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소멸 지점과 언어의 표정 -김완 시집 《바닷속에는 별들이 산다》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한 시대의 마감은 사회 현상을 담론으로 규정하며 특징을 확정하곤 한다. 그보다는 덜 하겠지만, 시인에게 있어 시집의 출간은 시적 결단을 요구하는 심리적 포화로 이룬 기존의 생각들을 문학적으로 매듭짓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시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경향이 일반적이다. 특히 현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찰적 상상력은 침묵을 넘어 부조리한 사건에도 거침없이 발현한다. 그 방편의 문학적 참여를 통해 삶을 관통하는 사상적 시위를 표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식 속 저항적 사유들의 발화는 견고하여 사회 인식의 전말을 변화시키겠다는 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아쉽게도 개별적인 문학적 역량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극히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몇 편의 시로 방향성을 강력하게 구현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좌절적 난감함에서 오는 무력감을 예외로 한다 해도 문학적 행위를 쉽게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는다. 공존하는 일상에서 불편한 시선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이방인처럼 모든 것들과 낯선 것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 시인이 갖는 문학 정신의 전반全般을 관류하는 양심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시인이 점유하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사건에서 비롯되고 부단한 현재를 경유하며 진전된 미래를 긍정의 시선으로 응시하겠다는 의지에 있다. 그렇기에 긴장한 시선으로 문학적 좌표를 수시로 확인하게 된다. 경로상의 일탈된 문제들을 점검하면서 외면하거나 우회할 수 없다는 일관된 방향성으로 나아간다. 그런 것마저 시를 쓰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관심은 시를 쓰기 위한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노력으로 축적된 좌표들의 촘촘한 서사와 고뇌에 찬 체험적 서정을 문장으로 상징화한 것들의 집합이 시라는 실체로 드러난다. <시인의 말>에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자조와 “괴물같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자괴감을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란 없”는 것이라고 강한 반감으로 맞서고 있다.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고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시적 언술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인간 본성을 야멸차게 견인하려는 데 있다. 세 번째 시집 《바닷속에는 별들이 산다》에 내재된 시적 편린들의 아우라를 포괄하고 있다. 그 지점은 생각만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김완 시인은 의사라는 관점에서 병인病因을 진단하는 행위마저 자유롭지 못한 세상을 질타한다. 그 원인은 자기중심적 사고로 살아가는 사회풍조에서 비롯되었다. <도가니 법이라니>라는 시에서 20대 여성 환자와의 에피소드 같은 아이러니가 그렇다. ‘선천성 심실증격결손증’을 앓고 있는 환자의 느닷없는 “선생님 내 것 다 보았지요?”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의사에게 “선생님, 너무 작지요? 수술해야겠지요?”라며 이어지는 아리송한 질문에 당황해하는데 “유방확대 수술 말이에요?”라고 답해주는 환자와의 대화 중 도가니법에 꼼짝없이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 사회 통념과 인간 경시 풍조가 일반화되어 버린 현실과 문제점을 환기한다.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과 맛깔나는 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지고 알싸한 고향 바다 냄새를 토하며 한여름 허기를 달래주던 깡다리집도 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주던 간판 없는 작은 식당도 사라졌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부분
시인에게 있어 소구력訴求力으로 작용하는 시의 발현 지점은 중요한 문학적 바탕이 된다. 그 지점은 일상에서 사람끼리 부대끼며 살아가는 소소한 이웃들을 따뜻한 온정으로 바라본다는 데서 출발한다. 사회에서 익명의 누군가가 아닌 꼭 존재해야 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발산하는 온기를 삶의 긍정으로 바라본다. 대가에 대한 화폐 지불을 통해 교환된 “된장찌개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과 “한여름 허기를 달래주던 깡다리집” 그리고 “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주던/ 간판 없는 작은 식당”이 시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위안처였기 때문이다. ‘단골집’ 할머니로부터 각박한 세태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한 인정과 가족애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마지막 시행에서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사소한 위안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동네 식당에 드나들던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것”의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보기 좋게 잘 포장된 상품화된 맛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슬픈 것이다. 표준화된 식재료로 정량화된 것은 물론이고 온정 없이 만들어진 ‘상품’들이 맛있을 리 없다. 잘 포장된 ‘백반’에는 허기진 뱃속을 생각하며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처럼 알싸한 어머니의 마음이 배어있는 기막힌 국물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단골집이 없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하게 먹는 것에 한정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급속한 변화 속에서 인간적 관계가 각박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짙다. 소소한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언제나 진지하다. 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람 사는 모습들을 온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곧 시인의 평상심이기 때문이다. 은적隱迹이란 말의 어원부터 존재에 대한 은밀스러움을 더해준다. 거기에 종교적 신비까지 깃들어 있는 <은적사隱迹寺>는 과거 천년의 불국토를 지향한 사찰로 몇 곳은 더 있을 것 같은 익숙한 절 이름이다. 역사적 이유로 산속에 숨어든 사찰 그 자체가 외부에 대한 경계심을 더해준다. 신성한 불법을 수행하는 종속도 사람인지라 사람 사는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부처의 정신이 사람 사는 길을 따라 이뤄진 각성의 정신이니 시인도 팍팍한 현실을 떠나 그곳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 여정을 보여주는 “햇볕 환하고 한적한 돌산 대로변/ 세밑의 버스 정류장에 촌로 몇 졸고 있다”는 그곳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천왕산 깊숙한 곳의 길목을 엄호하듯 처처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묵힌 나무들이 초병처럼 우거졌다. 삼엄한 틈을 비집고 출현한 “스님 한 분 괴춤을 움켜잡고 해우소 간다”는 모습은 속세俗世와 다른 것이 없다. 어차피 사람과 불가분의 관계로 존립할 수밖에 없는 종교도 사람이 중심임을 말해준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탐욕을 비운다는 것임을 각성케 한다. 시인도 스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며 ‘비운다’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행위 자체가 건강성을 통해 수행적 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은적사’라는 장소성이 특정한 종교적 의미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석벽과 우거진 노송/ 앞에 펼쳐진 바다가 어우러져 한 몸”처럼 이룬 삶의 한 부분임을 확인한다. <영취산 진달래>의 ‘영취산’은 ‘여수화학단지’에 꼼짝없이 갇힌 형국이다. 고래古來부터 유서 깊은 영취산의 수려한 풍경 속 진달래는 많은 사람을 찾아들게 했다. 물론 지금도 봄이면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예전 같지 못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사람들이 영취산을 찾아온 이유가 제마다 다르듯 “풍경에 취해 꽃들의 기억, 가물거린다/ 같은 추억이지만 서로 다른 의미의/ 퍼즐을 맞추려고 야단들이다 막걸리 잔에/ 진달래 꽃잎 띄워 아픈 사월을 마신다”며 나름 각각의 사연들을 갖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똑같은 환경에서도 살아온 내력만큼 개별적 사연을 안고 산다는 것을 말한다. 영취산을 바라보며 마음이 심란해진 것은 코앞에서 매연을 내뿜고 있는 ‘여수화학단지’의 악취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보다 더 억척스럽게 견뎌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영취산 진달래’의 암울한 전망처럼 인간다운 삶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염려가 당장은 위안일 수 있다. <먼저 왔다간 손님에게>는 “영혼이 자유롭고 싶은 모든 젊은이들/ 비정규직, 시간당 최소 임금을/ 외치다가 지쳐 잠든 밤을 기억한다//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 교과서와 다른 세상의 절벽 앞에서/ 밤새 하얀 슬픔을 마시다가/ 그의 몸이 그만 받아주지 않은 것”의 상상력은 ‘누군가’ 토해놓은 배설물에서 출발한다. 토할 수밖에 없었을 ‘누군가’에 대한 연민이 사회 현상으로 대상화되면서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적 암담함을 가슴 아파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쉽게 무너지지 말라는 고언이 깃들어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소주는 영혼이라는 말>이 궤변 같지만, 때론 영혼을 치유하는 신비의 영약일 수 있다. 그 영약 같은 ‘소주’의 유래보다 먼저인 사람마다의 고유한 영혼은 ‘소주’로 치유해야 할 차원이 아니다. 하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합리적 현상들은 번번이 상처가 된다. 미래가 없는 세대들의 상처 받은 본성을 위로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소주’는 불모적 세계의 전형으로 “소주가 영혼이라는 말/ 잘 벼린 칼이 되어 내 심장의 정곡을 찌른다”며 속내를 여실히 보여준다.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된 「소주는 영혼이다」라는 문장이 현실에서 얼마나 큰 모순덩어리인가를 <술에 대한 단상>은 말해준다. 현대인에게 있어 술이 갖는 신앙적 의미는 현실에서 사람과의 사교를 위한 ‘수단’으로 마시는 보완재인 셈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영혼의 순수성으로 발인한 문장이 아닌 고달픈 삶의 소용돌이에서 삐져나온 “취함과 광기의 경계에서 문학은 태어난다고/ 술 깬 다음 날 자위하고는 하던 시절”처럼 소음 같은 문장으로 옮겨 적어야 하는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그 술로 인해 사람에게 상처를 입듯 이마와 입술을 베였다는 경험은 봉합할 수 없는 아픔이다. 만남의 자리에 있어야 할 ‘술’이 없으면 금방 관계가 단절되고 마는 불안한 현실은 ‘술’에 대한 의존성을 갖게 된다. 중독이란 것이 약물의 유효기간처럼 시간이 지나면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술이 한 겹 마취된 얇은 의식을 벗겨 내면/ 똬리를 틀고 있는 수많은 욕망과 허상들”에 대한 본성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의식과 신체로 반응하는 술이 임계치를 넘으며 혼수상태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에 반응하는 인간의 언어 행동도 마찬가라도 봐도 무방하다.
고흥군 외나로도 봉래면 상록수림 큰골이라 불리는 신금마을에 까마귀가 운다 가파른 산비탈 위의 무덤 한 기基 다음 생을 준비하는 흔적 여기저기 보인다 남아 있는 시간 빠르게 차오르는 밀물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세월 텅 빈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다 -<바닷속에는 별들이 산다> 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육지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구별해서 바라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요즘 육지와 섬을 잇는 획기적인 교량 건설로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섬이기 때문이다. ‘외나로도’도 변화된 환경의 수혜지인 셈이다. 아무리 접근성이 좋아졌다 해도 고흥반도 남단 끄트머리에 위치한 ‘외나로도’를 찾아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길을 따라가며 맞닥뜨린 바다와 점처럼 다가오는 섬의 풍광은 감회에 찬 것이다. 외나로도만의 ‘바다’가 갖는 언어의 무게는 해저를 품은 세월을 담았다. 그 섬에서 만난 인적은 살아 있는 사람이 먼저가 아닌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과 ‘세월’ 그리고 ‘분노’로 표출된 형상을 통해서였다. 그토록 소통을 갈망하던 사람들의 말소리는 풍파에 사그라지고 없다. 거친 파도와 바람소리가 무성음無聲音으로 퇴화해버린 풍경을 통해 삶의 흔적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한참을 가다 만난 섬사람의 적의敵意에 찬 “‘무엇하러 왔느냐’고 묻는 말꼬리가 사납다”라고 느껴지겠지만, 알고 보면 살가운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섬’이라는 환경에서 체화된 성정과 현실적인 피해의식이 더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해송 품은 ‘외나로도’만의 풍광이 오롯하게 보존된 바닷속 수심이 긴 세월에 더 깊어졌다. 그 안에서 빛나는 영혼으로 환생한 별들을 만난 것일까? “녹동항 식당에서 사라진 우리들의/ 은유와 상징은 누구에게 갔을까”라며 무성한 섬사람들의 언어를 상징한 별자리들을 찾아낸 것인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잊어버린 말(언어)의 형상은 어둠에서 빛이 되어준 사람들의 가슴에서 비롯되었다. 시차가 변화되면서 계절의 변곡점은 모든 것들을 예민하게 한다. 시인의 감성을 자극한 <입동>도 절기의 한순간으로 다가온 것이어서 놓칠 리 없다. 거기에 비까지 내리고 촉촉하게 젖어든 감수성의 감도는 고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계절의 변화마저 예측 불가한 시대처럼 “인간의 생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 이런 날은 산과 막걸리 좋아하던/ 고인된 상렬이 형이 떠오른다”며 그 사유의 중심에 사람이 있었다. 계절의 변곡점마다 이름 붙여 용케도 분별하길 좋아하는 절기의 지혜처럼 기억 속에 각인된 상렬이 형 때문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고향에 둥지를 튼 석구 형을 만나러 간다”는 심사가 왠지 우울하다. 그 친구들과 만나 지난 세월에 묻힐 뻔한 추억을 되살리며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한 없이 나눴을 것이다. 고향에도 “밤낮 없이 달려온 비루한 생을 다독이며/ 몇 개 남은 감나무에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는 ‘입동’의 하루가 어스름에 묻히고 있다. 시간의 더께에 묻힌 흔적들이 추억이 되듯 사연들이 덧칠되면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이 되고 만다.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치욕스러운 세월이 사실로 남아 역사를 증언하기도 한다. <거문도 ‘고도민박집’에서>의 ‘민박집’은 마침 “백 년 넘은 일본식 다다미방인 민박집 이 층”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과거와 현재를 묻는 역사적 상상력이 불거져 나왔을 것이다. 거문도라는 섬 자체를 먼바다에 더해진 아름다운 풍광으로만 보고 넘길 곳이 아니다. 열강의 진출이 극심해진 1885년 대한해협의 길목인 거문도는 군사적 요충지로 러시아 남하를 견제한다는 구실 아래 각축장이 되었다. 영국이 불법으로 2년을 넘게 점거했던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결국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제 병합으로 일본인이 상주하게 된다. 그래서 ‘다다미’라는 독특한 일본식 가옥이 거문도에 존재하게 된다. 파란의 역사 속 전말을 모를 리 없는 김완 시인의 고뇌도 깊었을 것이다. 과거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을 거문도의 아침 “오래된 향나무로 살아남은 거북이 할매”가 던진 인사말도 예사롭지 않아 귓가를 맴돈다. ‘오래된 향나무’를 보며 일본이 통치한 식민지 시절을 상상했을 것이다. 일본인이 상주하는 집단촌이나 관공서에 식재한 일본식 향나무(가이즈까 향나무)와 ‘거북이 할매’가 상징하는 상관성은 역사적 사실을 증언해준다. “‘도란 역사의 보편성이다’라는 어젯밤 공부가/ 어지러운 그림자로 흩어진다/ 언어란 본래 실체가 없는 그림자 같은 것/ 섬의 시간과 역사가 스미어 있는” 거문도의 다다미 민박집을 통해 김완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위의威儀에 대한 사유가 ‘오래된 섬’의 역사성에서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시인의 길은 곧 사유의 길이다. 그 길은 끝이 없어 멈출 수 없고 한시도 마음이 편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한다. 애써 찾아간 <봄, 백련사>도 다르지 않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백련사’를 찾아간 시인의 머릿속 화두는 ‘봄’이었을까? 봄을 빌어 그곳에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 모든 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법한 ‘백련사’ 사찰 처마 끝에 있을 법한 ‘풍경’이 없다는 처마 끝 ‘풍경’을 찾는 마음속 파문처럼 일렁이는 “범종각에서 고래 소리를 들었다는 시인을 생각한다/ 고개 드니 구강포에서 흘러든 강진만이 지척이다/ 먼 옛날 고래가 드나들던 곳이 절이 된 걸까”라며 존재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이미 실재했다는 전설 같은 신화는 기어이 부처를 모신 ‘절터’로 변주되고 현전現前으로 현시顯示된다. 법당 가는 길 주변에 혼곤하게 피고 지는 매화와 천리향도 마감하는 생을 건너느라 번뇌가 깊다지만, 이승을 유혹하는 향기가 더 질펀하다. 꽃샘추위를 견딘 동백꽃도 그렇거니와 “상처의 얼룩과 그늘이 얼굴에 남아 눈물에 닿”는 시간은 찰나여서 “봄, 백련사 동백꽃, 우주의 한순간이 저물”어 간다는 생명에 대한 보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색과 공이 구분되지 않듯 화두를 안은 담론을 쉽게 끝낼 수 없어 수행을 쫒는 결어는 멀기만 하다. 끝없이 길을 걸으며 깨달음에 이른 붓다를 따르듯 김완 시인의 행로는 쉼 없이 전개된다.
남여치에서 숫눈 밟으며 봉래산 오른다 두런거리며 뒤따라오는 산악회 사람들에게 앞자리를 내주고 그들 따라가는 가슴, 느긋하다 붉나무처럼 붉은 마음이기를 상상하며 겨울나무의 영혼을 더듬으며 따라간다 가파른 봉래곡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눈 쌓인 산길을 한 시간 반쯤 오르니 바람도 쉬어 가는 곳 쌍선봉에서 흘러내린 저만치 월명암 한 구미가 보인다 갑자기 세찬 바람과 성긴 눈발 휘날린다 반갑게 꼬리 치는 청삽사리 부부의 전생 전설 속 부설 거사와 묘화는 아닌지 궁금하다 개들에게 겨울나기 털옷을 입힌 마음 낯선 등산객에게 뜨거운 차 내주는 정 함박눈으로 변해 금세 암자가 눈으로 덮인다 뜨거운 차를 마시니 언 뫔, 봄눈처럼 녹는다 점심 공양을 부탁하니 흔쾌히 들어오라 한다 이것이 다순 사람들이 사는 세상, 오늘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온갖 울음들과 따뜻한 차 한잔 나누고 싶다 -<월명암> 전문
어차피 세계 인식이란 공간 속에서 공존하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해야 할 이유는 없다. 주체인 인간은 자율적인 의식으로 끊임없이 현상에 대한 사유를 거쳐 평상심으로 균형하려 한다. 시인이 살고 있는 도시 환경과 다른 곳으로의 여행은 내면에 잠재된 불편함과 일탈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음으로 찍은 행로의 좌표를 따라간다 해서 정신적인 만족이나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설령 원하는 마음만큼 해소될 수 없어도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심층 속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곳은 심산이나 외딴 암자가 제격이다. 내면에 쌓인 정신적 피로에 지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산악회원들과 함께 한다. ‘월명암’을 찾아가며 만난 풍경들은 수채화를 보는 듯 마음이 편안하다. 시인의 심상으로 유입된 풍경은 시적 주체와 교감하여 산만한 배열을 안정감으로 재구성해준다. 자연에서 천착한 대상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충동하여 시적 감성을 부활해준다. ‘붉나무’는 그에 상응하는 ‘붉은 마음’으로, ‘청삽사리’는 전설 속 ‘부설 거사와 묘화’로 확장 변주된다. 대상에 대한 상상으로 현시現示된 감각적 증강을 통해 혼융된 마음속 불편을 해소하게 된다. 시인은 개안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점심 공양 한 그릇으로도 “다순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더불어 잊어버린 사람의 온기를 되찾게 된다. 시인에게 있어 심리적 변화의 동인은 바로 현대인이 잊고 살아가는 마음속 ‘온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은 욕망은 완전하게 해소할 수 없는 것으로 해소될 수 있는 욕구와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각박한 사회라지만, 온정을 간직한 사람들의 ‘뫔’을 ‘월명암’에서 “점심 공양”으로 확인하게 된다. 마음을 교감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갈망하는 인식에 대한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로 충분하다. <이상한 계절>은 모든 것이 뒤틀려버린 현실을 상기시킨다. 조계산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본 불길한 “검은 나비들이 떼를 이룬 죽음이라니/ 진도 맹골수도에 수장된 어린 넋들”로 데자뷔 된다. 심리적 교란처럼 때마침 화사하게 피었다 지는 봄꽃마저 “참담한 생의 비의”를 품은 채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주가 정지”되어 버린 것이다. 봄은 생명이 탄생하는 계절이지만, ‘80년 광주 5월’은 잊을만하면 덧난 환후로 재발하는 통증은 이내 처참한 주검을 상기시킨다. <오월을 보내며>는 상여를 뒤따르는 슬픔처럼 “가는 오월을 견딜 수 없네/ 오는 유월, 칠월도/ 견딜 수 없기는 마찬가지네/ 흘러가는 것들은 다 견딜 수 없네”라며 고통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봄’의 생동성을 훼손당해버린 사람들에게 아카시아꽃이 하얗게 피는 ‘광주’ 5월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격동의 트라우마에 갇힌 시대를 맴돌 수밖에 없는 과거라는 시간을 망각하거나 임의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역사 속 진실이 위리籬된 내재율에 갇혀버린 금지곡처럼 들여다볼 수 없는 층리層理로만 존재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머물다 가는 그늘을 바라보네/ 완성하지 못한 오월의 문장은/ 훗날로 미루고 잃어버린 시간/ 돌아온다면 우리 꼭 다시 만나세”라며 상징적 은유에 머물 수밖에 없다. <나라가 지랄 염병을 해도>에서 “나라가 지랄 염병을 해도/ 거리마다 가을이 절정”처럼 해마다 돌아오는 계절은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암혹한 현실은 변한 것이 없다는 자조와 절망을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부당하고 부조리한 사건들을 외면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김완 시인의 시적 발현에 대한 출발과 모색은 과거와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진정함과 진실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사회 참여 의식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불만인 셈이다. 불편 부당한 것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편은 인간 존중의 보편적 사회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문학적 신념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의 말’에서 서정이 담긴 시를 쓰고 싶다는 열정을 이해한다면 시적 매력은 되풀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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