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꽃에 관한 시
차례
오동꽃 / 권달웅
오동꽃 / 도종환
오동꽃 / 이홍섭
오동꽃 / 김준태
오동꽃 / 송수권
오동꽃 / 송수권
梧桐꽃 / 장석남
오동꽃을 보며 / 류재봉
오동꽃 저녁 / 박기섭
그 후, 오동꽃 피다 / 정일근
초록물결 사이 드문드문 비치는 보랏빛 오동꽃 보며 / 이규리
오동꽃 / 권달웅
저물 무렵
먼 길 걸어 친정 온 딸을
맨발로 뛰어나가
껴안고 우는 어머니의 가슴에
피어나는 연보라빛 꽃.
말 못하는 꽃.
산그늘 같은 꽃.
- 권달웅,『감처럼』(모아드림, 2003)
오동꽃 / 도종환
오동나무 그늘에 앉아 술 한 잔을 마시다
달은 막 앞산을 넘어가려 하는데
오동꽃 떨어져 술잔에 잠기다
짙은 오동꽃 향기만
향내 사라진 지 오래인 이내 몸을
한 바퀴 휘돌다 강으로 가다
물고기에나 주어 버릴 상한 몸을
한두 번 훑어 보다 강으로 가다
- 도종환,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1994)
오동꽃 / 이홍섭
오동꽃이 왔다
텅 빈 눈 속에
이 세상 울음을 다 듣는다는 관음보살처럼
그 슬픈 천 개의 손처럼
가지마다 촛대를 받치고 섰는 오동나무
오랜 시간 이 신전 밑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불을 붙인 적 없었으니
사방으로 날아가는 장작처럼
그 덧없는 도끼질처럼
나는 바다로, 깊은 산속으로 떠돌았다
내 울음을 내가 들을 수는 없는 일
自己를 붙잡고 운 뒤에야
울음이 제 몸을 텅 텅 비우고 난 뒤에야
쇠북처럼 울음은 비로소 가두어지고
먼 곳에서 오동꽃이 왔다
갸륵한 신전이 불을 밝혔으니
너는 오래오래 울리라
- 이홍섭,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세계사, 2005)
오동꽃 / 김준태
오동꽃 피면 어어라
오동나무에 오동꽃 피면 어어라
서울로 간 망태어멈 그립네
새벽부터 밤중까지 재봉틀 돌리는
구로공단 수출업체 내 고향 친구
겨울 가고 봄이 와도 꽃 한번 못 보고
오늘도 시름 벗삼아 올빼미일이네
젊어서 황소 남편 저승 논밭에 빼앗기고
서울이라 월세랑 타향이라 전세방 돌며
잘 있는지…… 새끼들 안 굶기며 잘 사는지
제비야, 오동꽃 피면 어어라
종달새야, 오동꽃 저러이 피면 어어라
삼수갑산 가더라도 환장하게 달려드는
아 임신년 유월 열하룻날의 오동꽃 향기!
- 김준태,『꽃이, 이제 地上과 하늘을』(창작과비평사, 1994)
오동꽃 / 송수권
보아라
오월 한낮은 남도의 담장머리에
뚝뚝 지는 오동꽃
포름한 이 서러운 빛깔들
어려서는
누님에게론 듯 어머니에게론 듯
마구 쓸어모아 수를 띄우고
열두 골 병풍 속
봉황도 깃을 치게 하고 싶더니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스스로 잘못 살아온 죄
내 가슴 속 우뢰로 몰려와
마른번개로 때리나니
- 송수권,『아도』(창작과비평사, 1985)
오동꽃 / 송수권
아슴아슴 대낮의 담장 위에 오동꽃
지는 것 보니
죽은 龍來 생각난다.
발등에 지는 느리고 더딘 遠雷
함부로 怒한 일 뉘우쳐진다던
龍來 생각난다.
지난해 겨울
교통사고로 시름시름 앓아눕던 病床에서
마지막 날아온 한 장의 편지.
멀리 구름이 흐르는 곳
光州이겠지요.
형의 첫 詩集
우리 벗 홍재도 저승에서 보믄
눈물 글썽이리다
山門에 희끗희끗 가랑잎처럼 스치는 눈발
저 廢寺의
금간 저녁 종소리.
지금도 눈에 지는 오동꽃 색깔 선하다
삐딱한 몸매에
술에 찌드러진 龍來를 들쳐업고
청계천 다리목을 건너며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던 홍재.
그의 등판에서 무어라고 이따금 홀짝이다
잠이 들었을 龍來
5월 한낮에 오동꽃 지는 것 보니
발등에 지는 느리고 더딘 遠雷
함부로 怒한 일 뉘우쳐진다던
죽은 龍來 생각난다.
- 송수권,『꿈꾸는 섬』(문학과지성사, 1983)
梧桐꽃 / 장석남
다른 때는 아니고,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한참만에 고개를 들면 거기에 梧桐꽃이 피었다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도 없다고, 어떡하면 좋은가…… 그런 평화로움으로 고개를 들면 보라 보라 보라
梧桐꽃은 피었다 오오
무엇을 펼쳐서 이 꽃들을 받을 것인가
- 장석남,『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1)
오동꽃을 보며 / 류재봉
열두 살에 삭발하고
산곡을 넘어가는
애련한 동자승이 보인다.
마지막 하늘에 속세를 던지고
서러운 눈물 가득 흘렸지
이제는 간지럽게 붙잡던
인연의 끈 툭툭 끊고
동그마니 있다.
동자승이 고적(孤寂)을 버릇으로 익히고
돌아볼 것 없다 생각하니
눈물이 마르고 있다.
- 류재봉,『여행자의 지도』(문경출판사, 2006)
오동꽃 저녁 / 박기섭
너의 무릎을 베고
저무는 봄날이었으면
누른 국수에
날감자를 구워 놓고
아픈 데 아픈 데도 없이
그냥 그렇게 나른한
또 그런 봄날이었으면
너는 그예 나를 낳고
창밖에 남아 부신
뻐꾸기 소리나 듣는
다저녁 숭늉 그릇에
오동꽃이나 보는
- 박기섭,『오동꽃을 보며』(도서출판 황금알, 2020)
그 후, 오동꽃 피다 / 정일근
불현듯 너 떠났다 슬픔에 내 살 녹아
내 살 속의 뼈가 뼛속의 피가 녹아
나는 붉은 피로 남았다
내 슬픔 그 피에 녹고 또 녹아
눈물도 붉디붉은 피눈물만 남았다
지난여름부터 붉은 슬픔
붉은 피눈물 받아준 오동나무
그 독까지 다 받아준 오동나무
오늘 보랏빛 꽃 피웠다
더러는 누런 추억이 등 뒤로 찾아와서
귓불 간질이는 낡은 휘파람 불었다
운명이 내 등짝 짝 소리 나게 치고 갈 때
돌아보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울었다
시를 쓰지 못하고 버려진 백지 위에
뚝, 뚝 떨어진 피눈물 스스로 길을 내고
그 길 따라 강물처럼 흘러갔다, 끝내
바다에 닿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온 새벽
돌아보니 오동꽃 피었다
벽오동 / 박철
훗날 누가 나를 일컬어 말한다면
그는 단지 그냥 거기 있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머리 짙푸른 잎새로 담장 밖에 서서
거기 있을 뿐이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맵찬 바람과 나눈 귓속말도 시가 된다면
그는 시대를 외면한 채
다만 그렇게 시를 쓰며 서 있었노라
베어져 농짝 하나 되기 힘든 굽은 벽오동
그 옛날 딸 낳으면 혼수 삼아 심었다는 푸른 벽오동
이름도 잊혀진 세월에 그는 섰다가
뿌리를 흔들지 못한 채 다만 소리 소문 없이
어느날 베어졌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 박철,『험준한 사랑』(창비, 2005)
碧梧桐 / 박라연
질 좋은 목재이면서 너는 또
부처가 오셨다는 이 계절에
보랏빛 꽃등을 공중 가득히 달아올리면
기품 있는 향기를 뿜어올리면
늙어도 껍질의 푸른빛이 그대로이면
그리하면서 수년을 어여쁘게 어여쁘게 살으면……
나는 그저 마른침만 삼킨다.
- 박라연,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문학과지성사, 1996)
벽오동 2 / 윤재철
멀쩡한 집을 때려부수고
빌라를 짓고 오피스텔을 짓는 서교동 골목길
어떻게 용케 살아남은 벽오동 한그루
담 모퉁이 안쪽 옹색하게 서서
담벼락 위에 꽂힌 쇠꼬챙이에 찔리며
가지는 얼마쯤 전깃줄에 걸쳤지만
그래도 제 빛깔로 푸른 벽오동
한여름에는 넓적하고 푸른 잎새로
더러 빗방울 소리도 들려주고
눈도 시원하게 해주더니
이 겨울에는
열매를 싸고 있던 껍질이
채 지지 못하고 잎사귀처럼 남아
바람 부는 날이면 솨르르 솨르르
바람 소리로 나를 잠재우고
새벽이면 잠 속으로 걸어 들어와
내 우울한 꿈을 깨운다
어쩌면 말라붙은 내 꿈의 우물가
아직도 깊은 물줄기 찾아
뿌리를 적시며 푸르게 서 있는
벽 오 동
- 윤재철,『세상에 새로 온 꽃』(창비, 2004)
벽오동의 上部 / 나희덕
나는 어제의 풍경을 꺼내 다시 씹기 시작한다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앞비탈에 자라는 벽오동을 잘 볼 수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동꽃 사이로 벌들이 들락거리더니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꽃이 나무를 버린 것인지 나무가
꽃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꽃을 잃고 난 직후의 벽오동의 표정을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또다른 발견이다
꽃이 마악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일곱살 계집애의 젖망울 같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매일 꼭꼭 씹어서 키우고 있다
누구도 꽃을 잃고 완고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6층에 와서 벽오동의 上部를 보며 배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칠고 딱딱한 열매도
저토록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씨방이 닫혀버린 벽오동의 열매 사이로
말벌 몇 마리가 찾아들곤 하는 것도
그 금빛에 이끌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 눈 어두운 말벌들은 모르리라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내 어금니에 물린 검은 씨가 어떻게 완고해지는가를
- 나희덕,『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2001)
벽오동 심은 뜻은 / 임보
한 만 평쯤 되는 땅을 마련해
한 만 그루쯤 오동을 심고 싶다
잎과 몸통이 온통 푸른 벽오동
곧고 맑은 벽오동 밭을 일구고 싶다
그 오동들이 자라 황록색 꽃들을 피우고
그 꽃들이 익어 열매를 매달게 되면
당대의 명인을 불러 거문고를 울려
천하의 봉황들을 다 모으고 싶다
달빛을 타고 날아오는 봉황들의 나래 소리
별빛에 반짝이는 황금의 오동 열매
한 달포쯤 그 열매들을 먹여 살이 오르면
방방곡곡에 그 봉황들을 띄워 보내고 싶다
우선 얼어붙은 북녘 들판으로부터 시작해
아프리카며 중동 시끄러운 땅들에 날려 보내리
날아간 봉황들의 뒷심*으로 벽오동을 심어
푸르고 푸른 벽오동 세상을 펼쳐 보고 싶다
* 뒷심: ‘변(便)의 힘’이란 뜻으로 사용해 보았음
- 임보,『벽오동 심은 까닭』(시학, 2017)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처음 강을 건너갈 때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깊이가 내 눈의 깊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수심이 얼마나 되든 끝까지 가본 자만이
가장 늦게 돌아온다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 강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늙은 벽오동 한 그루가 살고 있었다.
가지 위에는 일생 동안
부화할 때와 죽을 때만 무릎을 꺾는다는
백조 한 마리가 살며
생채기마다 부지런히 단청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허기지도록 적막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또 백조가 왜 벽오동을 떠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삶의 무게가 조금씩 수심에 가까워질수록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을 내 여생의 무늬가
강 가장자리로 퍼져나가며 단청이라도 한다면
내 비록 끝내 바닥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백조처럼 기꺼이 두 번 무릎을 꺾을 수는 있겠지.
- 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2021)
[출처] 시 모음 921. 「벽오동」|작성자 느티나무
사람의 슬픔은 풍화하는 것이다
더 아픈 주검도 풍화하는 것이다
바람이 나를 깨끗이 씻어
보랏빛 오동꽃으로 활짝
활짝 피웠다
- 정일근,『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9)
초록물결 사이 드문드문 비치는 보랏빛 오동꽃 보며 / 이규리
라고, 그가 문자메세지를 보내 왔다
상행선 기차, 검진하러 가는 길
미친 복사꽃 지나
오동꽃 문드러지는 한나절 타고
짓이긴 꽃물 구성지게 번진 한 판 세월
본 떠 놓은 간(肝), 울긋불긋한 간(肝)
한 달에 한 번
꽃잎 같은 년, 다녀간 뒷자리 어지러이
그거 판독하러 가는 길
판판이 기죽는 일
내 다 안다
별유천지에 모다 아프다 아프다 하는 것들
저리 붉고 어여쁜 입술들
꽃불에 닿은 자리라는 걸
- 이규리,『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
[출처] 시 모음 922. 「오동꽃」|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