시켜주시겠다는 약속을 주님의 십자가에 걸어두셨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 아무것도 없어도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한 마음을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1절에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신 초청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속이 시원하도록 하나님을 마셔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헝그리 정신이 뿌리째 뽑히는 은총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배를 움켜쥐고 배고픔을 힘 삼아 살던 헝그리 정신의 삶을 십자가로 종식시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이 길을 열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