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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6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1.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설교를 위한 묵상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왜 죽으셨는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이런 이야기들이 식상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앞으로 부활절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묵상하고 그것을 나누고 싶다.
나는 최근에 톰 라이트의 강연에 자막을 달았다. 그리고 그 제목을 ‘십자가의 의미’라고 정했다. 원래 제목은 Reconsidering the Meaning of Jesus' Crucifixion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 그가 7년 전에 이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할 때 그는 자신의 책, 혁명이 시작된 날(The Day the Revolution Began)을 출간한 상태였다. 그 강연은 이 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작년에 이 책을 읽고 부활의 의미에 대하여 신우회에서 나눈 바 있다.
그런데 올해 그의 강연 영상을 보고 들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것을 교회와 신우회 예배에서 나눌 예정이다. 그것은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그만큼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선 나는 다음과 같은 소주제로 이 시리즈를 나눌 예정이다:
1.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2. 예수님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이기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3.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의 의미는?
4. 십자가의 능력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5.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선언은 어떤 의미일까?
6. 십자가가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꾼 점은 무엇일까?
이런 주제들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를 다루는 동안에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또 연구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를 자랑하고 굳게 붙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싶다.
설교 개요
1. 하나님 아버지,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2. 십자가의 도에 대한 상반된 반응
3. 십자가 앞에서
4. 유월절의 어린 양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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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아버지,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성동구청 신우회 회원 여러분, 우리는 매주 수요일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경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우리의 마음을 표합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지금 연습하는 기도문에는 바로 그런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배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는 그것을 쉽게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라고 격려하는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우리 신우회의 3월 암송 본문은 신명기 6장 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 후에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살기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우회의 2월달 암송 성구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6편 8절 말씀!” 예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앞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신학자들은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서 ‘하나님 앞에서’(in the presence of God)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백성으로서 살아갈 때 그것은 하나님과 분명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말이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금년에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연습하면서 특별히 기도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그 기도문입니다. 지난 주에 저는 여러분에게 이 기도문 후에 자신의 기도를 하나의 문장으로 덧붙여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오늘 그것을 한번 연습해 보겠습니다. 방법은 우리가 다 기도문을 암송하면, 한사람씩 자신의 기도문을 덧붙이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의 기도문을 말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덧붙여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이런 방식으로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우리의 기도를 말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연습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십자가의 도에 대한 상반된 반응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사도 바울의 글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의 가르침입니다. 또는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여 조롱을 받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타내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도를 배우고 깨닫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데,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이길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미련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까요?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가진 역설이라고 하겠습니다. 같은 것에 대하여 상반된 두 가지의 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역설(逆說)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역설의 진리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11~12)
십자가는 본래 사형수를 매다는 사형틀입니다. 삽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패배자이며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십자가는 승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골로새서 2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승리의 상징이라고 말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15
오늘 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승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왜 십자가의 도가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십자가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느꼈거나 깨달은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후에 성경이 소개하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나누겠습니다. 이것은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지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3. 십자가가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고통과 실패, 그리고 좌절을 뼈저리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자신만의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나의 고뿔이 남의 중병보다 더 아프다고 하는 말은 바로 개인이 느끼는 고통이 그 자신의 것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문득 예수님의 아픔을 공감하게 되었을 때 이 분은 나의 아픔을 아시겠구나 하는 깨우침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십자가는 그 사람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주님과의 만남을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저는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그리고 저의 청년 시절에 십자가 앞에서 이런 것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지독한 가난과 슬픔이 삶을 짓누를 때 그 속에서 아파하고 좌절하던 사람들이 느끼는 위로,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깨달음이 아닐까 되돌아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아픔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신 이유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이분은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셨을까? 그런 질문과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죄 없는 분이 이렇게 희생하셨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어떤 사람들에게 주는 큰 위로와 용기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느낀 그런 감정을 노래한 노래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나의 슬픔을 주가 기쁨으로 변화시키시네!’(Mourning into Dancing)라는 곡입니다:
나의 슬픔을 주가 기쁨으로 변화시키시네
잠잠할 수 없네 기뻐 춤추며 찬양해
나의 슬픔을 주가 기쁨으로 변화시키시네
잠잠할 수 없네 기뻐 춤추며 찬양해
상처 뿐인 내 영혼 위로해 주셨네
고통 중에 있을 때 주님 평안 주셨네
주 사랑 어둠 이김을 나는 느끼네
주의 빛 비춰 주시니 내 마음 기뻐 주 찬양하네
(Tommy Walker)
토미 워커의 다른 노래도 소개합니다. ‘내 이름 아시죠’ (He Knows My Name)입니다.
나를 지으신 주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물 내가 어딜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그가 들으시죠 그가 들으시죠~
이런 노래는 젊은 세대에게 위로와 공감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 이전 세대도 그리고 저와 같은 오십대도 과거를 돌아보면 고통과 슬픔 속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십자가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고 고난을 이겼습니다. 그때 부른 외마디 노래는 ‘아시지요~’였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은 아픔과 슬픔을 공감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공감을 사람들과 나눔으로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앞에 선 어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며 위로이며 깨달음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도 깨우침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다음 주 예고>
다음 주에는 성경의 인물들이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능력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의 편지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아픔에 대한 공감은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파된 이유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세대가 발견해야 할 복음의 능력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앞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그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깨닫고 체험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골로새서 2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점심시간 예배는 짧지만 모아보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앞으로 부활절까지 십자가의 능력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짬을 내어 이 주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런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본질적으로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니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