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편 37:24].
25절에 '나는 젊어서나 늙어서나'하는 말을 통해서, 시편 37편의 시인(다윗)이 산전수전 다 겪은 백발의 노년에 쓴 시임을 알 수 있다.
'살아보니까, 지나보니까'라는 말은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살아보니까 이렇더라' 하는 말과 '너희는 왜 이렇게 살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말이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형통을 보는 일은 우리의 일상이다.
악인의 성공 앞에서 화가 나고,
때론 그들처럼 형통한 삶을 살고 싶어 시샘하는 것이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현존이 아닐까?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형통은 형통이 아니니 부러워하지 말라고한다.
이내 풀처럼 시들어버리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마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살아보니,
눈앞에서 거짓과 악이 성하여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라.
살아보니,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참되고 진실에 가깝더라.
악하고 불의한 이들의 형통을 보며 분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분노'에 사로잡히면, 분노가 그 사람을 삼켜버릴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의 의지만 가지고 극복할 수 있는 이 아니다.
시인은 '주님만 의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3)'을 통해서 극복하라고 권면한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하다보면,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할 틈이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이다.
디윗은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의로운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겸손한 사람들(11),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자기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들(24), 흠 없는 사람들(18), 정직한 사람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37)'이 그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게서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에 구원하여 주신다(40).
그 구원이란 무엇일까?
악한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의 현존이 아닌가?
그런 삶의 시작은 주님을 찾는 것으로부터이고, 구체적으로는 우리 마음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노여움과 격분과 불평'을 가라 앉히는 일이다.
'노여움과 격분과 불평'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인간을 파괴하는 선봉장이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와는 다른 것으로서, 매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아 결국 그의 삶을 냉소적인 삶으로 이끈다.
이런 삶은 불의에 대해서 비판하지만, 대안을 말하지 않는다. 솔직하게는 대안도 없고, 자기가 그런 위치면 더 불의스러울 것을 자신도 안다. 그저 자기가 비난하는 이들의 부러울 뿐이다. 시샘과 불평과 불만에 빠져들지 말아야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를 방치하면 잘해야 냉소주의에 빠지게 되고, 냉소주의는 그의 삶을 나락으로 빠트리기 때문이다.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실하게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주님께 맡겨라.
그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요, 흠없는 사람이다.
사람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때론,
분노하고, 절망하고, 시샘하고, 그런 자신을 보고 또한 화를 내고,
왜 나의 그릇은 이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가 실망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라.
비틀거리니까 사람이고, 비틀거리니까 주님께서 손을 잡아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