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분망천(戴盆望天)-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 이상호(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꿈보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인간은 더 많은 자유와 인권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그 중심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확대하고 신장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시장주의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기반으로 성장하였으며, 민주주의 또한 그 선택의 자유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시장에서의 구매행위는 선택의 자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민주주의에서의 선거권 또한 선택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자유를 확장해 왔다. 그뿐 아니라 자유로운 창업과 기업 경영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피선거권 또한 선택의 자유의 확장 덕택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인권과 자유의 확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익의 극대화에 의한 이기주의의 천박한 늪에 빠지면 합법성이란 가면을 쓰고 무한하게 확대된 자유를 바탕으로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함께 타인을 조롱하고 짓밟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이익의 극대화에 빠진 자본주의가 도덕적 원칙과 감화력을 상실하면 독점자본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과 유착하여 세상을 전체주의로 몰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가 특정 정치 집단의 이익 극대화에 빠지고 국민이 그에 편승해 버리면 민주주의 탈을 쓴 전체주의로 흐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 중심에는 한없는 욕망 추구만 도사리며 그 욕망 추구의 이면에는 온갖 기만 행위가 난무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역사가 증명하며 모든 영역에서 발생한다. 선택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노동조합이 담합과 독점으로 흐르면 역시 독과점과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 그리고 한 개인의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자유가 지나치게 극대화되면 타인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한계를 벗어나 나의 자유를 위한 타인의 인권 침해라는 도덕적 모순을 유발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되려면 만인이 공정한 법률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개인 또한 그것을 존중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타락하여 세상을 더 혼탁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린 도덕적 원칙과 도덕적 감수성의 확장으로 끊임없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정화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비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많은 도덕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하며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훌륭한 제도 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에 우린 정화를 통해 그것을 발전 시켜야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인간의 꿈과 욕망 추구의 확장을 키워왔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며, 자기의 꿈과 욕망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것은 인권과 자유의 확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꿈과 욕망은 충돌하고 때로는 욕망이 꿈을 삼켜버리는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 낸다. 지나친 욕망에 기반을 둔 꿈은 도덕적 감수성을 상실하여 무한대의 욕망추구의 노예가 되어 비정상적인 충족으로 타인과 세상에 해로움을 끼친다. 이를테면 부자가 되기 위한 꿈과 욕망의 실현을 위해 사기 행위를 함으로 타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돈을 매개로 타인을 지배하는 행위 등이 그러한 것이다. 말할 자유란 이름으로 특정한 타인을 비방함으로 그의 인격에 침해를 가하는 행위 또한 욕망의 왜곡된 모습이다. 꿈과 욕망의 관계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다. 하지만 꿈은 가치 중심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방법과 절차와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당한 방법과 절차와 노력이 수반된 욕망의 추구 또한 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가치와 합리성이 상실된 단지 욕망 지향의 욕망이 있다. 그것에는 꿈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리고 무한대의 욕망 추구에는 절제가 상실됨으로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사기 행위와 탈법, 편법, 온갖 성적 타락, 타인에 대한 비방과 테러 행위 등 모든 행위가 꿈의 범주를 상실한 무한대의 욕망 추구와 관계 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에서의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지나치면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도덕적 타락에 빠질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꿈을 벗어난 권력 욕망에 지나치게 빠지면 민주주의를 가장한 온갖 타락과 기만과 교묘한 탈법을 자행하며 대중을 정파 주의로 규합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들이 그 정파 주의의 늪에 함께 빠지면 민주주의는 대중과 함께 정파적 분열의 길을 걷는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사회는 꿈보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그 욕망의 중심에는 돈과 권력이 도사린다. 어떤 이는 돈에 대한 욕망에 인생을 걸고 어떤 이는 권력에 대한 욕망에 인생을 건다. 또 어떤 이는 돈과 권력 모두에 인생을 건다. 의사에게는 환자를 치료하는 숭고한 도덕적 사명이 있다. 그러나 돈의 욕망에 빠진 의사는 환자 모두를 돈으로만 치환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특정 분야와 농어촌의 의료공백과 의과대학 집중 현상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가치 있는 꿈인가? 돈을 향한 욕망의 추구인가? 권력이 욕망 추구에 몰입하면 온갖 정쟁과 탈법과 정파를 갈라 비방과 패싸움에 몰입한다. 그리고 대중들이 그에 합세하면 세상은 분열된 난장판이 된다. 여기엔 정상적인 담론과 법과 상식의 가치는 실종된다. 그리고 그 승자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정치적 독점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돈과 권력의 욕망이 지나치면 둘은 연합하게 된다. 정치는 돈에 의해 부패하고 자본은 권력에 의해 왜곡된다. 지금의 한국 정치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이 모든 것들은 꿈과 욕망의 관계로 볼 때 꿈이 아닌 욕망의 노예가 된 세상임을 말해 준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은 꿈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며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그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여기에 물든 사람들은 그것도 꿈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의 범주를 일탈한 무한대의 욕망 추구 이를테면 절제를 상실한 욕망추구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늘 원대한 꿈을 꾸라고 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큰 꿈을 가지라고 강요하듯 말한다. 그러나 그 원대한 꿈을 꾸는 것이 늘 좋은 것인가? 꿈은 원대하면 좋겠지만 현실과 노력이 전혀 따라주지를 않으면 그것은 망상이 되고 그 망상에 젖으면 그 꿈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특히 망상 같은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옳지 못한 방법과 절차를 고안하고 활용하면 그것이 되레 인생 전체를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하늘은 보기 위해서는 머리에 쓴 큰 삿갓을 벗거나 머리에 이고 있는 무거운 집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늘을 보는 것은 인간의 꿈이다. 큰 삿갓과 짐은 꿈을 가리고 있는 욕망이다. 욕망은 현실과 상황을 무시하지만 꿈은 현실과 상황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꿈의 실현을 위해 분수를 지키는 일이며 욕망에 가치를 부여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일이다. 우리는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 대분망천(戴盆望天)의 유래와 의미 대분망천(戴盆望天)[戴(일 대, 머리 위에 올려놓다, 느끼다, 생각하다) 盆(동이 분, 몰동이) 望(바랄 망, 바라다, 우러러보다) 天(하늘 천, 하늘)]은 사마천의 사기 <보임소경서補任少卿書>에서 ‘이릉의 화’에 대한 언급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은 ‘큰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다’이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그 본말을 생각하지 않고 ‘두 가지 일을 함께 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는 분에 넘치는 욕망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화를 당할 수 있음을 스스로 경계한 말이다. 꿈을 가지되 분수를 지키며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매사에 경계하며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사마천은 늘 조심하며 살았지만, 본의 아니게 ‘이릉의 사건’에 끼어들어 화를 당하게 되었음을 한탄한 말이다. 사마천은 <보임소경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렇다 할 재주도 없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향 사람들의 칭찬 한마디 들어보지 못한 채 살다가 아버님 덕분에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궁중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여 저는 빈객들과의 교유를 사절하고 집안일도 잊고 밤낮으로 미약한 재주를 다하려 노력하고 한마음으로 직무에 최선을 다하므로 폐하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비천한 몸으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어찌 하늘을 바라보겠습니까?(僕以爲戴盆何以望天) 일에 큰 잘못이 생겨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되지를 않았습니다(而事乃有 大謬不然者) 이릉의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사마천, 사기, 보임소경서> 사마천은 세상을 참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늘 조심하면서 자신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한무제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한무제 또한 사마천을 신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릉의 사건’에 참견하는 바람에 화를 당해 궁형에 처해 사경을 헤매다가 살아났다. 그가 살아난 목적은 단지 아버지 때부터 집필해 오던 사기를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사기의 집필은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본말은 이렇다. 사마천과 이릉 장군은 알고는 지냈으나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사마천은 그런 이릉 장군은 기개가 있고 훌륭한 장군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정벌의 명을 받고 출정하여 싸우다가 흉노에게 크게 패하고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사실 패전은 본국에서의 추가 지원병과 보급이 되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었다. 이릉은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모든 병사를 잃고 포로가 된 것이었다. 이릉이 승전을 한다고 전갈이 올 때는 황제와 대신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축배를 들다가 패전 소식을 듣자 황제는 웃음을 잃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황제의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마천은 그 모습에 배알이 꼬였다. 그래서 이릉 장군을 변론하였다. 그래서 황제와 신하들의 미움을 샀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에게 형벌을 내렸다. 형벌은 사형, 벌금, 궁형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인 사기를 쓰기 위해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다고 벌금을 낼 만한 돈도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가장 치욕스런 형벌인 궁형을 선택했다. 궁형에 처해져 겨우 살아난 사마천에게 임안이 모함을 받고 황제에게 자신을 변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사마천은 오랜 시간을 망설이다가 그럴 수 없는 처참한 자신의 마음과 현실을 한탄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것이 보임소경서 즉 인안에게 보내는 편지다. 지금 우리는 자유와 인권, 만민평등의 시대에 살기 때문에 세상이 살얼음판이라는 것을 그리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나 조선왕조를 포함한 모든 왕조 시대는 늘 살얼음판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스스로 꿈이 아닌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최종 결과는 머리에 이고 있는 물동이가 쏟아져 자신을 온통 물로 적셔 버리게 된다. 무한대의 욕망에 기반을 둔 권력과 돈, 향락만 추구한 최종 대가는 자기 파멸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단계 사기나 정쟁에 빠져 낭패를 보는 사람, 폭력 등에 휘말려 낭패를 당하는 사람, 마약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사람, 고위공직자가 음주운전을 하는 것, 부당한 방법과 권모술수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대분망천(戴盆望天)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큰 꿈을 가지되 욕망을 절제하며 개입할 때와 개입하지 않을 때를 잘 구분하여야 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대분망천(戴盆望天)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겸허한 삶의 지혜를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3. 대분망천(戴盆望天)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꿈을 가지되 그 꿈이 지나치게 크고 왜곡된 욕망에 빠지면 그 꿈이 자신을 망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이기적 욕망의 늪에 빠지면 독점 자본주의가 되어 세상을 망가뜨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도자가 지나친 권력 욕망에 빠지면 전체주의의 늪에 빠지게 한다. 국민이 특정한 권력의 편에서 편협된 권력적 대리욕망에 빠지면 나라는 분열되고 투쟁의 장이 된다. 인간의 지유가 지나치면 타인의 자유를 짓밟는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삶도 파괴된다. 이 모든 곳에는 욕망 과잉과 도덕적 타락과 도덕적 감수성의 상실이 도사린다. 그러한 삶은 모두 대분망천(戴盆望天) 하는 삶이다. 우리는 대분망천(戴盆望天) 하는 삶을 경계하여야 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하는 대분망천(戴盆望天)에는 자신을 경계하며 겸허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숨어 있다. 사람들은 고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겸허를 잃어버리기 쉽다. 역경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눈물 젖은 빵의 의미도 모른다. 사마천도 그 이전에는 그것을 조심하였지만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큰 고난을 경험하고 나서야 겸허와 경계하는 삶이 얼만 중요한가를 깊이 깨닫는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고 역경은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고 했던 것 아닐까? 오랜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제자와 자녀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서 겸허하게 경계하는 삶을 살 것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삶의 덧없음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세상 사물들은 대체로 덧없이 변화하는 것이 많다. 초목 중에 작약 같은 꽃은 활짝 피었을 때는 참 아름답지만 말라 시들어 버리면 덧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래 산다고 하지만 수백 년이 못 되어 쪼개져 불태워지거나 바람에 꺾이고 송충이에게 갉아 먹히고 만다. 이 같은 사실은 선비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땅이 덧없는 물건인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의 땅 문서의 내력을 조사해 보니 백 년 동안 소유주가 바뀐 것이 대 여섯번에 이르며 심한 경우는 아홉 번도 된다. 땅의 성질은 유동적이고 쉽게 바뀐다. 그러니 땅을 믿는 것은 기녀의 정절을 믿는 것과 같다.’<다산이 52세 때인 1813년 8월 다산초당에서 가르친 제자 윤종심에게 보낸 편지, 가진 것은 덧없다>. 다산 성생은 땅 특히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이는 땅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땅이나 재물을 가지려고 목숨을 걸듯 하지 말라는 경계의 말이다. 다산 선생은 또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일을 ‘한가한 일’이라고 하고 독서를 하고 이치는 탐구하는 일을 ‘옛날이야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경박한 사람들이다. 맹자는 ‘큰 것을 기르는 자는 대인(大人)이 되고, 작은 것을 기르는 자는 소인(小人)이 된다’고 했다.”<다산초당의 제자 장수칠에게 보낸 글>. 위의 글에서 ‘큰 것을 기르는 것’은 마음의 수양을 말하는 것이고 ‘작은 것을 기르는 자’는 일신의 안위와 이익에 눈이 먼 것을 말한다. 이처럼 다산은 마음의 수양과 올바른 성품을 기르는 일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다산 선생의 글 중에는 욕심을 줄이고 겸허하게 학문과 수양에 힘쓰며 살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다. 특히 다산의 그러한 삶은 그의 수오재기(守吾齋記)-나를 지키는 집에 대한 기록-와, 여유당기(與猶堂記)-겨울 시내를 건너듯 사방을 두려워하며 조심조심하노라-등에 잘 나타나 있다. 젊은 날 겸허하지 못하고 자신을 경계하지 못하여 오랜 귀양살이를 하였음을 후회하며 늘 자신을 다스리고 공부에 매진하고자 노력한 다산의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자본주의가 이기주의에 빠져 천박한 이익의 극대화란 욕망의 노예가 되면 대분망천(戴盆望天) 하게 된다.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이 권력욕의 노예가 되면 대분망천(戴盆望天) 하게 된다. 인간의 삶이 돈과 권력, 향락의 노예가 되면 대분망천(戴盆望天) 하게 된다. 개개인들이 말과 행동 등 모든 행위에서 욕망의 노예가 되면 대분망천(戴盆望天) 하게 된다. 대분망천(戴盆望天) 하게 된 것은 꿈이 절제되지 않은 욕망으로 왜곡되고 변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 가치와 도덕적 합리성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가치와 방법과 절차를 상실한 꿈은 꿈이 아닌 욕망일 뿐이다. 그 모든 것에는 겸허와 절제를 잃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겸허와 절제를 잃으면 파멸한다. 우린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모두 평화로운 공존공영의 삶을 살 수 있다. 우린 결코 대분망천(戴盆望天)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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