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僉知中樞府事景巖公墓碑文 - 諱顥承 公諱顥承字晦而初諱應虎姓李氏其先永川人麗季軍器少尹諱軒始移居于禮安之汾川是爲公六世 祖高祖諱孝孫通禮門奉禮贈吏曹參判曾祖諱欽麟蹄縣監贈議政府左參贊祖諱賢輔崇政知事諡孝 節世稱聾巖先生考諱季樑居昌縣監妣淑人安東金氏玉堅之女繼妣淑人新寧朴氏參奉守謙之女交 河盧氏潤仝之女公生以嘉靖辛丑自號景巖壬子參白髮會于浮羅院以壽除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己巳卒享年八十九葬在陶山下箭谷鶴膝形負辛原配淑夫人英陽南氏內禁衛應箕之女訓導稑之孫 己未生丁巳卒墓合封有一子曰芸龍蛇亂奉陶山位板自淸凉轉至紹修院亂定後還安丁酉赴火旺陣 劃贊戎謨薦除軍資主簿以下不可殫錄嗚呼公之世已三百有餘歲而顯刻之役始於今日者當初形家 所謂云云之穴故也後孫在述在衡等欲於階下數武許別設儀物表厥神道或未爲不可者歟謁余而具 告其事因請繫牲之文顧晩生無似年迫業楡神思耗荒固不敢形容說出於曠世之下而時則我家亭午 之會也官業詩禮亦足以震耀一世公又壽考維祺上有賢兄下有肖子宜其有飭身修謹厚德表率之行 治者而往事如雲無得以稱之何敢冒昧妄撰以犯不韙之科哉謹錄其世系子孫如右以塞慈孫之請且 以寓同室追慕之私云爾 戊午淸和節癸酉從後孫龍九謹撰
첨지중추부사 경암공 묘비문 - 휘 호승 공의 이름은 호승(顥承)이고 자는 회이(晦而)이고 처음 이름은 응호(應虎)이고 성은 이씨(李氏)이고 선조는 영천인(永川人)이다. 고려 말에 군기시 소윤을 지낸 휘 헌(軒)이 예안의 부내에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는데 이 분이 공의 六대조이다. 고조부 휘 효손(孝孫)은 통례문 봉례를 지냈고 증직이 이조참판이고, 증조부 휘 흠(欽)은 인제 현감을 지냈고 증직이 의정부 좌참찬이고, 조부 휘 현보(賢輔)는 숭정대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효절(孝節)이고 사람들이 농암(聾巖)선생이라 부른다. 아버지 휘 계량(季樑)은 거창현감을 지냈고 어머니 숙인(淑人)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옥견(玉堅)의 따님이고 계모 숙인(淑人) 신녕 박씨(新寧朴氏)는 참봉 수겸(守謙)의 따님이고, 또 교하 노씨(交河盧氏)는 윤동(潤仝)의 따님이다. 공은 신축년(중종三十六 一五四一년)에 출생했고 자호는 경암(景巖)이다. 임자년(광해군四 一六一二년)에 부라원(浮羅院)에서 백발회에 참여했고, 수직으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했다. 기사년(인조七 一六二九년)에 돌아가니 향년 八十九세이고, 도산 하전곡 학다리형국의 신좌의 언덕에 안장했다. 배위 숙부인(淑夫人)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내금위에서 벼슬한 응기(應箕)의 따님으로 훈도 육(稑)의 손녀이고 기미년(명종十四 一五五九년)에 출생하여 정사년 (광해군九 一六一七년)에 돌아갔고 묘소는 합봉이다. 아들 운(芸)은 임진왜란에 도산의 위판을 받들어 청량산을 거쳐서 전전하다가 소수서원에 이르렀고, 난리가 안정된 후에 돌아와 봉안했고 정유재란에 화왕성(火旺城) 진지에 가서 군사의 작전 계획을 도왔고, 군자감 주부를 제수했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세대가 이미 삼백여년이 지났는데 묘비를 세우는 일이 오늘에야 시작 되는 것은 당초에 가사형편과 어떠한 혈(穴)이라고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후손 재술(在述) 재형(在衡) 등이 묘소 아래 몇 걸음 떨어져서 석물을 별도로 설치하여 신도(神道)를 표시하려 하는데 혹시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나에게 와서 그 일을 자세히 알리고 묘비의 글을 청하는데 회고하니 늙은이가 젊은이 같을 수 없고 죽을 날이 가까워서 정신과 생각이 흐릿하여 참으로 밝은 세상 아래에서 감히 형용과 설명이 나오지 않는구나 이때는 우리 집의 정오회(亭午會)였다.
과거공부와 시례(詩禮-부모의 가르침으로 깨우침) 또한 한 세대를 충분히 진동하며 빛났고, 공이 또 오래 살고 복을 지탱하여 위로는 어진 부형이 있고, 아래로는 본받은 아들이 있어 마땅히 삼가하며 심신을 수련하고, 삼가하며 덕을 두터이 하고, 드러내는 행동을 다스렸으며 지나간 일은 구름 같아서 얻을 것이 없다고 했으니 어찌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허망하게 글을 지었으니 옳은 이력을 범하는 것이나 아닐까? 삼가 세계(世系)와 자손을 오른편과 같이 기록하여 자손의 청에 막음하고 또 일가로서 사사로이 추모하여 이른다.
一九七八년 (무오) 四월 초하루 계유일에 종후손 용구는 삼가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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