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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로마서 1장 16~17절은 로마서의 주제(theme) 구절입니다.1)
로마서 1장 16절에 기록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까닭이라”라고 파울은 기록하였습니다.
15절에 “나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할 것을 원하노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유는 왜입니까? 왜 그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 것입니까? 이유는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파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복음만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이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이니 이는 그것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 안으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며 첫째로 유대인에게 또한 그리스인에게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부끄러워하다(be ashamed of)”(에파이스퀴노마이)는 “부끄러이 여기다”를 의미합니다.
사도 파울은 로마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도하고 싶어 하였는데 이는(For)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롬 1:15-16).
“곡언법(曲言法)”이라는 한자어는 “구부려서 말하는 법”이라는 뜻인데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2)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자랑한다는 뜻인데 사도 파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던 이유는 그 복음이 구원 안으로의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 1:16).
“능력(power)”(뒤나미스)은 “할 수 있다”라는 동사(뒤나마이)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인도하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십니다.
사도 파울은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것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 안으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고 첫째로 유대인에게 또한 그리스인에게 그러합니다(롬 1:16).
“구원(salvation)”(소테리아)은 “구출”, “구조”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이 되셨다”라고 노래합니다(출 15:2).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이시며 그는 나에게 구원이 됩니다(사 12: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지온 안에 구출을 주셨습니다(사 46:13). 좋은 소식을 가져와 구원을 발표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습니다(사 52:7).
믿는 자는 구원함을 받으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구원하는 것과 유죄판결을 내림은 서로 반의어로 사용됩니다(막 16:16). 그러면 구원하는 것의 동의어는 무죄판결이 내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정에 설 때 무죄판결을 내리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말은 유죄판결, 죄가 있다고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죄가 있다고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유죄판결을 받고 죄인으로 영원히 멸망할 자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요 12:47).
주의 이름을 호소하는 모든 사람은 구원함을 받을 것입니다(행 2:21). 우리는 이 꼬부라진 세대에서 구원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행 2:40).
아무 다른 이 안에 구원이 있지 아니하니, 구원되어야 하는 바에 주어진 다른 이름이 있지 아니함입니다(행 4:12). 주 예수 위에 믿는 사람과 그의 집은 구원함을 받을 것입니다(행 16:31).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부활을 믿으면 구원함을 받습니다(롬 10:9).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자들을 구원하시러 구원자를 보내 주신 것인데,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의 구주”라고 말하였습니다(룩 1:47). 주의 천사는 “구주”께서 낳음을 받으신 소식을 전합니다(룩 2:11).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주”이시며(요 4:42),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 예수님의 영광의 나타날 것을 기다립니다(딛 2:13). 사도 베드로도 예수 크리스트를 “구주”라고 하였습니다(벧후 1:1, 3:18). 신약성경에 하나님 또는 크리스트께서 “구주”로 언급되었습니다(유 25).
“구원”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앞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만듭니다. “구원”은 아름다우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듭니다. “구원”은 아름다우신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습니다(룩 1:69). 그가 영원에서부터 그의 성별(聖別)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구원을 말씀하심에 따라서입니다(룩 1:70-71).
예수 크리스트를 제외하고 다른 아무 이 안에 그 구원이 있지 않으니, 이는 그 하늘 아래 다른 이름이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행 4:12).
“구원”은 온갖 종류의 악으로부터 구조됨을 묘사하는 데 쓰인 말인데, 본문의 “구원”은 끝의 날에 완결되는 최후 심판에서 받는 구원입니다.3)
한글 개역 성경은 “구원을 주시는”이라고 높임말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렇게 번역하는 때 이것은 “하나님”을 수식한다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수식하지 아니하고 “능력”을 수식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구원을 주는”으로 고쳐서 번역하든지 다르게 번역하여야 하며 복음은 구원을 주는 능력인데, 이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위한(for)4)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끄는(leading to)5)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일으키는(bringing about)6)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일으키는 효과(effect)를 지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일으키며 구원에 인도하며 구원을 위한(for) 목적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로 함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을 일으키는 효력을 지닌 능력인 복음이 필요한 것이고,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to everyone who believes)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믿는 자에게 그와 같습니다. 구원에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며,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가 없이 구원에 이끄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믿는 사람이라면 예외가 없이 “모든 자에게” 구원을 일으킵니다. 유대인에게 첫째로(first)이고, 그리스인(the Greek)에게도 그러합니다.
사람에게 믿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파울은 분명하게 언급합니다.7) 하나님의 “구원 안으로 능력”의 혜택을 “믿는 모든 자”가 누리게 됩니다. 유대인도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유대인이라고 예외가 있거나 그리스인이라고 예외가 적용되지 않으며 복음은 믿는 사람이라면 예외가 없이 “모든 자에게” 구원을 일으킵니다.
“믿는”이라는 것은 “믿은”이라는 과거시제가 아니고 현재시제입니다. 믿는 것은 회심 때에 믿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현재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과거에 믿음을 고백한 자를 구원에 이끄는 능력인 것이 아니며 믿음을 고백하였어도 현재 믿고 있지 아니하는 자는 배교자일 뿐입니다. 믿음에서 돌아서서 변절한 사람일 뿐입니다. 믿음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믿는”, 현재진행형. 지금 믿고 있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파울은 이 구원의 능력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진정한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부자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파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파울은 복음을 문화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8)
그는 당시 문화에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원색적인 복음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저기 순수한 복음, 순복음, 그것은 순복음이 아니라 가짜 복음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똑같은 소원을 두고 삽니다.
그것은 참 복음이 아니며 참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왕국, 곧 그 왕 되심이 “복음”입니다.
예배 시간에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말씀을 안 듣고 조니까 ‘예배 시간에 제발 좀 예화 좀 많이 해 주세요’, 그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화 잘 듣고 실컷 집에 돌아가면 성경 말씀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예화 들었던 것, 목사님이 말해 준 재밌는 예화만 기억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예화 듣고 즐거워서 ‘목사님 설교 잘하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을 전해야지 진정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의 내용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및 파울의 복음은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9)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믿고 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사랑만 이야기하고 하나님 공의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의, 올바름,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셔야죠! 공의가 무엇입니까?
죄인을 “죄인”이라고 판결 내리고 의인을 “의인”이라고 판결 내려야만 이것이 바로 공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 죄인은 죄인이라고 징벌하시는 하나님, 의인은 의인이라고 상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를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화를 내시고 성을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면서 사랑의 하나님만을 전도하고 공의의 하나님을 안 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심판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고 죄인들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만약에 지옥과 천국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고 하나님이 있으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지옥, 하나님의 징벌, 지옥 이런 것을 먼저 말하는 때, ‘나는 죄인이구나!’라면서 나를 구원해 줄 구원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공의, 이런 것을 말해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이런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福音)”의 뜻이 무엇입니까?
“복(福)”, “복되다”, “음(音)”. “음성”, “소리”, “소식”, “복된 소식”이며, “좋은 소식”, “복음”이라는 것은 “좋은 소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복음이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 죄인인데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 있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이 복음 안에 나타나게 된 것, 이것이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동시대인들이 고귀한 진리로 믿고 있는 것들과 충돌합니다.10) 복음을 믿는 자는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믿는 자입니다.
복음은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진리로 믿고 있는 내용과 반대이며 같은 시대의 사람들의 가치관과 반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로 믿고 있는 길을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걷습니다. 그 길은 넓은 길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만, 멸망 안으로 들어갑니다. 복음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과 반대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복음의 가치관은 충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복음과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르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 탈근대주의의 사상으로 살아가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 틀은 나와 너, 모두가 옳다는 상대주의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상대주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명제를 확신하는 문화에 살아갑니다.11)
이렇게 생각할 때 이것이 진리이고 저렇게 생각할 때 저것이 진리이고 이 환경에서 이것이 진리이고 저 환경에서는 저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것이 진리가 될 수도 있고 진리가 아닐 수도 있고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이 옳다고 하면 이렇게 살아가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가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이라는 상대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고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인 진리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 마음대로 살면 되는 거지, 내가 나라에서 정한 법, 민법, 형법, 그런 것들만 잘 지키면서 살면 되고 그 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살아가면서 내 인생에 내가 자유롭게 내가 나의 인생에 왕이 되어서 살아가는 거지’, 이게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율성을 주장하는 대신 믿어 하나님께 복종할 것을 요청하며, 복음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비논리적인 주장을 거부하게 만듭니다.12)
복음은 왕이신 하나님께 복종하며 사는 삶을 믿는 자에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5절에 “믿음의 순종”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울은 이러한 “믿음의 순종”을 위해 사도의 신분을 받았습니다(롬 1:5).
복음을 믿는 것은 세상 사람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며 많은 사람이 저쪽을 선택하나 우리는 이쪽을 선택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이며 예수님만을 유일한 길로 믿습니다.13) 이것 아니면 다 틀렸어, 이것이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은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사람이 부처를 믿든, 석가모니를 믿든, 마리아를 믿든, 마호메트를 믿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가든지 서쪽으로 가든지 남쪽으로 가든지 북쪽으로 가든지, 어느 길로 올라가든지 산꼭대기에만 올라가면 되는 거지’라고 말합니다.
‘왜 기독교만 믿으라 하고 왜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왜 배타적이야?’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기독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직 “예수”라는 한 이름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시니, 우리는 “오직 예수”만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행 4:12).
‘예수님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해요, 돈, 쾌락, 권력도 사랑해요’라며, 한쪽 발은 예수님께 딱 걸쳐 있고 다른 한쪽 발은 돈에 딱 걸쳐 있는 것,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쥐가 머리를 내밀고 나갈까 말까를 망설이듯 우유부단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한자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수서양단(首鼠兩端)”이라고 합니다. “머리 수(首)”, “쥐 서(鼠)”, “두 량(兩)”, “바를 단(端)” 자가 쓰였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 “언제까지 나누어진 의견 사이에 절름거리느냐 만일 야훼께서 하나님이시면 너희가 그의 뒤에 가고(follow) 만일 바알이면 그의 뒤에 가라”고 수서양단을 벗어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말하였기를, ‘너희가 수서양단을 벗어나서 하나를 선택하라, 나누어진 의견, 이쪽 의견이냐 저쪽 의견이냐? 너희가 절름거리지 말라.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너희가 섬길 한쪽을 선택하라’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며, ‘너 언제까지 하나님과 세상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절름거릴 것이냐? 하나님을 진짜 믿는다면 하나님을 선택해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살든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지 둘 사이에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를 “아동”이라고 그러고 아동이 읽는 책을 “동화”라고 말하는데 동화책에 보면 “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왕국에 새 옷을 좋아하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임금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왕실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재봉사가 임금님을 만난 자리에서 좋은 옷을 지어 주겠다고 하였으나, 이들이 지어 준 옷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옷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옷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이 옷을 입고 행진하자 사람들은 처음에 임금님을 칭송하며 본인들도 덩달아 바보 소리를 듣고 싶지 아니하여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행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무리 가운데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는 정직하고 자기가 보는 것을 거짓이 없이 그대로 말하잖아요. 한 어린아이가 "왕이 벌거벗었어, 왕이 벌거벗었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이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그 왕이 벌거벗고 있다는 실체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모른 체하였어도 벌거벗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이렇게 모두 다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상태로 사는데 벌거벗은 상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영(靈)이 벌거벗은 상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상태로 살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이며 영원히 지옥으로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흰옷들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 “부하기 위해 정련한 금 조각을 사게 권하고 너의 그 벌거벗음의 부끄러움이 나타냄을 받지 아니하기 위해 흰옷들과 보기 위해 너의 눈을 바르기에 안약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벌거벗은 자기 때문에 흰옷을 사서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고 자기의 수치를 가린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은 더러운 옷, 거지의 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며, 사람은 자신의 더러운 옷을 빨아야 합니다(사 64:6).
어디에 빨아야 합니까? 어린양, 예수님의 피에 깨끗이 빨아야 합니다. 죄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씻어서 깨끗하게 된 흰옷을 입어야만 흰옷 입은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영적인 상태가 어떻습니까?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하여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영원한 지옥에 들어갑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면서 교제하면서 살아갔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아담을 감싸고 있던 하얀색 빛나는 옷, 영광의 옷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담은 자기가 벌거벗은 상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상태는 아담의 자손들은 다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어린양의 가죽옷을 입을 때 천국에 들어갑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의로움의 옷을 입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벌거벗었으며 벌거벗음을 가릴 옷이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벌거벗음을 가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 즉 “좋은 소식”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으로 옷을 입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가죽옷이 영적인 벌거벗음을 가릴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이 마치 벌거숭이 임금과 같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복음은 예수 크리스트의 주권에 복종하여야 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14)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를 전도하는데 유대인들에게 “장애물”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함”입니다(고전 1:23).
복음을 전도하면 반응은 ‘듣기 좋은 소식이네요’라고 반응하지 않는데 유대인의 반응은 이 복음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유대인은 정치적으로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대하는 삶을 산 까닭입니다. 복음은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내용이니 걸림돌이 됩니다.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이방인은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시아 왕이 33년 동안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소’라고 말하면 ‘그러한 미련한 소리 하지 마시오, 그게 무슨 복음이냐’라고 반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걸림돌 같고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이 십자가의 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고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하고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전하지 말라고 하며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자꾸 전하면 가족들도 미워하고 전하면 세상 사람들이 박해하게 됩니다.
정치가들은 그 사람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칼로 죽이기도 하고 그러며 그러므로 야고보는 칼에 맞아서 죽었고 사도 파울은 목이 잘려서 죽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믿는다고 믿음 지키다가 산채로 불에 타서 죽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르기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순복음 같은 가짜 복음을 전하니까 거기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원래 자연적인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한 사람들은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에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파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였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우리의 가족들, 친척들에게 구원영생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전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가 다 됩시다!
1)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 B. Eerdmans, 1996), 33. 『NICNT 로마서』, 손주철 옮김 (서울: 솔로몬, 2012), 108.
2) D. M.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318.
3) Moo, 『NICNT 로마서』, 112.
4) NASB, RSV, NIV.
5)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66.
6) James D. G. Dunn, Romans 1-8, WBC 38A (Nashville: Thomas Nelson, 1988), 39.
7) Moo, 『NICNT 로마서』, 113.
8) Paul Washer,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조계광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3), 63.
9) Washer,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64.
10) Washer,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70.
11) Washer,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71.
12) Washer,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72.
13) Washer,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73.
14) Washer, 『복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