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인가? 일본사람인가?
제발 스키드 파이프가 한 해를 견뎌 주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기도 한 덕분인지 한 해를 무사히 보내고 다음해 대수리를 맞이해서는 자신 있게 가열로내 쇠붙이를 다 잘라버렸다.
이제는 아무도 이의를 달거나 걱정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비싼
출장비를 써 가며 귀동냥한 기술이 가열로 수리방안을 해결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스키드 파이프의 재질변경으로
정비비도 많이 절감되었고 교체점을 노 외부에서 절단하게 되어 노열과 관계없이 작업을 할 수 있어 정비시간도 하루 정도 줄일수가 있었다. 조업 측에서도 스키드 파이프의 내화재가 매끈하게 형성되어 스키드 마크가 감소되어 제품 불량률이 줄어들었다고
좋아했다. 정비로서는 큰 고비를 넘겼다.
개인채널은 후진국 기술인에게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은 기술이지만 그 기술 하나에 걸리면 기술료를 지불하고 도입한 큰 기술이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열로에서 회장님과 나란히 근무한 일은 수리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말라는 회장님의 방패 막이었다고 생각되어졌다. 그 와중에 놀라지 않고 정비팀을 믿어 주신 게 고마울 뿐이었다. 눈도장
하나는 확실히 찍었다고들 주변에서 이야기했다.
이제 그런대로 여유가 조금은 생겨 생각을 좀 하며 정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각 공장마다 현물차관으로 들어온 설비들은 자국의 설비규격에 따라 제작되어 이런 저런 부품들을 예비품으로 갖추자니
양도 많아지고 정비비도 일본대비 엄청나게 높았다. 심지어 시그널 램프하나도 소켙이 달라 공급선별로 준비해야
했다. 가동한지 몇 년이 되니까 이 램프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설비들은
한국이 대개 일본규격을 따라했기 때문에 신호등(Signal lamp)의 국산품대체가 가능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뵈스트 알피네가 공급한 후판공장의 부품들은 동구제품을 공급해서 크기와 형태가 달라 손상을 입어도 쉽게 교체하지를 못했다. 조업측은 그걸 보면서 조업을 하는데 맹인조업을 하다가 오작동(誤作動)이 발생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급한대로 설비공급사를 통해 수입했지만
포철은 램프조차 수입품을 써야만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느냐는 관련당국의 제제가 심했다. 일일이 브리핑
챠트를 들고 다니며 설득을 했지만 언제나 램프수입은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패널의 일부를 개조해야 하는데 전직장에서 제어반을 설계 제작했지만 제어선이 수백개나 연결된
패널과는 비교도 안되는 단순 전원 조작반이었다. 국내에서는 전문업체로 금선산전이 일본 후지쓰와 기술제휴를
맺고 이 분야를 막 시작했으나 도면도 제대로 없는 기존패널의 개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없이 제일 간단한 패널부터 선을 해체하고 선마다 꼬리표를 붙이고 패널의 외부에 베크라이트 판을
덧붙여 패널을 개조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자 조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당국에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조업측도 습관적으로
보던 신호가 동구제품보다 적어져서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좀 있었지만 그런대로 적응을 했다. 결과는
공장간 공동예비품종이 늘어나면서 정비품목이 눈에 보이게 줄어들고 정비비도 많이 줄어들었다. 정비능력도
몇 년을 시행착오를 하면서 꽤나 익숙해져서 그런대로 회사는 안정기에 들어가는 듯했다.
당시 재일교포가 국내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꽤나 컸다. 자본도
기술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교포들을 통해 인맥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교민에는 한국측의
거류민단과 북한측의 조총련의 두 단체가 있었으나 조총련의 세가 컸다. 한일협정 후 교민들에게 영주권을
줄 때 이런 저런 사유로 영주권을 받지 못한 교민들이 일본에 계속 살기위해 조총련에 가입했지만 오사카의 본부 간부들은 제외하고는 이름만 민단과
조총련이지 같은 교민으로 협력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발생하는 간첩사건으로 조총련은 타부시 되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 전까지 만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잘 살아 재일교민에 대한 지원이 많았다. 각지에 북한계열의 조선학교가 설립되고 거기다가 귀국을 원하는 사람들은 만경봉호를 니이가다(新潟)에 정박해 놓고 북한으로 이주시켰다. 일본에서는 노골적으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정책을 펴다 보니 점점 민단은 줄어들고 조총련의 인원이 늘어나
교민전체가 조총련화가 될 우려도 있어 정부당국이 민단이던 조총련이던 한국으로 초청해 산업화 초기의 포항과 울산산업단지를 보여주고 경주관광을 국가비용으로
‘재일교포 모국 산업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회사의 일반견학은 열연공장이었다. 교민들의
첫 회사 방문을 하는 날, 간부들은 대개 일어가 통해 작업복도 깨끗한 것으로 착용하고 그들의 시찰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중도중 안내 겸 도와주고 있었다.
처음은 민단 측만 참여했다 그나마 연세가 많은 사람들 위주였다. 조총련측은
전혀 응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조총련에서는 한국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거짓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다.
두번째도 세번째도 비슷했다. 대부분이 세상을 사실만큼 사신
연세가 많은 분들이 오셔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시찰만 하고 돌아가셨다. 조총련이 가지말라고 선전하는
대로 혹시나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이 된 것 같았다.
그들은 공장을 보고 가면서도 한국에 이런 공장이 있다는 것에 반신 반의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총련교민도 포함 되어있으니 북한을 비난하는 말은 주의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민단과 조총련 구분없이 살고 있는 일본 시골이나 산골지역의 교민들을 함께 초청했다는 것이다. 교민들을 모국을 한국이라고 말하는데 조총련은 조선이라고 하는게 그 구분이었다.
늘 하던 대로 공장입구에서 ‘이라샤이마세(어서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조선 총각인가 일본사람인가’ 하며 물었다. ‘한국 사람입니다’고 답변을 드렸드니 ‘그럼, 왜 일본말을 해?’ 순간적으로
우리가 실수를 하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초기에 온 거류민단 교민은 우리말을 거의 몰라서 일본말로 안내를
했으나 조총련교민은 한국어로 대화가 되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다가 가서 ‘할머니가 우리말을 모를까 봐 일본말을
했습니다’고 우리말로 변명을 했다. 할머니는 ‘거짓 말’ 하면서 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갑자기 증이라고 해서 우물거렸는데 ‘민단증 같은 것 있잖아’ 하셨다. 당시 도민증을 보여드렸다.
도민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소우네(그러네) 하셨다. 그러면서 그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고 휴게실에서 차 한
잔씩 하시며 그들의 담소를 하고는 돌아가셨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민단보다 조총련이 더 많은 단체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버스에서 내리는 교민들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들이였다. 조총련에서 선전하는 대로 한국에 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선전때문에 이제 다 살았으니 어디서
죽어도 괜찮다고 하는 분들만 오셨다고들 했다. 몸을 부축해 가며 종전보다 더 신경을 쓰며 안내를 했다. 그들은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안내원을 붙잡고 우는 이도 있었다. 살아
생전에 고국 땅을 밟는 게 그리도 힘들었다며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러자 몇 사람이 한꺼번에
눈물을 흘려서 당황스러웠을 때도 있었다.
시찰회수를 거듭할수록 나이도 조금씩 조금씩 젊어지는 듯했다. 한국에
가도 아무렇지도 않고 돈 한푼 안 들이고 한국을 볼수 있다는데 매력을 느끼기 시작해서였다. 여늬 때처럼
공장입구에서 ‘이라샤이마세(어서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그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고 휴게실에서 차 한잔씩 하시며 그들과 담소를 나누고 돌아갔다.
그 다음부터 한국어와 일어를 번갈아 하면서 영접을 했다. 한그룹의
남자분들은 ‘실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선사람이 아니고 일본사람이지?’ 하고 물었다. 제철기술은 일본에서도 쉽지 않은 기술로 알고 있는데
한국사람이 이런 큰 공장을 가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고
다시 설명을 드렸지만 직접 현장에서 확인해 보겠다고 따졌다. 본래 생산조작실에는 방문객의 출입은 시키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조업에도 방해도 되지만 조업반의 계기치는 하나의 기술정보가 되기 때문에 절차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절차를 따질 여건은 못되었다. 그러다가는
더 의심을 받을 것 같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차량을 준비시켰다. 예상외로 희망자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했던 것 같았다.
다시 버스를 준비해서 공장 내부로 들어가 견학코스가 아닌 생산조작실로 들어갔다. 조작실에서도 ‘조선사람인가 일본사람인가’ 하고 연신 물어 댔다. 직원들이 당황했다. 그래서 잠깐 직원들에게 재일교포 모국 방문 시찰단인데 조업원들이 한국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확인을 하고 싶어
한다니까 직원들이 한바탕 웃으며 ‘한국사람이에요’했다.
어떤 할머니들은 직원의 얼굴을 빤히 치어다 보기도 하고 스다듬기도 하면서 ‘혼또니(정말로) 조선사람
맞나?’ 하면서 손을 잡기도 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갖고
온 보자기에서 주먹밥을 주면서 ‘배고프지, 이것 먹어’라고 직원들에게 주셨다. 속칭 니기리 메시(기름 소금밥)였다.
직원들이
당황했다. 직원 들은 공고를 갓 졸업한 세대들이라 니기리 메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할 수 없이 직원들에게 ‘니기리 메시는 일본에서 전쟁 중 야전식사나 간식으로 먹는 거니까 먹고 싶은 사람들은 맛을 보라’고 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어 할머니에게 설명을 드렸다.
‘할머니, 이 세대들은 니기리 메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름 소금으로 뭉친 밥은 먹지 않고 김에 싸서 김밥을 먹는다’고 했더니 되려 간부들이 있어서 먹지 않는다고 간부들에게 ‘이것을
먹어도 야단치지 않는다’고 말 하라고 하셨다.
직원들에게 다시 ‘맛보고 싶은 사람은 보라, 먹었다고 아무런 제재도 없다'고 했더니 직원들이 한꺼번에 웃으며 신기한 물건이나 보듯
보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간부들이 있어 안 먹으니 간부들은 나가라고 했다. 그러자 작업장(현재 주임)이
‘할머니 제가 맛볼 게요’ 하고 한입 물었지만 직원들은 치어다
보기만 했다. 할머니 말대로 밖으로 나왔다가 한참후에 다시 들어가니 할머니들이 직원들의 배도 만져보며
배고프면 눈치 보지 말고 먹으라고 했다며 모두들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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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 조금씩 조총련이 늘어났고 연령층도 중년으로 바뀌었다. 재일교포 모국 산업시찰단이 계속되면서 한국에 가도 해를 당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다는 입소문이 재일교포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여름방학때는 조총련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겸해서 왔다. 공부하는
학생들이라 별로 가리는 것 없이 우리학생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조센(조선의 일본발음) 조센하는 게 정말 듣기가 어색했다. 견학 후 차를 한잔하면서 ‘조선은 일제 강점기 이전의 조선왕조이고 지금은 대한민국이다,’라고
설명을 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이후 방문팀부터는 우리 말로 하기로 했지만 거류민단은 중년층조차도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결국은
일어와 우리말을 모두 쓸 수밖에 없었다.
재일교포 모국 관광 및 산업시찰단이 이어질수록 일본에서 ‘한국은
살 만한 곳이다’라는 입소문이 퍼져 조총련이 민단으로 옮기고 싶지만 일본정부가 영주권을 주지 않았다. 아마 정부의 끈질긴 외교 끝에 교통 벌칙이나 가벼운 경범자들에게도 영주권을 다시 발급 해주면서 교민사회는 조총련을 압도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재일교포 할머니가 조선사람인가 일본사람인가 하는 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리고 할머니가 주신 니기리 메시는 모두들 무엇인가 하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때 배고프지 하면 아니에요 하는 직원들의 배를 만지던 할머니들의 생각은 정말 한국은 밥도 못먹고 사는 나라로 알았던 것 같았다. 하기사 북한은 조선학교를 지워주었는데 한국은 대도시에만 학교가 있었으니 그럴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