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현스님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하시고 그 방법을 설 하셨다고 강조합니다. /
*** 나는 저 강의를 듣지 못했지만..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인정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라"
저 문장은 두 가지가 생략되어 있어요.
하나는 누구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 다른 하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인도인이라고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석가세존이 보는 대상으로 인간은 삶 100%가 결국은 불행이요, 괴로움이라는 겁니다.
삶을 희로애락으로 보아.. 삶 속에 즐거움이나 행복이 있다는 것은 세간의 인생관이며, 착각된 인생관이라는 게 되지요.
하지만 세간의 삶을 포기하면 이 사회는 엉망이 됩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석가세존은 하나는 세간(세속)의 길이라 하고, 다른 것은 출세간의 길이라 하였다고 봅니다.^^.
착각된 인생 길 안에는 희로애락이 있지요.
참고로 보살 불교란..
후기 불교인 대승불교 사상으로 무아를 목표로 삼는 출세간은 마음에 품고 몸은 세간에 사는 것을 전제로 한 불교로 저는 봅니다.().
그와같은 보살 불교가 나오게 되는 배경은 바로 삶을 100% 고통으로 보는 부처님의 사상에 대한 방편이라고 보는 거지요.
부처와 보살의 차이를..
부처는 보이는 게 바로 나[무아]라면..
보살은 나가 있기에 상대의 고통을 보면 그것을 함께 치료하려 실천을 하면서[자비] 거기서 행복을 느끼지만[희],
상대와 헤어지면 지난 일을 잊습니다[사].
나가 있지만, 그 나는 자기가 행한 인에 의한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겁니다.
삶을 100% 괴로움이라고 하지 않으면 굳이 무아로 온통 살아가는 부처가 될 이유가 없어요.
중생 삶은 나가 있는 삶이요, 부처 삶은 나가 없는 삶이라 하는데.. 왜 나없이 살아야 합니까?
그러니 부처님이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면..
그 상대는 주체를 인정하고 있는 자로 출가 수행자가 아닌 세간이요, 재가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경>을 보면 말년에 재가자가 아닌 출가자만 주위에 있거든요.^^.
그들을 보며 행복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말년에 출가자에게 당부하는 것은..
5온에 의지하여[자등명] 무아인 법을 깨쳐[법등명] 아라한[무아]이 되라는 겁니다.
목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게으르지 말라는 겁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법[길]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도, 끝도 좋다고 늘 강조하시는데..
여기서 좋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그만큼 더 멀어져 가니 좋은 것이지.. 수행을 하면 즐겁고 행복이 늘어난다는 게 아닙니다.
괴롭지 않은 게 행복이 아니냐?.
글쎄.. 행복하다 하려면 일인칭인 주체가 있어야만 한다니까요.
열반이란 말 뜻이 내가 가질 수 있는 더 이상 위가 없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사라져 더 이상 탈 것[고]이 남아 있지않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죠.
부처님이 제자에게 가르치는 목표는 고멸이지.. 행복이 목표가 아닙니다.
행복 선언을 하는 불자는..
보살불교를 선언하는 게 됩니다.^^.
보살은 부처님이 계시니 나오지만..
보살은 부처가 되지는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불보살님의 가피를 청합니다.()." 라는 말을 종종 듣지요.
우리 불교는 부처님이 아닌 불보살을 믿는 대승불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항상 우리가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는 식으로 뻥. 치시면 아니 됩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다 보면 불교 스스로 모순에 빠져..
애매모호한 가르침이 됩니다.
즉 석가부처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가르치고..
5취온..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이 그대로 괴로움으로..
나라고 알고 있는 5취온을 멸[죽임]해야만 한다.
부처님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보살을 드러내야만 불교가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거지요.
보살님은 어머니가 당신의 아이를 돌보듯 아이가 항상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불보살을 구별해 아는 게 쉽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이해하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거든요 ㅎㅎㅎ^^
그리고 '불보살' 하면 '부처님' 하는 만큼 듣는 이에게 전해지는 에너지가 달라요.
부처님이 이렇게 강조하셨다.
불보살님이 이렇게 강조하셨다. 를 보면..
전자가 훨씬 강하게 어필이 됩니다.^^ 아닌가요?.
둘이 비슷하게 들린다고 하면..
무조건 불보살이라는 말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불교가 처음 중원[중앙, 중국]에 들어왔을 때.. 불교를 도교와 비슷하게 느끼지만..
자현스님이 지적했듯이.. 인도 문화가 중국 문화보다 앞서 있었기에..
불교는 당시 도교보다 훨~ 시스템 쎄련된 종교였습니다.
도교가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그러다 도교와 유교와 불교가 융합하는 수(당) 이후 불교는 불보살불교인 대승불교였습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는 씨앗을 뿌리고 꽃봉오리가 맺었을 뿐.. 꽃을 피우지 못했어요.
한편..
아시아에는 인도 문화와 중원 문화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인도 문화는 남 아시아에서..
중원 문화는 한국, 중국이 중심이고 주변 문화로 일본, 몽고, 티베트, 베트남에서 발전되었지요.
이런 중국에 인도 문화인 불교가 들어옵니다.
중원의 자존심은 인도 문화가 세련된 것은 틀림없으나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지요.^^.
해서 소승인 상좌부 불교가 아닌 대승불교 그리고 수행 중심인 상좌부에 비견되는 선종이 발전하게 된 것으로 저는 봅니다.
대승불교가 그렇지만..
선종 역시 무아를 목표처럼 주장하지만.. 무아에 이르는 수행이 아니라고 봅니다.
아니! 무아에 이를 필요가 없어요.
내가 대자유인[참나 큰 나]이 되어 스스로는 평화롭고 남에게는 사랑을 베풀면 됩니다.
선사(禪師)는 물론 선승(禪僧)은 삶을 유유자적하는 예술인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작품은 한결같이 굉장히 아름답고 깊이가 있지요.
선종의 목표인 견성성불을 이루는데는 보통 사람들 능력이라면 엄청 용맹정진 수행을 요구하지요.
자현스님 수준에 이르려면 분명 수행도 적지 않게 했을 터인데..
자현 스님 스스로 견성성불을 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시나요?^^.
자현스님은 수행 스님이 아닌 법사 스님[전강]입니다.
수행 스님은 성철스님 문하 아니면 전강스님 맥을 이은 송담 스님 문하에 있을 터인데..
그들 가운데 견성성불한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셨나요?.
만일 불교 목표는 (나의) 행복이다. 라고 알고 있다면..
견성성불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행복이 중요할까요?.
'나는 행복하다' 고 보고 알고 느끼면..
그것이 목표를 이룬 게 됩니다.^^.
부처님 제자라면.. 무슨 인가니 뭐니 받을 필요가 없어요.
스스로 관찰하여 '나가 있는지를.. 하여 괴로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 통찰하면 됩니다.
온전한 불보살 제자라면.. 보이는 상대가 고통에 있으면 그의 고통을 줄이려 온통 실천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 주위 사람과 협력을 합니다.
아니면 함께 괴로워 하지요. 동고동락
관세음보살님은 머리[이마]에 부처님을 모시고 다닙니다.
비록 지금 내가 있어 중생을 이롭게 하려 보살행을 하고 있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나는 무아를 이루겠다는 것이지요.().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염려를 표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의 목표는 하나로 통한다고도 합니다.
대승불교는 다른 종교와 하나로 통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석가부처님 불교인 근본불교는 독불입니다.^^.
무아를 목표로 정하고 가르치는 종교는 불교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